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맞아. 그때 막시밀리앵이 방해하려고 했고, 나와 휴이가 막아냈어. 간신히 쓰러뜨렸나 했더니….”
“아아, 알겠어. 그래서 네비다가 왔구나?”
내가 인간의 왕이라는 정보와 유엘의 존재는 쏙 빼긴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지극히 진실에 가깝다. 이치에 들어맞는 이야기에 회귀자를 납득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이해했어. 그래서 뭐? 휴즈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 인질로 삼겠다고?”
“아하하. 그게 될 리 없죠. 어떻게 아버님과 같은 분을 감히 인질로 요구하겠어요? 그럴 수도 없고, 만일 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텐데.”
‘쩝. 뭔가 아쉽다….’
줄 수 있으면 줄 생각이었냐?
젠장. 차라리 몰랐으면 몰라도, 독심술 때문에 진심을 알아서 괜히 기분이 나쁘네. 너 언젠가는 복수한다. 네가 인질로 잡혀도 잔뜩 애태우다가 구해주겠어!
내가 속으로 분을 삭히는 동안, 힐데는 키득키득 웃으며 인질을 밝혔다.
“안심하세요! 셰이의 인질은 공주님이랑 그 시녀에요!”
“공주라고?”
회귀자는 놀라서 반문했다. 인질로 삼은 대상이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이다.
‘이번 회차에서 공주와 나는 별로 연관이 없을 텐데? 거기다, 레지스탕스의 수장인 공주를 인질로 삼겠다면 도리어 레지스탕스를 좌시해야 하잖아?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인질에게 직간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는 없을 테니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처지다. 수지타산으로 따지만 더할 나위가 없다. 회귀자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애초에 이번 회차에서는 공주와 얼마 관여하지 않았어. 지난 회차라면 모를까, 별로 어떻게 되든….’
그러나 당연히 수락해야 하는 제안에도 회귀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녀의 뇌리로 이번 회차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가 스쳐 지나간다. 전체적인 회상…보다는 특정 인물에 엮인 기억만 끄집어낼 뿐이지만, 어쨌든 꽤 괜찮은 단서였기에 나는 최대한 생각을 읽었다.
2회차 때, 회귀자는 군국의 징집령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었다. 그때 레지스탕스를 통해 열국으로 탈출할 때 공주와 마주쳤다. 노련한 지도자였던 공주는 그때 레지스탕스가 되라고 제안했으나, 싸움이 두려웠던 회귀자는 거절하고 열국으로 향했다. 와중 습격당해 죽어버렸지만.
3회차 때, 회귀자는 힘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레지스탕스에 투신했다. 2회차에 비하면 덜 노련했던 공주는 의심을 품고 회귀자를 시험했지만, 머지않아 깊게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공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잊힌 왕국 기공을 익히며 찬찬히 힘을 길렀다. 1회차, 2회차 때 익힌 제식 기공과 죽음을 넘나들며 얻은 실전경험 덕분에 금방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그 뒤, 점차 커다란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에서 점차 레지스탕스를 거치는 일은 줄었지만… 공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회귀자의 친구였다.
비록 이번 회차는 아닐지라도.
회귀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
“싫어.”
지금까지, 회귀자는 어디까지나 회담 중이었다. 불쾌해도 힘을 쓰려고 하지는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금방이라도 칼을 꺼낼 듯이 사납다. 적을 향한 날카로운 살의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떼를 쓰려는 어린아이와 같은 난폭함이다. 단지, 그 힘의 크기가 마신급일 뿐.
“말했지? 나는 인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게 누가 되든.”
“어라라?”
힐데가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으나, 회귀자의 표정은 더욱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오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제한적으로 힘을 썼을 뿐이다. 그러나… 회귀자가 작정하고 난동을 피우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나라 하나는 멸망할 것이다. 특히 지난 몇 회차에서도 꾸준히 멸망시켰던 군국이라면 더욱 쉽겠지.
회귀자는 천앵의 자루에 손을 올리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인질까지 잡혀가며 휘둘리려고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 줄 알아? 당장, 돌려놔.”
무시무시한 기세가 회귀자로부터 피어나온다. 그 기세는 정확히 힐데를 향했다. 물론, 힐데는 내 무릎 위에 있는 탓에 나도 기세를 정면으로 맞게 되었지만.
힐데는 난처한 듯 나에게 물었다.
