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제 할 말만 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가 에본의 삶에 맞닿아 있어서 에본은 그냥 흘려넘길 수가 없었다.
“싸울 대상이 없어지니, 이제 싸울 대상을 찾아요. 자신의 과거와 싸우려고 해요! 먹지도 못할 쓸데없는 일에 매달려서 부하를 죽이고 자신도 죽여가고 있죠! 정말 고상한 취미네요!”
“네놈…!”
“당신은 분명 인간이에요, 에본 크림슨와일드! 인간이라 인정받고 싶다는 같잖은 소망에 목숨을 거는 생물체는 인간밖에 없으니까!”
사내가 광소했다. 그와 동시에 공기가 색을 바꾼다.
어둠이 불길하게 요동친다.
피가 불안하게 들끓는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아니, 이미 일어났다. 에본에게 남은 짐승의 감이 그리 외쳤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하하하하하하하하! 곧 알게 될 거야!”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파, 아파!]
그의 말대로, 어둡고 깊은 곳에서부터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에 흐느끼는 목소리의 주인은… 시조 티르칸쟈카였다.
에본의 몸이 굳었다. 불사의 육신을 가진 시조다. 심장에 말뚝을 박아도 개의치 않을 터.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어떤 수로 시조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다.
“시조께서 너무 주무신 나머지 면역력이 떨어지셨나 봐! 심장 알레르기에 정신을 못 차리시네! 발작과 히스테리를 조심하세요, 모두들!”
[네놈, 감히…! 감히……!]
“하하하하하하! 살아있다는 기분은 어때요, 티르칸쟈카? 최고죠? 짜릿하죠? 제 선물이에요! 살아있음을 실감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선물!”
쾅. 혈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팔이 강철 문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지옥의 구덩이에서 악마가 팔만 빼낸 듯한 모습이었다.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시뻘건 팔이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땅을 더듬거렸다.
[용서, 용서하지 않겠다아아!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삶이 고통이라면, 고통 또한 삶이니! 고맙다는 말은 됐어요. 바람을 이루어 주는 건 제 역할이거든요!”
목소리를 감지한 악마의 팔이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에본의 털이 일제히 쭈뼛 섰다. 에본이 본능적으로 땅을 박차고 몸을 피한 직후, 거대한 주먹이 땅을 내리찍었다.
유성이 떨어진 듯한 충격에 콘크리트가 방사형으로 깨진다. 허공에 핏물이 쏟아진다. 에본은 간신히 피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대령은 주먹에 으깨져 한 줌의 핏물이 되었다.
비록 기공의 경지가 낮다지만, 그래도 대령까지 도달한 장교가 저항도 못하고 피떡이 되었다. 에본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죽음의 공포 앞에서 에본은 사내를 노려보았다.
‘시조의 폭주는 저 남자 때문! 살기 위해서라면 저 남자를 바쳐야 해!’
목표를 정한 에본이 맹렬히 달려들었다. 짐승처럼 네 발로 달려온 에본이 사내를 제압하려고 팔을 뻗었다.
하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사내의 몸놀림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기민했고, 무엇보다 악마의 팔을 제 것마냥 활용했다. 사내를 낚아채려다가 악마의 팔에 튕겨나간 에본이 다급히 외쳤다.
“다 같이 죽을 셈이냐!”
“저는 안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 있는 모두가 자살희망자더라고요! 뭐, 어쩌겠어요!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 힘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쓴다면, 저도 한 손 보탤게요!”
“네놈…! 윽!”
악마의 팔이 땅을 쓸었다. 이 광범위한 공격에는 에본도 피할 도리가 없어서, 공처럼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사내는 무사했다. 시조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성대 삼아 울렸다.
[천국도 너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내 너를 거꾸로 매단 채, 영겁토록 고통을 선사해줄 테니까아아아!]
“와후! 집착이 무섭네요. 하지만 어쩌지, 저는 잡힐 생각이 없는데! 좋아요! 제가 미션을 하나 드리죠! 시조 티르칸쟈카, 무저갱 밖으로 나가면 절 찾아보세요! 이왕이면 목적을 갖고 사는 게 재밌잖아요? 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럴 일 없다. 너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안타깝지만, 저는 마술사.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하늘로 솟고 땅으로 꺼지는 재주가 있죠. 짜잔!”
