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히?”
마침 잘 됐다. 티르와 같은 공간에 있다면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는 받을 수 없다. 치유사가 환자로 변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벽을 짚고는 애써 밖으로 나섰다.
“잠깐 씻고 치료 좀 받고 올게요. 겸사겸사 긴히 할 말도 좀 들어보고요. 따라오지 않으셔도 돼요.”
“으음. 알았다. 다녀오거라.”
‘왼쪽이 진짜였을 줄이야…. 어디, 다음에는 반드시 맞춰 보이마.’
봐봐. 나만 퀴즈로 생각한 거 아니잖아.
근육통이 가시지 않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로 문밖을 나섰다. 그러자 히스토리아와 ‘히스토리아’가 내 양옆으로 나란히 따라왔다. 아무리 생각으로 인간을 구분한다고 인지한다고 한들, 눈앞에 히스토리아 두 명이 나란히 서 있으니 좌우가 헷갈리는 기분이다. 나한테 독심술이 없었다면 진짜 헷갈렸겠지.
그나저나, 나. 왜 아무런 보상도, 이유도 없이 시험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지? 그냥 넘어가긴 억울했던 나머지 히스토리아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리아 너는 왜 힐데의 굿모닝 퀴즈에 동참한 거야?”
히스토리아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동참한 적 없어.”
“저쪽이 뻔히 네 얼굴로 다가와서는 누구게 이러는데, 당연히 진짜 너를 맞춰보라고 퀴즈 내려는 거잖아.”
“공안부장이 마음대로 했을 뿐이야. 따로 말리지 않았고.”
“그건 힐데가 혼자 왔을 때나 할 말이지. 너도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더만. 그 정도면 협력한 거 아니야?”
여전히,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힐데가 왠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건 바로! 자고로 여자란, 자기만이 갖는 사소하지만 특별한 특징을 찾아주길 바라는 생물이거든요! 소장도 여자라는 말씀!”
“…공안부장.”
“봐요! 말투도 조곤조곤해졌잖아요! 아버님은 이런 히스토리아 본 적 있으세요?”
저 사람은 또 왜 이리 신이 났어. 어지간하면 쿵짝을 맞춰주겠지만, 근육통으로 아파서 저 텐션을 못 따라가겠다.
내가 끙끙거리자 슬슬 ‘히스토리아’는 무례하게도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그러면 아버님, 무엇부터 하실 건가요? 마사지? 샤워? 아니면, 동시에?”
동시에는 뭐야. 진짜 딸이라도 그런 짓은 안 해. 그러자 히스토리아가 반응했다.
“동시에는 뭡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히스토리아! 이 몸 그대로 해줄게요!”
“더 안 됩니다! 제 몸으로 그딴 짓 하지 마십시오!”
“으음. 어쩔 수 없나요? 알았어요. 히스토리아의 뜻에 따라, 건전하게 남자 모습으로 변장해서 할게요.”
“그런 뜻을 전한 적 없습니다! 애초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히스토리아가 중요한 점을 지적했네.
“리아 말이 맞아요. 가장 중요한 건 제 의사죠.”
“네 의사고 뭐고 안 돼!”
뭐? 안 된다고?
이봐, 히스토리아. 나는 지상의 지배종인 인간의 왕. 짐승에게 해선 안 되는 일 따위는 없어. 너는 지금 인간을 멋대로 규정하고….
‘혹시나 하겠다는 소리나 해 봐…! 두들겨 패서라도!’
그렇지만 능력이 딸려서 할 수 없는 일은 있지. 지금 하나 추가된 것 같네.
“끄으응. 알겠어요. 일단 리아의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그러면 마사지는요?”
“사실 마사지는 그다지 중요한 용건이 아니잖아요? 둘이서 이야기를 끝내고 나란히 왔다면, 필시 리아의 일로 찾아온 거겠죠. 군국의 인질… 아니, 군국을 인질로 삼겠다는 이야기. 맞죠?”
