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14화 (314/384)

내가 다그치자, 화들짝 놀란 감마는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달려나갔다.

레지스탕스가 들고 온 폭약은 가당찮은 수준이다. 정중앙에 구멍을 뚫고 파묻어야 그나마 쓸 만한 정도. 공학적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도 이 탄탈로스를 파괴하기에는 상당히 모자라지만, 행운이 따른다면 어찌어찌 될지도 모른다.

카니센이 물었다.

“…휴즈. 탄탈로스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설사 된다고 해도, 무너뜨린다면 우리가 위험해지는데.”

“어쩔 수 없어요. 가진 패는 가장 위험한 자리에 놓아야 해요. 리스크가 두렵다고 못 쓰게 만들면 본말전도죠.”

“확실히 그렇지만….”

‘대단하군. 알더라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이 사람은 다 좋은데 생각의 유연함이 조금 떨어져. 이런 판단은 명목상 대장인 네가 해야 하잖아. 하아. 왜 내 곁에는 다 나사 빠진 인간밖에 없나.

그때, 잠자코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누군가가 급작스럽게 외쳤다.

“시조께서 눈을 뜨시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후우. 또 시작이네.

“닥치고 있어, 핀레이!”

알파가 핀레이의 팔다리에 박힌 말뚝을 끌어당겼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방울져 떨어지…려니까 핀레이가 기겁해서 자기 몸으로 되돌린다. 미처 되돌리지 못한 핏방울은 절로 굴러서 어디론가로 향한다.

핀레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조심히 당겨라! 지금 내 모든 피는 시조께서 지배하신다! 구멍이 벌어져서 피가 흘렀다간 시조께서 내 존재 자체를 거두어갈 것이다!”

나도 알아. 그래서 팔다리에 말뚝을 박아넣은 거니까.

핀레이는 사슬을 최대한 늘어지게 한 뒤 말했다.

“너희들의 힘으로는 무리다. 보지 않았나! 상대는 고양이의 왕! 개의 왕이 간신히 따돌리고 있지만, 개의 왕은 인간을 공격하지 못해! 얼마 가지 않아서 쓰러질 거다! 개의 왕이 없으면 너희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하등생물. 시조께서 눈뜨시지 않는다면 쓰레기처럼 죽어나가겠지!”

흠. 말뚝을 박은 채 그대로 빙빙 돌려버릴까.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때, 카니센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흡혈귀의 힘? 미덥지 않군. 자네는 우리조차 이기지 못하고 제압되었지 않은가.”

“그건 영면에 드신 시조께서 이 공간 안의 모든 피를 흡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혈마법진만 제대로 그릴 수만 있었어도 너희 정도는 한 끼 식삿거리였어!”

'그런가? 흡혈귀와는 싸운 적이 없어서.'

카니센은 확인하듯 나를 보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예일링 따위는 대처법만 알면 타는 음식물쓰레기처럼 쉽게 치울 수 있으니까요.”

“네 이노오오오옴! 커허허헉! 알았다!  말뚝 돌리지 마! 분명, 오롯하신 시조 티르칸쟈카나 위대하신 엘더, 고귀하신 아인에 비하면 예일링은 벌레처럼 나약하지!”

“잘 아시네요. 말 똑바로 안 하면 다음에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릴 거예요.”

“네 이… 알았다! 알았다니까!”

솔직히 말해서, 예일링은 카드가 없는 나조차 혼자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하다.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는 안 되겠지만, 불에 구워버리거나 전해질에 담가서 피에 대한 제어권을 흩어버리거나 하면 예일링은 버러지 그 이하다. 흡혈귀의 불사성은 장점이지만, 약점이 명확하다는 것만큼 큰 약점이 또 없다.

무엇보다, 지금 나는 불사자의 오른팔도 챙겨놓았으니까. 핀레이가 날뛴다고 해도 당장 죽여버릴 수 있다. 솔직히 그동안 핀레이 갈군 걸 생각하면 죽이는 게 더 후환이 없고.

“하지만 시조 티르칸쟈카. 가장 오래된 어둠이자 밤의 여왕. 모든 흡혈귀의 근원! 그분의 힘이 있다면! 저 건방진 인간은 물론이고, 짐승의 왕까지 제압할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죽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

시조를 깨우자는 핀레이의 제안이 꽤나 매력적이었으니까.

델타가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시조가 과연 우리를 도울까?”

