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인간이 외면했던 죄악은… 너무나도 컸다.
“너희들은 영혼이 영원불멸이며, 선악에 따라 사후에 심판되리라 갈망하였으나. 그것은 가장 끔찍한 거짓이다.”
그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죄악이자, 재앙. 죽음의 의인화였다.
“세상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다. 너희들이 울부짖는 신은 하늘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에서는 벼락이 비처럼 쏟아진다. 대지는 인간을 떠받치기를 거부한다. 평생 넘어진 적 없던 이가 평지에서 실족하고, 허상을 향해 칼을 휘두르다가 동료를 찌른다. 열매에서 태어난 짐승이 맹수가 파도처럼 몰려든다. 짐승을 죽이기 위해 발전한 기술은 엉뚱한 방향으로 비틀린다.
피와 불꽃이 솟구친다. 비명과 천둥이 메아리친다. 타다 남은 살점이 검은 연기와 함께 피어오른다. 감전사, 소사, 실혈사, 실족사, 압사, 폭사. 온갖 종류의 죽음이 시체의 형태로 전장에 전시된다.
그 한가운데에서 죄악의 왕은 죽음을 발자국 삼아 걸었다.
“명예롭게 싸우다 죽은 이만 가는 전사의 전당도, 고난을 겪은 이들만을 위해 준비한 낙원도, 구름 위에 있는 쉼터도. 죽음 뒤에는 그 무엇도 없다.”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낸 전사들, 불가능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영웅들, 전화를 피해 은둔한 은거기인들. 보물과 유품으로 무장하고, 지혜의 축복을 둘둘 두른 채로 나선 강자들이 죄악의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부 죽었다.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죄악의 왕은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낸 걸작들을 비웃으며 하나하나 부수었다. 낫이 번뜩일 때마다 누군가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셰이도 마찬가지였다.
지잔이 부러졌다. 천앵이 깨졌다. 짓눌린 다리에는 감각이 없고, 구멍 난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셰이는 아직 살아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일 뿐이었다.
“있는 건, 버려진 납골당 하나뿐.”
죄악의 왕이 낫을 뽑았다. 누군가의 시체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온다. 뚜벅, 뚜벅. 다음 희생자를 찾는 재앙의 발걸음이 셰이에게로 향한다. 셰이는 부러진 지잔 자루를 거머쥐며, 계속 내려가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치켜들었다.
셰이의 눈앞에는 그것이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 죄악의 왕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납골당. 잊힌 이들을 추모하는 도서관. 너희가 결코 갚지 못할 공수표를 남발할 때, 그것을 주워 부장품으로 삼은 장의사.”
군데군데 뻗친 지저분한 머리카락. 인간의 심연을 엿본 듯한 칠흑의 눈동자. 얼굴에는 피로 문신을 그리고, 누군가의 두개골을 뒤집어썼다. 짐승의 자식과도 같은 야성이 돋보인다.
다만, 그 모습마저도 섬뜩하리만치 아름답다.
머리가 내려가려고 한다. 지쳐서? 아니, 그 위용과 위엄을 마주한 본능이 머리를 조아리라 명령하고 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굴복하여 목숨을 구걸하라 외치고 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싶지만, 셰이는 이를 악물고 그 명령에 저항했다. 태어날 때부터 반골이었던 그녀는 본능을 거부하고 죄악의 왕을 마주 보았다.
이 삶은 끝이 아니다. 하나라도 더 보아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야 한다. 다음 회차를 위해서라도.
-그러나.
“만일 너에게 다음이 있더라도, 나는 돌아올 것이니.”
마치 회귀를 염두에 둔 듯한 말에, 셰이도 평정을 잃고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온다.
“…아, 으아….”
“가서 전하라. 너희들의 정의는 파산하였으며, 곧 내가 곧 거두러 가겠노라고. 미래와 운명을 담보로 부르짖은 정의와 도덕은 결국 바닥을 보였노라고.”
죽음마저도 도피처가 될 수 없다. 그 너머의 세상도 안전하지 않다. 회귀자는 그제야 그녀의 운명을 깨달았다.