“으음. 이거 곤란한데요~. 여기서 인질의 안전을 가지고 시위하면 안 될 것 같고. 아버님, 어떻게 안 될까요?”
아니, 지금 나한테 물어봤자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데. 나도 손이 벌벌 떨리고 있다고.
“휴즈.”
젠장, 역시 왔다. 나는 약간 비굴하게 대답했다.
“아, 네.”
“나는 너를 동료로 생각하고 있어. 만일 네가 인질이든 뭐든 잡힌다면 내 기분이 매우 더러울 거야.”
너 조금 전만 해도 나를 인질로 팔아먹을 생각까지 했으면서!
…물론, 본심은 아니겠지.
회귀자는 일단 자기 동료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꽤나 헌신적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다. 네비다가 나를 데려가려는 그때. 회귀자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달려들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회귀자는 그 행동에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네가 직접 네 친구와 공주를 인질로 삼으라고 제안하지는 않았을 거야. 다만, 만일 그런 조건이어야만 협상할 수 있었다면…. 아무리 공주가 공격받지 않는다고 해도, 그걸 받아들였다면….”
회귀자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약간의 실망감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그 차이로 인해서 내 앞으로의 운명이 크게 갈린다.
이번 회차 말고, 다음 회차까지.
‘인정해. 휴즈는 기연이야. 모든 회차 통틀어서 일이 이토록 수월하게 풀린 적은 없었어. 분명 휴즈 덕분이지.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어. 과연 나는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유능과 무능. 그 사이에서 나는 분명 유능한 쪽이다. 그렇지만 회귀자에게 그 부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휴즈. 대답해줘. 그들은 어디 있어?”
“어… 그게. 슬슬 도착할 텐데요…,”
내가 말을 끝난 직후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한쪽 어깨엔 양산을, 다른 쪽 어깨엔 골렘을 얹은 티르가 나타났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티르는 나를 발견했다.
“휴!”
티르는 나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짓고는 일직선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걸음은 힘찼지만 보폭이 작아서 그런지 다가오는 데는 꽤 걸렸다.
현재 히스토리아 다음으로 나에게 호의적인 동료이자, 아군일 때 가장 든든한 존재. 흡혈귀의 시조 티르칸쟈카.
참 아쉽다. 만일 군국의 숨겨진 배후가 성녀만 아니었더라면 내 커다란 힘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티르를 데려가면 파괴와 학살밖에 일어나지 않을 테니 함께하지 못했어.
나는 티르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인 것 같네요. 말도 없이 가서 미안했어요. 할 일이 있어서….”
티르는 골렘을 둔 쪽 어깨를 살짝 내보였다.
“이 인형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다. 협상을 위해 홀로 갔다고 하더구나. 뜻이야 알겠다만, 어찌 조금의 언질도 없이 가버린단 말이냐. 걱정하지 않았느냐. 헌데…. 왜 그러고 있느냐?”
반갑게 다가오던 티르는 회귀자와 우리의 대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회귀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 티르에게 있다. 정확히는 티르의 어깨 위에.
나는 골렘을 불렀다.
“에이비.”
지금 상당히 바쁜 모양인지, 골렘이 내 말에 반응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군국 통신병 에이비입니다. 귀하. 설득은 잘 이루어졌습니까?]
“아직요. 에이비. 셰이 씨가 경애하는 공주님의 안전을 걱정하던데요.”
[경애하는 공주님…? 예리엔 그란디오모르를 부르는 말입니까?]
“네. 안전이 궁금한가 봐요. 불러주시겠어요?”
골렘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연결을 유지한 채로 어딘가에 말을 걸었다.
[예리엔 그란디오모르. 귀하를 찾는 이가 있습니다. 긍정. 셰이가 귀하의 안전이 걱정된다고… 잠깐, 멈추십시오. 본관의 귀에 대고 소리쳐보았자 골렘에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동조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잠, 그대로 정지하십시오! 입술을 겹치고 말한다고 해도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구조가 아니며,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전력으로 거부합니다!]
내가 생각은 읽지 못하지만,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추측이 된다. 이게 군국의 왕이 망국의 공주와 나누는 대화인가? 정말 위엄이 넘치고 점잖은 게 군국의 미래가 밝네. 너무 밝아서, 군인들이 보았다면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위엄도 없고, 위험은 더더욱 없어 보이는 대화 끝에 골렘은 극적인 결론을 냈다.
[긍정. 동조의 특성상, 본관과 최대한 맞닿은 채라면 목소리를 전할 수 있을 겁니다. 등을… 끌어안는 것도, 어떨까 싶습니다만….]
