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수한다고 했지? 지금이 그 시간이다. 나는 회귀자를 흉내 내며 말했다.
“나는 인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게 누가 되든. 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네요. 셰이 씨. 방금 좀 멋있었어요.”
“윽!”
기회를 엿보던 힐데도 한 마디 보탰다.
“‘저’를 노려보며 당장 돌려놔, 라고 할 때는 정말 심장이 떨어질 뻔했어요. 아버님, '제' 심장 소리가 들리나요? 이 두근거림… 어쩌죠.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아요.”
“공주님이 여기 안 계신 게 다행이네요. 힐데도 이 정도인데, 직접 들었다면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절대 공격할 수 없는 공주님을 이렇게 공략하다니, 역시 셰이 씨.”
“다, 닥쳐!”
“여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악마의 재능이네요. 자기가 바란 재능은 그게 아니겠지만요.”
“아니요, 힐데. 고백하자면 사실 제 가슴도 조금 두근거렸답니다.”
“안 돼요! 남자 따위한테 아버님은 줄 수 없어요!”
“너희 둘 다 그만하라고 했지!”
하하. 여기서 끝내기는 아쉽지. 마침 티르도 왔으니까 한마디 하라고 해봐야겠다.
그나저나 티르는 왜 입을 틀어막고 가만히 있는 거지? 뭐 놀랄 만한 일이라도 있나?
'아…버님…? 휴에게, 벌써 이리 장성한 아이가 있었다니…?'
…놀랄 만한 일이네. 나조차도 너무 뜬금없어서 놀랐어. 이 오해는 최대한 빨리 풀도록 하자.
내 공격이 잠잠해진 틈을 타 회귀자가 치고들어왔다.
“그보다 뭐야, 그 통신병! 무저갱에 있던 그 통신병이잖아! 왜 너와 친한 듯이 말을 걸고 있는 거야!”
이래서야 원. 내가 남을 잘 평가하지는 않지만, 너는 통신병도 모르면서 뭔 군국을 자꾸 부수니 어쩌니 하고 있었냐. 나는 회귀자가 잘 보이도록 손가락을 들어 까딱거렸다.
“셰이 씨. 세상에 거짓말쟁이가 딱 하나만 있다면, 그건 신이나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허무맹랑한 내용을 말해도 전부 진실이 되어버리거든요.”
“그게 너라고?”
“아니요, 저 말고. 에이비요. 제가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쳤거든요. 달리 말해서 에이비는 군국 통신병들의 신이라는 말씀. 그게 얼마나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힐데가 내 말을 받아 이어 말했다.
“어쨌든, 사령부에 튼튼한 끈을 만들어 둔 아버님에게 감사하세요. 인질은 대외적인 명분일 뿐, 사실 모두 자기 가야 할 곳에 간 거죠.”
“끙….”
“참고로, 군국이 보낼 인질은 바로 ‘저’! 독자적으로 판단할 권한이 있는 데다 군국의 기밀정보를 모조리 알고 있고, 여차할 때 실무협상까지 진행할 유일한 인재니까요!”
“알았어. 알았다고. 인질 이야기는 그게 다지?”
“아니요! 의외로 하나 있어요. 진짜 ‘인질’!”
힐데는 싱글싱글 웃으며 히스토리아를 가리켰다.
“히스토리아는 여기 남아야 해요!”
인질이 가져야 하는 덕목은 무엇일까?
상대에게 중요하거나 상징적인 존재인가, 혹은 인질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를 압박하는 카드로 쓸 수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좀 약해야 한다.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인질은 돌려받고 싶을 때 돌려받지 못하는 돈처럼 애매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스토리아는 인질로서 여러모로 부적격이다. ‘군국의 딸’이라는 이명을 가진 히스토리아를 구속한 순간 군국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며, 무엇보다 너무 강하다. 육장성 태반이 이탈한 지금 히스토리아를 구속하거나 죽이려면 얼마나 손해를 감수해야 할까.
지목당한 히스토리아는 말없이 앉아 깊게 생각에 잠긴 채였다. 회귀자는 의아해하며 답했다.
“…총사를 인질로 삼겠다고? 그게 돼? 아니, 왜?”
“달라요. 인질은 히스토리아가 아니야.”
힐데는 입가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내 무릎에서 폴짝 뛰어 원탁 위로 올라간 힐데는 자기 손목의 생체 단말을 꾹 눌렀다. 늘어졌던 옷이 그녀의 체구에 맞추어 순식간에 줄어든다.