사내가 외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직후, 무언가 커다란 폭발음이 들린다. 탄탈로스 정중앙에 위치한 관리실 쪽이다. 붉은 화염과 매캐한 연기가 치솟으며 충격이 땅을 흔들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균열이 퍼졌다.
사실 탄탈로스는 폭약으로 부술 수 있다, 기술자인 감마는 며칠 지나지 않아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탄탈로스의 밑바닥 아래는 텅 비었다. 얹어놓은 뚜껑과도 같다. 이곳저곳에 균열을 만든 뒤, 그 틈에 폭약을 넣고 터뜨려버리면. 25년간 죄수들의 난동을 겪으며 연약해진 탄탈로스는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무저갱 아래로 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새삼 목숨이 아까워진 감마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혼자 끙끙 앓고 있다가, 나중에 휴즈의 중재로 모두의 앞에서 고백했다. 모두에게 용서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누군가 폭약에 독자적으로 점화장치를 달았을 줄은.
감마가 그걸 알았을 때는, 폭약이 그의 눈앞에서 폭발한 순간이었다.
피의 짐승이 포효한다. 인간의 시체가 선혈의 파도에 삼켜지고, 소화되지 못한 육신은 저주받는다. 그와 동시에, 폭음과 충격이 땅을 울린다. 흔들리는 땅, 무너지는 벽. 세상이 기우뚱거린다. 중력이 어긋난다.
콘크리트 대지. 두 다리를 딛고 선 인공적인 땅에 종말이 찾아왔다.
탄탈로스가 무저갱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비명, 포효, 붕괴, 낙하.
“...미안, 아지야. 이번에도 약속은 못 지키겠네.”
그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사과.
거기서 있었던 일을 몸에 잔뜩 새긴 채, 탄탈로스는 죽은 이들을 위한 거대한 비석이 되어 떨어졌다.
구루룽.
땅이 갈라지고, 새까만 무저갱은 모든 것을 삼켰다.
그렇게.
모든 것은.
무저갱 속으로.
그리고 아무도 알 수 없는 과거 속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장성급 의전을 제공하겠다고 했어도, 진짜 장성이 주위를 돌아다니는 이너서클 사령부에서 편히 쉴 수는 없다. 편히 쉬랬다고 진짜 장성이랑 맞먹으면서 쉬면 총을 맞을지도 모른다. 심각한 상황에서는 알아서 사려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그 상황이 우리에 의해서 초래되었다면 더더욱.
그래서 우리는 몰래 이너서클 사령부에서 빠져나와 사령부 인근 호텔로 향했다. 군인이 아니면서 사령부에 방문할 일 있는 외부인을 위한 특수 숙박시설이었다.
해당 숙박시설의 최상급자인 행정보급관 엘파사 상사는 히스토리아를 향해 엄청난 경례를 올려붙였다!
“여여여, 영광입니다! 히스토리아 소장님 등 5인. 확인했습니다! 전원에게 장성급 의전을 제공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상태입니다! 그에 따라, 군국 행정보급관 엘파사 상사가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 정말 육장성이야! 정말 히스토리아 소장님이야! 이 호텔은 외부인이 묵지 않는 곳이라 얼굴 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꿈은 언젠가 이루어지는 법이야!’
엘파사 상사의 모습은 흡사 신을 영접한 신도와 비슷했다. 티르가 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인간은 여장군이 남자 때문에 군국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접하지 못한 듯하구나.”
“아아, 뭐. 군국이 이런 말단에게도 사정을 설명해주지는 않으니까요.”
“통신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군국의 통신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이런 레벨 2 이하 시설에 통신용 골렘은 비상용으로밖에 없고, 대부분의 명령은 통신기로 전달되니까요.”
“통신기?”
“네. 저기 보이시죠?”
내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마법진이 복잡하게 그려진 거대한 골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하사관 한 명이 책상과 의자를 갖다 두고 앉아있었는데, 히스토리아를 보고 감격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기, 저 거대한 동상이 통신기예요. 통신용 골렘의 일부 기능만 극도로 강화한 시설물이죠. 통신병의 명령을 전달하고, 그것을 증폭하여 다른 통신기에 전달하는 일종의 중계기. 저기에는 통신병이 접속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전해져요.”