뭔가 내키지 않는 듯한 에이비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점차 공주의 목소리가 사이사이 번지듯 들려왔다. 누군가의 등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불분명했지만 공주의 목소리라는 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셰이 공?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으…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지만, 찾아주셨다는 그 자체로도 또 기쁘네요…. 에헤헤….]
듣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다 사라지는 순진무구한 목소리다. 안전하다 못해 편안한 분위기가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진다. 아마 회귀자의 기억 속의 공주와는 사뭇 다르겠지.
‘잠깐. 뭐야. 인질이라며?’
상당히 당황한 회귀자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골렘을 향해 말했다.
“…무사해?”
[네! 셰이 공은 괜찮으세요? 저는 셰이 공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나야 괜찮고. 통신병과 함께라니. 어떻게 된 일이야?”
[아, 저요? 원래는 시아티를 따라 남은 거긴 한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조금 더 이곳에서 에이비와 유엘을 지켜보고 싶어요.]
“에이비라면… 통신병?”
[네! 이곳은 좁고 답답하지만, 여러 사람이 있고 수많은 ‘창문’도 나 있어요. 누구보다 넓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군국을 관찰할 수 있어요. 이곳이라면 분명 군국을 더 좋게 만들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에이비와 함께라면…. 앗, 미안해요, 에이비….]
잠깐 양해를 구하는 듯한 움직임. 점차 공주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다시 에이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입니다. 본관의 육신은 하나이며, 예리엔 그란디오모르가 밀착하여 있을 경우 타 골렘 조종에 커다란 장애를 겪습니다. 현시점 우선해야 할 일이 많기에 그녀의 전언은 여기서 맺겠습니다.]
골렘은 다시 에이비의 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골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고가 많아요, 에이비.”
[받은 책무에 비한다면 가볍습니다. 귀하. 군국을 떠나십니까?]
“네. 여기서 이야기만 끝나면 바로 열국으로 출발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골렘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잠깐 접속을 해제한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뒤, 골렘은 고개를 팍 들면서 다시금 말을 걸었다.
[행정적인 처리를 해두었습니다. 귀하는 군국에 존재하는 모든 행정시설에서 장성급 의전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야호. 고마워요, 에이비!”
[부정. 아닙니다. 본관은, 본관이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것뿐이기에…. 이것이라도.]
“그것뿐이라니요? 장성급 의전은 군국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대우인데. 제가 살면서 언제 그런 대우를 받아볼까요! ”
[도움이 되었다면 저도…. 후훗.]
골렘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작게 들썩거렸다. 인간의 모습일 때도 잘 보여주지 않은 인간적인 웃음이었다. 그렇지만 듣기 좋은 웃음도 오래 가진 못했다.
[…아이케. 수신 중입니다. 긍정. 본관이 해결하겠습니다. 조속히 그곳에서 이탈하십시오. 이상.]
이곳에 연결을 둔 채 다른 곳과도 복수로 통신하고 있나 보네. 얼마나 바쁜 걸까. 골렘은 보고가 끝나자마자 빠르게 말했다.
[본관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것뿐입니다, 귀하. 본관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생이 많네요. 수고하세요, 에이비.”
[다만, 귀하가 군국에 있는 한, 본관은 언제까지나 귀하를 지켜볼 것입니다.]
“어, 그건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약간 무섭지 않나요. 저는 혹여나 신이 저를 굽어살필까 봐 신도 안 믿는데요. 제 행동 하나하나를 몰래 지켜보는 존재는 좀 소름이 끼치잖아요?”
[부정. 본관은 신과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본관은 당당하게 지켜봅니다. 귀하에게 그 사실을 선언할 정도로.]
하긴, 차이가 있긴 하다. 신은 나에게 직접 굽어살피겠노라고 허락을 맡진 않으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차이인가 싶지만.
어쨌든 골렘은 당당하게 스토킹 발언을 한 뒤에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게 되는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툭. 하고 골렘의 연결이 끊겼다. 즐겁게 대화를 나눈 나는 힐데와 함께 회귀자를 돌아보았다. 회귀자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힘겨워하고 있었다.
'잠깐. 뭐야. 인질이라며. 왜 통신병이랑 함께 있는 건데? 것보다, 통신병은 인간 같지도 않던 인형들 아니었나? 왜 저 녀석이랑 저렇게 정겨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