그녀의 회귀는… 죄악의 왕을 무찌르지 않는 한 계속될 것임을.
두려움이 엄습한다. 죽음도 뿌리치지 못할 위협.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
지치고, 벅차고, 외롭기까지 한 회귀의 끝에서 발견한 목적지는… 너무나도 멀고 높았다. 평생은커녕, 영원히 걸어도 도저히 닿으리라 생각지 못할 정도로.
그러나.
그런데도.
셰이는 포기하는 대신, 지쳐 우는 대신 죄악의 왕을 노려보았다.
“흥…. 못 알아들을 말만 잔뜩 지껄여대고….”
뻔한 결과마저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기에. 상대방과의 격차를 다 눈에 담지도 못할 만큼 식견이 얕아서. 벽이 있어도, 일단 들이박기 전에는 그 단단함을 모를 정도로 멍청해서.
셰이는 부러진 천앵을 맨주먹으로 쥐었다.
“언젠간 그 입 다물게 할 테니까…. 두고…봐.”
죄악의 왕은 짧게 침묵했다. 그건 어리석음을 향한 비웃음일지, 아니면 인간을 향한 경의일지.
침묵의 끝에서, 죄악의 왕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까지고.”
직후 낫이 움직였다. 그 회차, 셰이가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
음. 그래.
예상은 했었지만, 저거 분명 인간의 왕이다. 좀 많이 강해 보이지만 그건 뭔가 사정이 있겠고. 일단 인간의 왕은 맞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나는 아니다. 얼굴도 체격도 성별도 나와는 정반대.
흠.
‘…인간의 왕은 아니야. 그럴 리 없지. 그때 그거랑 전혀 안 닮았는걸.’
짐승의 왕이 죽음을 맞이하면, 세상 어딘가에서 또 다른 짐승의 왕이 생겨난다. 새로 태어난 짐승의 왕은 이전 왕과는 별개의 존재다. 같은 약속을 짊어지겠지만, 그걸 제외하면 기억도, 외모도, 성격도 다르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서.
이전 회차의 나는 죽었다는 뜻이겠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건 모른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 하는 짓이나, 성황청이 하는 짓 생각해보면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1년 뒤 내가 죽는댄다. 10년 뒤 세상이 멸망한댄다. 인생을 스포일러당했다.
물론, 1년 뒤 내가 죽는다는 사실 자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야, 10년 뒤에 죄악의 왕이 세상을 멸망시킨다면. 나는 그 전에 죽어야 하니까.
회귀자의 등장 덕분에 무저갱에서는 탈출했지만… 그 탓에 너무 커다란 흐름에 깊게 연관되어버렸다. 이제 더는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겠지.
젠장, 평범하게 살라고 했더니, 살려면 평범해질 수가 없잖아.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세상이 멸망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인간의 멸절도 그렇다. 도대체 어떤 짓을 저질렀기에 인간의 왕이 종족적인 자멸 행위에 착수했는지는 모르나, 나는 아직 그럴 생각도 없다.
네비다나 성황청을 비롯한 몇몇은 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이고.
회귀자가 그러는 것처럼, 나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칠 수밖에.
***
NOTICE
오늘 연재분은 회귀자 셰이가 무저갱에 방문하지 않았을 때 있었던 과거 회차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무저갱에서 팍팍 죽어나갔던 엑스트라들이 대거 등장하며, 벌어진 사건도 다르기에 독자분들의 이해에 혼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지에 간략한 설명을 올려놓았으니 본편을 읽기 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험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한 위험한 요소를 철저히 조사하고, 세심하게 제거한 다음에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
나는 그걸 충실하게 해냈다고 자부한다. 덕분에 이 무저갱은 한산하고 쾌적했으니까.
하지만 역시나, 약간 간과한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무저갱은 밑바닥이 없는 심연. 밑바닥까지 떨어진 이들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곳. 아무리 정성 들여 위험을 제거했다고 한들, 자처해서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하루살이들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예언자가 아닌 것이다.
뭐,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하나.
“결국 에본이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하네요. 아지가 막고는 있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 거예요. 자, 어쩌죠?”