마침 골렘의 입이 움직였다. 히스토리아를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던 하사관은 급히 펜을 들고 전해진 명령을 그대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티르가 그 모습을 보고는 무언가 떠올리고 신음을 흘렸다.
“으음.”
“왜요?”
“아니, 심기가 불편해서 그러니 신경 쓰지 말거라.”
“자기가 신경 쓰게 해놓고 신경 쓰지 말래. 간 보지 말고 그냥 말해요. 어지간한 건 대답해줄 수 있어요.”
어차피 마음 읽었는데 괜히 대답 안 해주기도 뭣하니까. 티르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신전의 백벽이 떠오르는구나.”
“라키온 대백벽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황청의 총본산에는 마치 성벽에 비견될 만한 크고 거대한 벽이 있다.
라키온 대백벽.
신의 뜻을 전한다고 알려진, 방금 내린 눈처럼 새하얗고 고결한 벽.
티르는 듣기만 해도 거부감이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가능하다면 내 앞에서는 그 앞에 나쁜 말을 섞어주겠느냐?”
“아, 죄송해요.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병자가 될 것 같은 눈 아프게 새하얀 벽 말씀하시는 거죠?”
라키온 대백벽이 흠결 없이 관리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종이는 하얘야 한다. 그래야 검은 글자가 잘 보일 테니까.
만일 누군가 대백벽에 먹으로 글자를 쓴다면, 그 글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전의 백벽에 동시에 쓰인다.
형태도, 재질도 상관없다. 그곳이 신전이며 벽 한쪽이 하얗기만 하면, 대백벽이 쓰인 글자가 그대로 떠오른다. 아무리 멀리 있든, 얼마나 외진 곳에 있든 관계없이 동등하게.
먼 옛날, 처음의 성녀가 하늘에 글자를 썼다는 설화에 기반한 신성력이자, 수많은 난리통을 겪으면서도 군주들이 신전을 부수는 데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이다. 흡혈귀로부터 보호해주지는 못했지만.
“좋구나. 어쨌든, 그거 말이다. 필사가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꼴이 꼭 백벽과 꼭 닮았구나.”
“뭐, 그러겠죠.”
군국은 세상 모든 것을 보았던 성녀가, 세상 모든 ‘좋은 것’을 갖다 붙인 나라니까.
티르는 내 말을 조금 다르게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비슷한 쓰임새의 물건이 있다면 비슷하게 쓰이겠지.”
그동안 히스토리아는 수속 절차를 끝냈다. 열쇠와 의복 패킷 몇 개를 건네준 엘파사 상사는 반쯤 울먹이며 경례했다.
“알…겠습니다. 별관을 통째로 내어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하겠으니 편히 쉬십시오. 식사가 필요하시면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수고해.”
“아닙니다! 소장님과 같은 영웅을 보좌하게 된 것이 영광입니다!”
조금 피곤한 듯한 히스토리아는 짐을 들고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는 본관을 나서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은 당장 몸을 뉘어도 될 정도로 깔끔하게 준비를 끝마친 채였다. 군국이라면 군국답다.
“흠. 숨겨둔 골렘은 없는 것 같네. 좋아. 여긴 안전해.”
와중에 녹안으로 건물을 한 번 훑어본 회귀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그러면 앞으로의 일정을….”
“일정은 무슨.”
인생 참 바쁘게 사네. 무슨 일정은 일정이야. 나는 가장 안쪽 방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뒤, 몸을 반쯤 집어넣고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열심히 일한 우리, 일단 쉽시다. 여러분.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잔다고? 지금은 낮인데?”
“낮? 밤? 그런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말아요. 잠은 졸릴 때 자는 겁니다. 세상에 당신을 맞추지 말고, 당신의 몸에 세상을 맞춰요. 너 자신의 왕이 되라고요!”
“이게 뭔….”
“음, 음. 실로 옳은 말이로다. 그러하구나. 태양 따위에 육신을 지배당해서야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