“흥! 밤의 귀족을 능멸하고도 살기를 바라나아아아악! 끄아아악! 하, 하지 마! 내가 특별히 말씀드리겠다. 너희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반시계(좌)를 당하는 핀레이의 비명을 배경으로 카니센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한때 기사의 종자였고, 독실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천신의 신자인 그는 흡혈귀를 향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믿음이 목숨마저 배반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살아날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마,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시조를 깨우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죠? 남의 피나 탐하는 역겨운 흡혈귀 따위가 우리를 돕겠어요? 우리 피를 다 빨아먹으려고 할 거예요!”

…시조의 앞을 지나갈 때마다 십자가를 꼭 쥐고 다니는 어떤 머저리와는 다르게 말이지. 왜 저러는 거야.

“애초에, 우리가 죽더라도 시조는 깨워선 안 돼요! 이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라도 시조는 이 무저갱 아래 영원히 처박혀있어야…!”

“신디, 잠깐 진정해.”

베타는 델타가 조용히 시켰지만, 이미 초는 다 쳤다. 핀레이 눈에 불똥 튀는 거 봐.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베타 너는 분명히 죽었어.

“자자. 이제 고민해봐야 방법이 없어요. 간단히 정리할게요.”

…뭐, 어쩔 수 없다. 자기 목숨보다 신앙이 중요한 사람의 목숨까지 지켜줄 수는 없으니까.

나는 크게 손뼉을 치고는 상황을 정리했다.

“카니센은 알파와 함께 가서 아지를 도와주세요. 아지와 나비가 일대일로 싸우면 아지가 이깁니다. 둘은 에본과 그 따까리를 맡아주시면 돼요.”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내 기량은 에본에 미치지 못한다. 알파도 대령에겐 상대가 안 돼.”

카니센이 난색을 표하자 알파가 발끈해서 말했다.

“대장!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전투형 패킷, 군장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포함해서다. 기사추적자 에본, 그는 군인 시절에도 정기사 셋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죽인 강자. 나도 그동안 단련을 거듭했지만… 도저히 그에게는 미치지 못해.”

그래도 자기 주제를 아는 카니센이 제일 의지가 되네. 나는 카니센을 격려하며 조언했다.

“시간만 끌면 돼요. 뭣하면 폭약을 인질로 삼고, 최대한 버텨보세요. 아지 때문에 전체적인 전력은 이쪽이 위에요. 전황만 잘 읽으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거예요.”

라고는 말했지만, 내 생각은 정반대였다.

시간을 끄는 건 바뀌는 상황에 대한 빠른 적응이 필수다. 안타깝게도, 카니센에게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 시간도 얼마 못 끌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게, 건기공과 곤기공까지만 익힌 사람은 독, 기습, 혹은 전술로 쓰러뜨릴 수 있다. 만일 저 대령만 있다면 내가 어찌어찌 죽이는 게 가능하다.

그렇지만 감기공. 기공으로 자기 몸을 강화하는 경지에 이르면… 독도, 기습도, 전술도 무의미하다. 뼈와 살 자체가 단단해지는데 무엇으로 비집고 뚫어낼 것인가. 목을 졸라? 감기공을 조금만 익혀도 자기 목구멍은 스스로 벌릴 수 있다.

카니센은 감기공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반탄기공은 익혔지만 그건 감기공을 잡지 못한 이들이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 순수하게 육체능력으로 에본이 우위다.

도리어 그렇기에, 에본은 카니센이 맡을 수밖에 없다.

카니센을 쓸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까.

“알겠다. 맡겨라.”

카니센은 죽음을 각오하고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한때, 어쭙잖은 공명심으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속이면서, 죽어서도 남을 명예를 얻으려고 했다. 그것도 죄수가 사라진 탄탈로스를 테러한다는 무의미한 방식으로.

그냥 죽여버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스스로 깨달았다. 덕분에 그는 몇 안 남은 부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사소하지만 진짜 명예를 찾게 되었다.

…그래봤자 죽으면 끝이지만.

나는 군장을 챙기는 카니센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나머지는 이대로 시조에게 갑니다. 가서 시조를 깨웁니다. 지금까지 시조는 핀레이의 어떤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시도하지 않은 방법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델타가 멈칫했다.

“자, 잠깐. 신디, 아니, 베타도 간다고?”

“여기 혼자 두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아, 아니… 그래. 어차피 시조가 돕지 않으면 죽은 목숨일 테니까, 최대한 조심하면 되겠지.”

델타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꺼리는 티를 팍팍 내는 베타를 다독였다. 별달리 의심도 없이 내 지시를 따라 각자 가야 할 곳으로 출발했다. 내 의중을 짚지도 못하고.

그러나 단 한 명.

‘휴즈, 여기서 제일 짜증 나는 인간이지만…. 여기 있는 인간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 부정할 수가 없군.’

