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탄이 다 떨어졌다. 총탄에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델타는 빈 총을 겨누며 관을 향해 접근했다.
“괴물! 너는, 너는 그냥 괴물이야!”
[자주 들은 말이라, 놀랄 정도로 감흥이 없구나.]
델타의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나조차도 명확하게 읽을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것을 뛰어넘는 분노, 사랑과 상실감, 그리고 복수심.
그나마 거르고 걸러 느껴지는 한 가지 바람은….
‘너도 아파야 해…!’
이 무저갱 밑바닥에서 간신히 피어난 한 줄기의 바람. 혹시나 해서 지켜보았는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죽일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아. 단지, 저 괴물에게 이 슬픔과 고통의 1할이라도 전하고 싶어! 총탄이 저 괴물의 몸을 아프게 할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델타, 그건 쉬워 보이니.
언어도 도구야. 자주 다뤄본 사람만이 제대로 쓸 수 있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너에게는 무리다.
“그래애애애! 너는 잘났어. 위대하신 시조겠지! 앞으로도 영원히 괴물로 남아, 세상이 끝날 때까지 괴물로 살아가라고!”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너는 평생 외로울 거라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괴물로 남아서, 감정도 무엇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갈 거라고.
조금만 더 다듬고, 상대를 더 이해한 뒤 내뱉었다면. 어쩌면 시조의 작은 소망에 상처를 냈겠지만. 델타는 거기까지는 닿지 못했다.
[네 울부짖음 역시 마찬가지로다. 연인이 그리 소중하다면 같은 곳으로 향하거라.]
어둠이 델타를 뒤덮는다. 델타의 발이 땅에서 떠오른다. 그 순간 델타는 죽음을 직감했다.
사실, 델타는 이미 자살한 상태다. 낭떠러지 끝에서 발은 뗐고, 밑바닥과 언제 충돌하냐만 남은 상황이었다.
자살치고는 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끝은 찾아왔다. 시조가 말했다.
[너희들이 꼭 천국으로 가길 바라마. 그곳에는 내가 없을 터이니, 서로 좋은 일이겠지.]
시조의 축복 아닌 축복을 들으며 델타는 발버둥 쳤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기 전에 어떻게든 이루고 싶어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내가 겪은 고통을….’
점차 흐려가는 의식 속에서, 델타는 시조의 고통을 강하게 바랐다. 핏물이 그의 몸을 삼키고, 뼈와 살을 씹어먹는 동안에도.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가운데 그것만을 바랐다.
인생 대부분 엘시 클락이었고, 무저갱에서는 델타였던 한 인간은 질척한 잔향만을 남긴 채 그렇게 죽었다.
거창한 뜻을 품고 탄탈로스에 떨어졌고, 밑바닥에서 대의를 포기하고 나서야 사소한 행복을 찾았음에도, 결국 이루지 못하고 내 안에 잠들었다.
가당찮은 죽음이다. 짐승에 불과했던 인간들이 분명 자기도 죽을 걸 알면서. 사랑이니 대의니 보이지 않는 것에 휘둘려 자기 목숨까지 내버린다. 누군가는 낭만적이라고 부르며 치켜세우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어리석게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어리석은 이들의 왕이다.
보이지도 않는 것에 휘둘려 자기 목숨을 내버리곤 하는… 망가진 짐승의 왕이 ‘나’.
아. 평범해져야 하는데.
[시간은 충분히 주었다. 본보기 역시 보여주었지. 고민은 끝났느냐?]
오만한 시조가 고했다.
아아. 너무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탓에, 자기 자신을 현상으로 규정하고자 한 가련한 존재야.
분명 네 바람은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터인데. 왜 신이 되려고 하느냐. 그토록 만인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것이냐.
너는 신이 아니다. 기껏해야 흡혈귀의 왕에 지나지 않으며… 그마저도, 그들을 대변하지조차 못하는 반쪽짜리.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방금 둘이 죽은 이상 좀 더 받아야겠는데요. 저도 살려주시고, 남은 동료도 구해주세요.”
[욕심쟁이로구나. 억지를 들어주는 것에도 정도가 있노라.]
”대신, 당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해드릴게요.”
무언가에 찔린 듯 시조가 움찔거리는 사이, 몸을 비틀어 가만히 고개를 숙인 핀레이에게로 향했다. 시조가 한 명령은 아직도 유효해서 델타가 죽을 때도 그는 입을 닥치고 있었다.
‘하하하! 꼴 좋다. 그래, 이거지! 이제 옳게 된 먹이사슬이지! 크하하하하!’
