“이 회담은 그쪽의 의향으로 이루어진 것. 그쪽이 직접 열국으로 가, 원하는 평화를 직접 이룩하라. 만일 너희들이 진실로 평화를 바란다면, 이 제안을 거절하진 않겠지.”
어찌 보면 원하는 무엇이든 하라며 권한을 준 꼴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던 장성들은 내심 감탄했다.
‘그런 방법이!’
‘열국도 이 막무가내다. 이 협정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어. 그런데 이들을 보낸다면, 협상 중에 생길 마찰은 전부 이들에게 떠안길 수 있다!’
역시 장성들인가. 정치적 식견이 제법 있네. 어디, 회귀자는….
‘열국…. 회담…. 가면 미치광이들이랑 부닥거리겠지… 그놈들은 귀찮은데. 아. 이걸 노리는 거야?’
오, 정치적 식견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기가 겪은 경험으로 깨달았다. 극도로 반복된 경험은 식견이 되는구나.
“…호오. 우리를 보고 귀찮은 일을 맡기겠다는 거네? 겸사겸사 무력도발도 좀 시키고?”
“생각만큼 멍청하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뭐래. 무서워서 꼬리를 만 것치고는 기세가 등등한데?”
‘뭐, 열국에서 얻을 것도 있으니까. 상관은 없어. 열국이 휴전협정을 안 받아들이지는 않겠지. 이전 회차에서는 고작 이레 만에 국토를 유린당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했으니까. 다만… 협상이 된다고 해도 군국이 받아들일까가 여전히 문젠데….’
회귀자는 의심을 다분히 보이며 물었다.
“뭐, 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그쪽이 협상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며 어깃장을 놓으면?”
'지크흐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이건 국가 간의 문제. 군국의 관계자도 아닌,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너희들이 실무에 대해 알 리가 없지. 네 걱정은 이해한다.”
“내가 일을 못 할까 봐 걱정된다는 뜻이 아니야! 그 결과를 너희가 무시하면 또 번거로워지니까 걱정한 거지!”
“걱정하는 순서가 잘못되었군. 자기 무능함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순서를 착각한 건 너밖에 없거든!”
미안, 나도 아까 네가 일을 못 할까 봐 걱정했어. 거기 나도 더해줘.
“본국의 주요 인물을 하나 붙이겠다. 훌륭한 실무자이면서, 동시에 인질이 되어주겠지.”
“군국에 주요한 인물이 있어? 처음 듣는걸. 너희는 장성도 안 중요하게 여기잖아?”
“있다. 네가 모르는 것을 보니, 군국의 정보관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나 보군.”
‘지크흐룬드’는 홱 고개를 돌렸다. 원하는 바를 대강 얻기는 했지만, 회귀자는 묘한 패배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저 자식, 말로는 한마디도 안 져…! 칫, 이번 회차에 군국을 멸망시켰으면 한 대 때릴 수 있었을 텐데!’
어이, 그 이유로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지 마라.
할 말을 끝마친 ‘지크흐룬드’는 남은 장성들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은 더 묻고 싶은 부분이 있나?”
“회담은 이대로 끝이오?”
“조금 남았다. 단, 이 이후에 자네들은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어째서 그렇소?”
“이 협상을 보증하기 위한 ‘인질’에 대해 논하는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들까지 인질의 존재를 안다면 그 가치가 떨어지겠지.”
“으음…. 알겠소.”
납득한 장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본부를 나섰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면서, 하나같이 나와 히스토리아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저 놈팡이 자식…!’
‘젠장. 이래서 젊은 놈들에게는 중책을 맡겨선 안 돼! 혈기에 일이나 그르치고!’
아무래도 원한을 많이 산 것 같다. 앞으로 군국 쪽에 살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외부인이 빠져나가고, 관계자만 남은 합동본부 회의실. 잠시간 적막이 지나고.
“에휴, 지친다, 지쳐!”
어느새 되돌아온 힐데가 포옥 깊은 한숨을 쉬며 원탁 위에 늘어졌다.
줄어든 몸 때문에 옷이 길게 늘어진다. 다 드러난 어깨 위로 자줏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힐데는 늘어진 소맷자락을 붙잡고 원탁 위를 슬금슬금 기어 왔다.
힐데의 변모에 회귀자가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다.