말뚝에 몸이 꿰인 핀레이만은… 내 의중을 간파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핏빛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 저 계집년을 제물로 써야겠지. 감히 시조의 앞에서 천신을 부르는 같잖은 년에게 심판을!’

전투는 카니센에게 익숙한 실내에서 벌어졌다. 그래도 카니센은 지형의 유리함을 이용할 줄 알았고, 비교적 전술적인 움직임도 취할 수는 있었다. 실내에서 복잡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나와 핀레이, 그리고 베타와 델타는 시조가 기거하는 지하무기고로 향했다.

지하 무기고의 음산하고 거대한 철문 앞. 원래는 군국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기가 꽉꽉 들어차 있어야 할 곳이지만, 탄탈로스는 다르다. 저 안에는 가장 두려운 무기보다도 더욱 두렵고 강대한 존재가 잠들어 있다.

시조 티르칸쟈카.

모든 흡혈귀의 시조. 그림자의 여왕.

무저갱이 조용하고 햇빛이 잘 안 든다는 이유로 반쯤 자처해서 들어온 괴짜이며, 괴물.

인간을 죽이는 고독도, 어둠도, 허기도. 인간이 무저갱을 두려워하는 온갖 이유도 그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그녀 역시 무저갱에 비견되는 두려움이기에.

역시 두려움은 서로 닮은꼴인 모양이다.

태초의 어둠을 눈앞에 둔 베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이 저주받은 흡혈… 웁.”

델타가 급하게 베타의 입을 막았다. 그래도 자기 여자친구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 인물상인지는 아는 모양이다. 델타는 베타의 손을 잡고 간절히 호소했다.

“신디. 제발 부탁이야. 말을 조심해줘. 시조의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면 안 돼.”

“으응, 알았어. 엘시의 부탁이라면.”

‘…그래. 나는 신앙을 배신한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사랑하는 엘시의 부탁을 따를 뿐이야.’

나는 베타의 생각을 읽으며 혀를 찼다.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 이유가 필요한 이들이 있다. 꼭 베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타협하고 살기 전 레지스탕스들도 베타와 비슷했다.

현실이 불만스러워서 행동할 뿐인데, 그게 대의를 위한 것마냥 포장했다. 그러다가 점차 매몰되어 명령 없이는 무엇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자기 의지도 아닌 채 카니센을 따라 무저갱 아래에 빠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굳이 붙이자면 보이지 않는 게 신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을 파헤치는 쪽이 된 거고.

지선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버티려고 했는데, 하필 믿을 게 레지스탕스 떨거지라는 게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피로 글자를 쓴다면 아마 반응할지도 몰라요. 이왕이면 시조와 비슷한 피가 좋을 텐데. 남자 피보다는 여자 피를 더 좋아할 거예요….”

“내, 내 피를 주겠다고?! 흡혈귀한테?!”

“…일단 내 피로 쓸 건데, 안 되면 베타의 피를 빌릴게요.”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흡혈귀에게 피를 제공하는 것이 종교적인 금기이기 때문일까. 구별할 필요도 없다. 그 두 가지 이유는 결국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를 주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결론으로.

손가락을 깨물었다. 살짝 찢긴 피부에서 핏물이 아롱져 떨어진다. 당연히 땅 위로 번져야 할 피가 구슬처럼 방울져 굴러가 문틈으로 스며든다. 몸 밖에 난 이상 네 것이 아니라는 듯이.

현실감 없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핀레이가 말을 걸었다.

“피를 잉크 삼아 글자를 쓴다고? 상당한 발상이군. 하지만 시조께서는 네 몸 밖의 피를 전부 거두어가신다. 도망치는 잉크로 어떻게 글을 쓰려는 거지?”

“원래 잉크는 무언가를 불에 그슬려 만드는 거죠.”

짧게 대꾸한 나는 핏물이 나오는 손가락으로 제식마법을 사용했다.

“세트, 리. 파렌하이트.”

화르륵. 내 마력량을 반영한 듯 연약한 불꽃이 피어오른다. 온도는 높지만 열량은 낮은 불꽃에 피가 조금씩 검게 그을린다.

“피를 묻히면서 불로 태우면 눌어붙겠죠. 이러면 글자는 형태를 보존할 수 있어요.”

“호오…. 과연.”

“제가 빈혈을 일으킬 때까지는 열심히 써볼게요. 와, 자기 손가락을 찢고 불에 그을려서 쓰는 혈서라니. 제국의 황제도 이정도로 정성들인 편지는 못 받아보지 않았을까요. 거창하네요.”

“인간들의 황제 따위보다 우리의 시조가 더 위대하니 거창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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