어디까지나 입만 닥치고 있고, 생각은 여전히 요란했다.
챙겨온 건 핀레이를 관통했던 말뚝과 불사자의 팔. 말뚝을 들어 다가가니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인간 따위가 시조를 해할 수 있을 리 없지! 큭큭큭. 그래! 이게 맞아… 어라? 저 녀석, 뭘 하는 거지…? 시조께서 계신 한 나는 말뚝 따위로는 죽지 않는데?’
“세트, 리, 볼트.”
말뚝을 핀레이의 심장에 닿게 박아넣고, 그 끝에 전격 마법을 흘려넣었다. 전류가 말뚝을 타고 핀레이의 심장에 흐른다. 핀레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으어억. 뭐지? 이 위험하지는 않지만 기분 나쁜 공격은…?’
인간조차 죽이기 힘든 약한 전격이다. 흡혈귀에게 통할 리 없다. 핀레이는 멀쩡했다. 느닷없는 공격당한 핀레이가 발끈해서 시조에게 나를 죽일 허락을 구하려고 할 때였다.
시조에게 말했다.
“혹시 느끼셨나요? 핀레이의 심장이 반응하는 걸.”
당연히 읽었다. 핀레이는 지금 시조의 권역에 있고, 피의 움직임이 전부 시조의 감각에 노출되어 있으니. 시조는 피의 움직임을 손금을 들여다보듯 읽었겠지.
시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에서 긍정을 읽어낸 뒤,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했다.
“듣자 하니, 흡혈귀는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혈조술로 피를 몸 곳곳으로 옮긴다고. 그건 분명 대단하지만, 그래도 심장이 있는 편이 더 편하잖아요? 하나하나 움직이는 건 귀찮으니까요. 어때요? 제 전격이라면 심장을 뛰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뭐지? 갑자기. 이 건방진 인간이 시조께 무슨 소리를…! 뭘 꾸미고 있는 거냐, 휴즈!’
반응이 왔다. 관 뚜껑이 열리고, 색을 잃은 듯한 덧없는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몇백 년 만에 본신을 드러낸 시조는 심장에 관한 새로운 지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정말이더냐? 정녕 그것이 심장을 움직일 수 있느냐?”
“물론, 제 전격이 시조께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시조께서는 워낙 강대하신 존재니까… 단, 인간의 심장은 이런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게 알려졌어요. 같은 원리라면 반응이 있지 않을까요?”
‘뭐지? 이딴 인간 따위가 시조께 위해를 가할 수 있을 리 없어…! 그런데 왜, 몸이 떨릴 정도로 불길하지? 뭔가 위험해…!’
아무리 시조라도 남에게 심장을 드러내는 건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그건 심장이 부서질까 걱정해서가 아니라, 속살을 보이는 정도의 부끄러움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욕망에 패배한다. 시조도 마찬가지.
욕망이 수치심을 짓눌렀다. 거짓이라도 한번 속아보자는 마음으로, 시조는 옷과 함께 자기 가슴께를 갈랐다. 아름다운 피륙이 갈라지고 징그러운 몸 안쪽이 드러났다.
시조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해보거라.”
“성공한다면 싸움을 멈춰 주시는 겁니다. 겸사겸사 저도 보호해주시고.”
“실패할 때를 걱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는 의미 없는 걱정은 하지 않는 주의거든요.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시조와 대화하는 와중에도 핀레이의 필사적인 마음 속 외침이 들려왔다.
‘시조시여! 아니됩니다. 제발, 아니됩니다! 지금 저 녀석은 위험합니다. 방법은 몰라도, 의중을 알 수 없어도…! 분명, 무언가를 저지를 겁니다…! 시조시여!’
그러나 시조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핀레이는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다. 시조가 허락하지 않았기에.
핀레이에게만 보이도록 싱긋 미소를 지어주며 시조에게로 향했다. 전류가 파직거리는 손안에 치명적인 무언가를 감춘 채로.
오늘은 모두가 바람을 이루는 날이다.
시조는 꿈에도 그리던 감정을 되찾을 것이며, 핀레이의 바람대로 오랜 은거를 끝내고 세상에 나갈 것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생물. 이치에 맞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평범한 짐승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왕이니.
에본과 싸운 카니센은 가슴이 꿰뚫린 채로 죽었다. 알파는 팔이 잘린 채 실혈사했다. 둘은 나름 아군이랍시고 불사자를 깨워왔지만, 대지의 기운이 없는 이 땅의 불사자는 동력 없는 고물이다. 에본의 클로에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대령은 나비와 함께 아지를 압박했다. 인간을 공격하지 못하는 아지는 앞발도 뒷발도 쓰지 못하고 얻어맞다가, 결국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에본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카니센과 알파는 누가 봐도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인원은 분명 시간이 필요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에본은 어렵지 않게 예상했다.