“정말, 아버님 앞에서는 뭘 숨기는 게 불가능하네요. 맞아요.”
그야 독심술로 읽고 있으니까. 힐데는 슬슬 변신을 풀어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네요~. 아버님의 몸을 만지작거릴 영광은 히스토리아에게 맡길게요!”
“그딴 짓 안 합니다.”
“마구마구 만져야 하는데 곁에 누가 있다면 부담스럽겠죠? 그러니 ‘저’는 빠져드릴게요!”
힐데는 손을 머리 위로 휘적휘적 흔들면서 물러났다. 발걸음이 상당히 가볍다.
내 편이라지만, 아무리 봐도 힐데는 군국에 큰 애착이 있는 걸로 보인다. 말로는 태연하게 달라붙어도 군국에 해가 될 일은 교묘하게 피해간다.
단, 유엘과는 태도가 정반대다. 유엘은 적극적으로 나나 티르를 배격하려고 했지만, 힐데는 유연하게 타협하려는 편. 유엘이 매라면 힐데는 비둘기… 아니, 뻐꾸기? 조금 전까지도 적이었던 이들 한가운데 파고들어 자기 자리를 만들어낸다.
뭐, 알면서도 속아주자. 좋게 좋게 끝내는 게 나도 좋으니까.
“들어와.”
히스토리아의 방은 별관에서도 특히 크고 호화로웠다. 호화롭다고 해도 군국식 호화로움이라, 약간 푹신한 소파와 조금 더 넓은 침대, 살짝 더 포근한 이불이 전부였지만. 이딴 게 귀빈실?
내 기준으로 양모 쿠션보다 딱딱한 소파는 소파가 아니다. 저딴 소파에 아픈 몸을 맡기기는 싫었기에, 나는 발을 질질 끌며 침대 위에 철퍽 엎드렸다.
히스토리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많이 아파?”
“너만큼 아프지는 않겠지만, 너만큼 아픈 걸 잘 참지도 못해서.”
“엎드려 봐. 타혈해줄게.”
타혈이라면 기력으로 몸을 때려서 치료해주는 기술? 그거 삐끗했다간 기력이 몸 내부로 침투해서 몸 아작나는 거 알지? 불안한데.
“네가 타혈법도 배웠던가?”
“공안부장이 한 걸 봤어.”
아니, 한 번 보고 익힐 수 있다면 공부는 왜 하고 기술은 왜 배워? 네가 아무리 천재라도 타혈법 나름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으어어어어. 시원하다.”
이게 되네.
히스토리아의 손이 섬세하게 내 근육을 오간다. 약한 기력을 퍼뜨려서 반향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움직여 뭉친 부분에 집중한다. 마치 몸 안을 직접 쓰다듬는 감각이다.
신성력이 없는 건 아쉽지만, 그게 있었다면 이토록 시원한 기분은 느끼지 못했겠지. 쾌감은 부족한 게 충족될 때 생겨나는 법. ‘되돌리는’ 형식의 신성력은 쾌감이 부족하지.
“휴이. 6번.”
“어어.”
6번은 무릎 차기 자세…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엎드린 채로 한쪽 무릎을 올리자 이제껏 닿지 않던 부분이 자극된다. 나는 늘어지게 신음을 흘렸다.
간간이 동작을 지시하는 것 말고는 말없이 마사지가 계속되었다. 몸이 어느 정도는 풀렸다고 느껴질 때, 히스토리아가 내 등을 꾹꾹 누르며 입을 뗐다.
“…나는.”
본론이네. 흘러나오는 신음을 멈추고 히스토리아의 말에 집중했다.
“네가 언제든지 돌아와도 괜찮도록, 군국에 네 자리를 만들려고 했어.”