“인질은 군국. 금방이라도 부서질 이 가련한 나라를 위한 마지막 보루로 육장성 히스토리아가 필요해요. 과병 막시밀리앵도, 영궤 지크흐룬드도, 천통 에이메데르도 없거나 자리를 뜬 지금. 총사 히스토리아가 없다면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지도.”
놀랍게도, 군국은 인질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 무너졌다간 세상에 혼란이 찾아올 것이며, 남겨두면 나의 든든한 아군이 될 거고, 어떻게 손을 대냐에 따라 금방 무너질 수도 부흥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한 국가가 인질이라니. 이 스케일은 적응하기 힘들지만. 내실을 생각하면 왜 고개가 끄덕여질까.
“물론, 히스토리아가 있다고 안 무너진다는 건 아니에요! 단지, 총사령부가 원할 때 쓸 수 있는 전력이 없다면. 총사령부는 영향력 제로! 아버님의 통신병도 금방 한계에 봉착하겠죠! 어때요, 받아들이실 건가요, 아버님?”
그렇지만 알 게 뭔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부분은 저에게 물어봐도 의미 없죠. 리아에게 물어 봐야지. 리아, 너 인질 할 의향이 있니?”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네요. 그렇겠죠.”
나는 입을 다문 히스토리아 대신 그렇게 전했다. 힐데가 재차 물었다.
“군국이 멸망해도요?”
“혹시 제가 군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뭔지 알아요? 이깟 나라, 확 망해버려라랍니다. 드디어 말로만 되뇌었던 소원을 실현할 날이 왔군요.”
“대단해! 나라의 흥망성쇠 정도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아. 역시 아버님!”
힐데는 꺄아거리며 나를 치켜세웠다. 이 촌극을 지켜보던 티르는 입을 다시 틀어막으며 더 큰 오해를 시작했다.
‘이 자연스러운 아버님이라는 호칭부터, 둘의 짝짜꿍이 딱 들어맞는 것까지…! 이리 보니 꽤 닮은 것 같기도 하지 않느냐…! 정말 자식이더냐? 그러면, 도대체 몇 살에 결혼을…!’
아니라고. 오히려 힐데가 나보다 연상이니까, 나는 태어나기도 전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지만 혼자 삽질하는 모습이 조금 재밌으니까 가만히 두자. 어차피 오해하는 쪽은 티르고, 오해받아 곤란해지는 쪽은 힐데니까 나는 구경만 하면 될 듯.
“자. 어쨌든 이 이야기는 잠시 피로를 푼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죠. 이상.”
내가 선언하자 티르가 조심조심 힐데에게 다가가더니, 한쪽 팔로 자기 치맛단을 살짝 잡으면서 우아하게 인사했다.
“반갑구나, 아이야. 나는 티르칸쟈카라고 한단다. 세간에서는 흡혈귀의 시조라 불리는 불민한 몸이나, 무저갱에서 휴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니 불안해하지 말거라. 내 피에 대고 선언하마. 네 피를 탐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라? 이분이 갑자기 왜 이럴까요?’
아, 힐데가 눈을 끔뻑이며 당황했다. 저 인간도 당황은 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변신술사이기 전 탁월한 연기자였던 힐데는 유연하게 그 상황을 받아냈다.
“반가워요, 티르칸쟈카. 아버님이 신세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적지만, 그래도 서로 주고받으며 많이 의지하는 사이지. 너도 나에게 의지해도 된단다.”
“와아! 든든하네요, 정말 좋아요!”
…잘 대처할 거라 믿는다, 힐데. 실수로라도 어머님이라 부르지만 않기를.
오해의 확대재생산 과정에 돌입한 둘을 놔두고 나는 회귀자에게로 향했다.
“뭐, 이 부분은 둘째치고. 셰이 씨. 이제 인정하시겠죠?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진짜 뼈 빠지게 일해도 알아주지 않고.”
회귀자는 불만스럽게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알았어! 고마워!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참나. 엎드려 절 받기네요. 가능하면 앞으로는 제가 재촉하기 전에 감사의 표현을 해주세요.”
“고맙다고 말해도 잔말이 많아! 네가 조금만 먼저 알려줬어도 안심했을 거 아니야!”
방귀 뀐 놈이 성내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걸 요구해도 뭐라고 해.
그리고 안 알려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셰이 씨. 저와 리아가 막시밀리앵과 대치할 때 말이에요. 시간을 끌려고 대화를 시도했단 말이에요.”
“아, 그 녀석이랑 싸웠다고 했지?”
‘과병 그 자식은 떠벌이는 걸 좋아하니까. 확실히 방심하다가 한 방 맞을 타입이지.’