나는 좆됐다. 아주 많이.
“빌어먹을. 역시 믿는 게 아니었어. 군국의 장성이 우리를 살려 둘 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카니센 리버우드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한때 군국을 향한 적의를 불태웠으나 그 모든 감정을 무저갱 아래로 가라앉힌 그는 새로운 위협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이들의 정체는 탄탈로스를 파괴하려고 침입했던 레지스탕스. 그렇지만 탄탈로스는 그들이 갖고 온 폭약으로 터뜨리기에는 너무나도 규모가 컸다. 무저갱을 좀 큰 구덩이라고 이해하고 있던 레지스탕스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좌절했고,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 아래 살아가도록 설득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무저갱의 밑바닥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무저갱에는 레지스탕스만 떨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열심히 신호했잖아요. 저 사람 위험하다고. 어떻게든 날려버릴 준비를 하자고.”
델타가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시, 신호? 언제?”
“등 뒤로 수신호했잖아요.”
“아, 그때 뒤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한 게….”
칫. 너희 레지스탕스에서 수신호 교육받은 적 있잖아. 어쩐지 기억이 희미하더라니. 그나마 기억하는 게 델타 너였는데, 너조차 다 까먹었냐.
이래서 독심술사는 모자라는 애들 가운데 있으면 안 돼. 쿵짝이 안 맞아서 나까지 덩달아 멍청해지는 것 같다.
“윽, 어디서 본 것 같던 모양새였는데…. 수신호였구나. 나는 네가 보여주는 손기술인 줄 알고….”
“제가 아무리 손장난을 자주 친다지만, 그 상황에서까지 끼 부려서 얻는 게 뭐겠어요?”
“미안….”
델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할 때, 레지스탕스의 홍일점인 베타가 다정하게 그를 감쌌다.
무저갱에 정착한 뒤 연인이 된 델타와 베타는 사이가 점점 좋아지기만 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무슨 일이 생겨도 서로를 감싸고 들기만 했다.
지금처럼.
“괜찮아, 델타, 아니, 엘시. 우리도 몰랐는걸.”
자랑이다, 자랑이야.
쯧, 애초에 너한테는 기대도 안 했어. 무저갱에서, 심지어 옆에 시조 티르칸쟈카가 잠자고 있는데도 밥 먹을 때마다 천신에게 기도하는 빡통한테 뭘 바라니.
“그리고 우리는 에본의 등장에 한 눈 팔려있었잖아. 휴즈의 수신호가 하필 그때 이뤄져서 눈치채기 어려웠어.”
위로하는 척 묘하게 나한테도 책임을 전가하네. 자기 남자친구 체면은 자기가 살린다는 거냐?
“애초에, 나쁜 건 전부 에본이야. 지금은 누굴 탓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해!”
웃기시네. 지금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나쁘고 말고가 어딨어? 그리고 다른 방법을 생각할 거라면 네 남자친구 위로하기 전에 했어야지!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대책마련이 아니라 정치질에 불과하거든?
“그, 그래. 네 말이 맞아, 신디! 지금은 방법을 생각해야 해! 누구, 좋은 생각 없어?”
그 와중에 위로받는 너도 대단하다. 결국 결론이 되돌아왔잖아.
이딴 게 내 동료라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알파는 그냥 힘 세고 멍청한 일반인이고, 베타는 알파와는 정반대의 바보. 델타는 자존감 떨어지는 범생이라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나름 기사 지망생이었던 카니센이 머리도 좋고 능력도 뛰어나지만, 기사답게 머리가 좀 굳은 편이라 나와는 상성이 애매하다. 그나마 내가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건….
나는 레지스탕스 중 유일한 기술자인 감마에게 명령했다.
“감마. 폭약을 챙겨서 포인트에.”
공학 기술자인 감마는 내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포, 포인트? 거기는…!”
“어쩔 수 없어요. 거기가 아니라면 폭약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최소한 그것을 가지고 시위라도 해야 해요.”
“하지만, 포인트에서 폭발하면 이 탄탈로스가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어…!”
“책임은 내가 질게요.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