“이걸 꼰대들 앞에서 보여줬어야 했는데….”
“보여주기 싫으니까 내보냈죠! 이러지 않고 ‘지크흐룬드’ 연기를 어떻게 하겠어요?”
변장술은 신체 그 자체를 다루는 것. 감기공이 경지에 이르다 못해 이치 끝자락에 닿을 지경이라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한 건 변함이 없다. 지친 듯 한숨을 폭 내쉰 힐데가 원탁 위에 편히 엎드렸다.
힐데는 자기 집인 것마냥 편히 엎드린 채 다리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쨌든, 알아들었죠? 인질을 교환할 거예요.”
“인질이라고?”
“네, 인질. 깊은 역사와 유구한 전통을 가진 훌륭한 보증 수단이죠!”
힐데는 유쾌하게 말했으나, 회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굳은 표정을 더욱 차갑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말 잘해야 할 거야. 나는 인질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네? 어째서죠?”
“어째서긴.”
‘조금 일을 벌이려고 치면, 나와 관계도 없는 이들을 잡아와서는 인질이랍시고 기분 더럽게 하니까. 망할. 생각하니까 또 화가 치밀어 올라…. 묵었던 여관에서 잠깐 말 걸었던 아이부터 잠깐 거래했던 상인까지…. 칫.’
회귀자는 짧게 회상을 끝냈다. 아무래도 전 회차에 인질극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모양이다. 회귀자는 상념 속에서 솟아오르는 불쾌함을 털어내고는 말했다.
“기분 더럽잖아.”
“흐음. 소중한 사람을 인질로 잡힌 적이 있나 보네요?”
“정반대야.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사람도 인질로 잡고는, 제 뜻대로 흔들려는 게 싫어.”
“인질의 가치를 부정하는 발언이네요. 흔들려고 인질을 잡는 건데, 흔들리기 싫다니.”
“흥. 그딴 것 필요 없어. 애초에 나에게는 인질이 될 만한 사람도 없는걸.”
“정말요?”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린 힐데는 내 쪽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러면 아버님도?”
“…쟤가 왜 아버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걔는 가져가 주는 쪽이 속 편한데.”
하하, 회귀자 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진짜로. 어떤 상황에서는 도움이 꽤 되는데 의지하기엔 영 미덥지 않아. 누가 가져가서 잘 쓰다가 필요할 때 돌려주지 않으려나.’
어? 진심이라고? 어이. 이 은혜도 모르는 회귀자 같으니! 내가 얼마나 공헌했는지 직접 이 입으로 말해야만 알아듣겠냐!
“셰이 씨. 너무하네요. 제가 이번에 얼마나 열심히 공헌했는데 저를 그냥 팔아넘기다니…. 포주도 이런 악덕 포주가 없어요!”
“일단 나는 포주가 아니지만, 내가 왜 포주인지는 둘째치고! 네가 뭘 공헌했는데? 갑자기 공주와 총사를 데리고 사라졌을 뿐이잖아!”
“정말,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군국과의 협상 자리는 저 덕분에 이루어진 거라고요!”
“뭐?”
“아버님 말 대로랍니다!”
힐데가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내 무릎 위에 다소곳이 앉은 힐데는 편한 자세로 고쳐 잡으며 말했다.
“음, 이런 말 하기는 죄송스럽지만, 아버님은 다른 분들보다 격이 좀 떨어지잖아요? 힘도 약하고, 딱히 느껴지는 것도 없고. 그런데 군국의 자랑스러운 장성이었던 히스토리아가 갑자기 그쪽에 붙더니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단 말이에요? 분명히 톡 치면 억하고 죽을 것 같은데!”
“사실이긴 한데, 그렇게 말하기에요?”
“이 뺀질뺀질한 얼굴로 다 꼬셨나…? 라고 하기엔, 남자도 한 명 끼어 있어서 그 가설도 폐기했죠! 셰이의 성적 취향을 보니 폐기한 건 잘못이었지만요!”
“부정할 수 없군요. 그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부정하라고! 명백하게 사실이 아니잖아!”
‘저 두 자식, 죽이 이상하리만치 척척 맞아! 내가 영궤를 보고 기분 나빴던 이유를 알겠어! 저 자식을 닮아서 그런 거야!’