“설마 시조를 깨울 생각인가….”
카니센과 알파의 시체서 흘러나온 피는 바닥을 기어 어디론가로 향했다. 에본은 핏자국을 따라 지하 무기고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에본의 부관이자 심복인 그룬트 맥킨시 대령이 그 중얼거림을 듣고 대답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시조는 인간끼리의 분쟁에는 끼어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원칙이 절대적이라 끼어들지 않는 게 아니다.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 원칙을 만들어낸 것이다. 신조차 모욕하는 시조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나? 시조 자신이 어지간한 일로 원칙을 깨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시조를 깨우겠다는 미친 생각을 한 이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군.”
“군국이 무저갱에 매장할 때도 반응하지 않았던 시조입니다. 그들이 시조를 어떻게 깨울 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답하듯, 강철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사자의 살점이라면 어떨까요?”
에본이 소리 난 쪽을 돌아보았다. 피로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강철 문이 보였다. 시뻘건 기운이 문틈을 메우듯 스며들어 있었으나, 갑자기 기운이 흩어지더니 벌컥 열렸다.
그 안에서 새까만 무언가를 든 사내가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에본은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란카르트 대령의 탈옥 사건 이후 급히 집어넣은 죄수다. 지선의 계획을 위해선 누군가 탄탈로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하기에, 마침 최근에 잡혀 재판을 기다리던 죄수 중 죄질이 가벼운 이를 냅다 집어넣었다. 란카르트 대령이 위험한 죄수를 전부 데리고 나간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분명 죄질이 가벼운 잡범이라고 들었는데.
그런데 무엇일까.
‘뭐지? 이 위화감은?’
에본은 그를 관찰하다가 그가 손에 쥔 물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불사자의 팔…?’
얼굴에 피를 묻힌 사내는 에본을 향해 제 것이 아닌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에본은 그 광경이 왠지 소름이 끼쳤다.
“안녕하세요, 에본 크림슨와일드. 배부른 고양이여. 반가워요.”
[히히히힝!]
그때였다. 열린 문 너머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거대한 핏빛 말이 통로를 비집으며 뛰쳐나왔다. 에본은 몸을 긴장시켰다.
‘혈마 랄리온…! 시조의 권속! 정말 시조를 깨웠단 말인가! 그런데…?’
핏빛 말이 흰자위를 보이며… 에본은 관심도 두지 않고 사내를 노려본다. 말은 비교적 온화한 생물이지만 그 얼굴에서는 엄청난 분노와 살의가 느껴졌다. 분명, 랄리온이 건드리기만 해도 저 청년은 짓이겨질 것이다.
폭주하는 랄리온이 사내를 들이받기 직전.
그때 사내가 왼손을 뻗었다. 보자기가 그의 옆으로 넓게 펼쳐졌다. 천이 눈앞에서 펄럭거리자 랄리온의 시선이 잠깐 그곳으로 향한다.
동시에 사내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불사자의 팔로 땅을 문질렀다. 새까만 살점이 부스러져 땅에 흩어지고, 그 위로 떨어진 랄리온의 발굽이 녹아 미끄러진다.
마치 투우사와 같은 정교한 움직임. 랄리온은 청년을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것도 하필 나비가 있는 곳으로.
나비가 폴짝 뛰며 하악질을 했다.
“냐하아아아악! 이상한 말이다냐! 피 냄새! 기분 나쁘다냐!”
[푸히히힝!]
냅다 싸우기 시작한 두 짐승을 배경으로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당혹스런 광경이야 어쨌든 에본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혈마 랄리온은 시조의 권속. 그에 공격당한 것을 보면 시조를 아군으로 삼은 것 같지는 않다. 설득에 실패한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두려울 게 없지.’
“마지막 도박이 실패한 듯하군. 명복을 빌어주겠….”
“당신도 보이지 않는 것을 쫓고 있군요? 하하하. 멋져요. 얼마나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사람 목숨까지 갈아가며 자기 존재의의 같은 걸 찾고 있을까요?”
에본의 침착함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에본이 얼굴을 굳히고 되물었다.
“…무슨 말이지?”
“처음에는 아니었겠죠. 당신에게는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과 적을 향한 적의뿐이었어요. 그 두 가지로 맹렬하게 왕국을 무찌른 당신은 장성이 되어 등 따습고 배부른 고양이가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