“네. 그때 죄악의 왕 이야기를 꺼냈더니, 막시밀리앵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죄악의 왕은 있을 리 없다고. 혹시 인간의 왕을 달리 말한 게 아니냐고 하던데.”
내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렇지만 회귀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죄악의 왕은 죄악의 왕이야.”
“하지만 죄악은 짐승이 아니라던데요? 죄악을 가진 짐승은 오직 인간이니, 죄악의 왕은 인간의 왕일 수밖에 없다고.”
“아니. 죄악의 왕은 인간의 왕이 아니야. 둘은 다른 존재야…. 그래야만 해.”
호오.
왠지 거짓말에 서툰 회귀자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언하더니, 그렇게 된 건가.
죄악의 왕은 인간의 왕과 다르다. 회귀자는 그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믿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짐승의 왕이나 세계의 비밀 자체는 꽤 알고 있다. 그렇지만 죄악의 왕은 반드시 인간의 왕이라는 결론으로부터는 필사적으로 눈을 돌린다. 줄기차게, 심지어 자기 자신도 속일 정도로 그렇게 외치고 있다. 왜냐면….
‘내가 상대해야 하는 그 존재가. 인간의 왕이라고…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왕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 버림받았다는 뜻이잖아. 나를 포함해서….’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그녀의 의지가 꺾일 것 같았으니까.
순수하게 자기 기분 문제였다. 뭐, 그럴 수 있지. 모티베이션은 엄청나게 중요한 법이거든.
“흐음. 알았어요. 그렇다면야.”
“내 말을 믿어?”
“믿고 자시고. 애초에 안 따를 수가 없잖아요. 세상이 멸망한다니. 믿기는 힘들지만… 그렇기엔 어지간한 성녀 이상으로 아는 게 너무 많기도 하고. 잘 설명해주진 않지만.”
“아, 그, 그건.”
“그리고 따라다니면 뭔가 얻어먹을 게 좀 생기니까요. 이번에만 봐도, 꼽사리 끼면서 혼란한 와중 군국 총사령부에 줄까지 댔어요. 위기는 곧 기회. 뒷골목에서는 불가능했던 위업이죠.”
“그게 중요한 거였냐!”
“어쩌면 셰이 씨가 아주 질 나쁜 사기꾼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괜찮답니다. 그게 세계구급 사기극이면 어때요? 거기서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면 이득이지. 원래 사기극은 밝히기보단 편승해야 먹을 게 많이 떨어지는 법이에요.”
“…도리어 내가 너를 믿어도 될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회귀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고는 어떤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막시밀리앵은 휴즈를 보고 인간의 왕이냐고 했지. 아지가 근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낸 얼치기 결론이지만, 혹시….’
이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확인해볼 수 있겠네.
내가 인간의 왕이라는 건 어쨌든 사실이며, 꽤 여러 가지로 티가 나긴 했다. 그런데 정작 이 비밀을 가장 먼저 알고 있어야 할 회귀자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처음 내가 그녀와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그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나도 그 사실이 의아했으나, 머지않아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이 가설이라면 회귀자가 나를 몰라본 이유도 납득이 간다.
그렇지만 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약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무엇보다 회귀자의 기억에서 ‘인간의 왕’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내야 했으니까. 가능한 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서.
‘인간의 왕… 아냐, 그럴 리 없지.’
좀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나는 내 가설을 검증할 기회를 얻었다. 회귀자가 아련히 그 기억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왜냐면 나는 인간의 왕을… 아니, 죄악의 왕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그리고 회귀자의 회상이 이어졌다.
***
죄악의 왕이 나타났다. 그리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라 하나가 멸망했다.
성황청이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세상 널리 알렸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에 피폐해진 인간들은 전쟁을 멈추고 죄악의 왕을 무찌르기 위해 힘을 모았다.
어쩌면 그들은 전쟁을 멈출 계기만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간 인류가 멸절하기 전에 자기 나라부터 멸망하기 직전이었으니까.
어쨌든 죄악의 왕은 매우 강력한 존재다. 그뿐만 아니라, 죄악에 물든 인간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죄악의 왕에게 자신을 바치기까지 했다. 죄악의 왕은 친히 그들을 처형하고, 그 심장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가. 죄악의 왕이라더니, 그 이름값에 걸맞은 악행이다.
뭇 인간은 죄악의 왕이 저지른 악행에 분노했다. 그 분노는 소급적용되어, 그들끼리 벌인 전쟁에서 생겨난 각종 참사와 비극마저도 죄악의 왕 때문이라 여겼다. 인간은 지금껏 일어난 모든 죄악의 책임을 묻기 위해 죄악의 왕에게로 향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