그러게.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놀릴 생각이 가득이네. 즐겁게 키득거리던 힐데는 머리로 내 가슴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게 핵심인 법이죠. 당연히, ‘저’와 군국은 아버님이 여러분을 이끄는 줄 알았어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사건도 있고, 무엇보다 아버님 행적이 이전에 벌어졌던 란카르트 대령의 탈옥 사건과 닮아있었으니까요!”
진실이다. 그래서 힐데는 연금강 제련소에서 나를 노렸지. 뭐, 완전히 빗나간 추측이지만.
내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들, 이 무리를 이끄는 주체는 회귀자니까.
“당연히? 흥. 우리가 왜 저 녀석을 따라?”
“네? 아닌가요?”
“당연히 아니지….”
회귀자는 말을 하다 말고는 멈칫했다.
‘잠깐. 아지도, 티르칸쟈카도, 심지어 총사도 휴즈를 따라온 거잖아? 그들을 제외한다면 나를 따라온 건 그다지 의지는 안 되는 나비와 공주 정도? 어라? 어쩌면 저 녀석이 이번 회차의 기연일지도…?’
이제야 알았냐, 회귀자? 내가 얼마나 너를 많이 도왔는지?
한껏 기세가 오른 나는 냅다 회귀자를 다그쳤다.
“셰이 씨. 이제 제 소중함을 알았나요?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주세요. 소정의 금전적인 보상과 함께.”
“…이익! 내 말은, 진실이야 어쨌든, 우리가 저 녀석을 따를 거라고 판단할 이유가 없잖아! 말마따나 뺀질거리는 것 말고는 별달리 돋보이지 않는 녀석인데!”
오호라. 이렇게 빠져나가겠다? 그렇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가 싫나?
회귀자가 다그치자 힐데는 손가락을 양옆으로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요, 이유는 있답니다~. 아버님이 예언자거나, 예언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여행하며 만난 동료와 힘을 합쳐 악적을 무찌른다. 서사시에서 흔하게 나오는 장면이잖아요!”
저건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실이다. 내가 힐데의 정체를 폭로한 뒤, 힐데는 나를 향해 ‘예언자’니 뭐니 했었지. 그때 힐데는 진짜 내가 예언자나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착각했다.
그 착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는 슬쩍 인간의 왕을 암시해야 했다. 상당히 아쉬운 패를 쓴 셈이지만 뭐, 후회하진 않는다. 비장의 패도 언젠가는 써야 의미가 있는 법. 덕분에 군국의 기밀을 알아차리고… ‘인간’을 지켰지.
“예언자? 성황청의?”
“네! 군국은 성황청에 좀 밉보였거든요!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씀!”
“확실히. 그런 감은 있지.”
‘맞아. 성황청은 군국을 주시하곤 했어. 이전 회차에도, 군국이 전쟁을 크게 일으키면 성황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니까.’
아마 그건 유엘 때문인 것 같지만, 일단 이 부분은 그냥 넘기도록 하자.
“그런데! 아버님이 홀로 남아서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걸 밝혔거든요! 당신과 시조를 둔 채로 아버님 홀로 이야기하러 오셨죠. 덕분에 군국도 나름대로 안심하고 대화에 응했고, 왁자지껄 이래저래 우왕좌왕한 덕분에! 이 회담 자리가 마련됐다는 말씀!”
“왁자지껄 이래저래 우왕좌왕이 뭔데? 너무 대충 넘겼잖아!”
“미안해요. 다 설명하기는 귀찮아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귀찮아하지 말라고….”
단시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와 힐데의 조합이 피곤했기 때문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회귀자는 나를 보고는 궁금한 점을….
‘아니지. 저 자식한테 물어보는 것보단 차라리.’
사고회로가 이해되지는 않지만, 고개를 홱 돌리고는 그나마 믿음직스럽게 보이는 히스토리아에게 물었다.
“총사. 정말이야?”
“아….”
‘전혀. 휴이가 대화를 하려고 간 건 맞겠지만…. 그건 평화협정 때문이 아니야. 아마 휴이가 인간의 왕이라서 부른 것일 테지….’
그렇지만 회귀자. 미안한데 히스토리아도 내 편이거든. 전적으로 나를 따르지는 않아도, 내가 밝히지 않은 정보는 숨겨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