감기공에 통달한 자는 자기 몸을 완전히 의지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애초에 의지란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건데 ‘완전히’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히스토리아의 손도, 목소리도.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너뿐만 아니야. 하멜른에서 살아남았던, 시아티를 비롯한 몇 아이들도. 졸업시험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하멜른 사건 때문에 우려 섞인 시선을 받았던 사관학교 진학생들도. 모두 그 사건 때문에 크고 작게 고통받았어. 나는… 그들에게 있을 곳을 주고 싶었어. 그래서…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육장성이 되었어.”
히스토리아가 육장성이 된 덕분에, 하멜른의 사관학교 진학생들을 차별할 수가 없었다.
히스토리아가 온갖 임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에, 시아티를 비롯한 레지스탕스는 목숨을 건졌다.
히스토리아가 부관의 자리를 공석으로 둔 덕분에, 누군가, 히스토리아의 눈에 든 운 좋은 단 한 명은 최소한의 시험만 거치면 남부럽지 않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는 계속 공석이었다.
“…인간의 왕이라며. 바람을 들어준다며. 그런데….”
원망을 담아서 툭, 내 등을 때렸다. 몸보다는 마음에 닿는 타격이었다.
히스토리아는 홀로 싸우며 자리를 만들었다. 군국을 한 번 배신한 뒤로 다 쓸모가 없어졌지만, 그게 히스토리아의 노력을 부정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그렇지만.
네 바람은 자리를 채우는 게 아니라, 자리를 만드는 것 그 자체였잖아.
“리아. 너는 대등한 친구를 원했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힘이나 권위를 넘어, 동등하게 무언가를 주고 받는 존재.
그게 히스토리아의 바람이었다.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을 잘라 덜어내야 해.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었어. 그럴 힘도, 능력도 있었어. 단지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을 뿐이지. 아이들의 목소리가 군국에 닿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내 위에 상대의 마음을 얹을 뿐, 진정으로 나누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바람을 들어주기만 하지, 그 바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히스토리아가 나에게 느끼는 정은 독심술로 비롯된 편법. 히스토리아가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려면, 일단 그녀 자신부터 마음을 열어야 했다.
“하멜른을 겪고도 군국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어. 하지만 그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한 외침이 너를 바꾸었고, 그 덕분에 지금 군국이 바뀌었지. 그 아이들의 바람은 이루어진 거야…. 네가 그 마음을 나누어 받아서.”
“힘들었어.”
“그렇지만 했잖아. 독불장군이었던 하멜른 때와는 달라. 누군가에게 기대받고, 존경받고, 그에 부응할 수 있어.”
그래서 히스토리아는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빈 곳을 만들어야 채워넣을 수 있으니까.
히스토리아는 많은 것을 잃고 나서 그걸 깨달았다.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잠시 뒤 사라졌다. 히스토리아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안부장이 그러길, 군국에는 비밀을 아는 육장성 한 명은 있어야 한대.”
“없다면 비밀을 지켜줄 사람이 없어지니까.”
“휴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네가 바라는 대로 하면 돼.”
“그렇지만. 너는? 아무리 자리를 만들어도, 거기에 아무도 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내가 여기 남아서 군국을 지키고 있어도, 너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아, 그거 말인데.”
주위를 살피고, 독심술로 이쪽을 엿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소리 죽여 말했다.
“나, 인간의 왕이다?”
“…아직도 안 믿기고, 믿더라도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데 인간의 왕이 왜 군국에서 나타났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자칭 인간의 왕 님?”
“당연히 나도 모르니까 묻는 거지.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인간이라, 내가 태어나는 곳을 정할 수는 없거든? 철들 무렵에는 군국의 뒷골목에서 구르고 있었어.”
짐승의 왕은 대체적으로 보편성을 따른다. 그것도 절대적이진 않지만, 보편적으로는 옳다. 내가 군국에 있다는 건 군국이 인류의 보편성을 어느 정도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는 거다.
“짐승의 왕이라고 특별하진 않아. 특히 힘을 빼앗긴 인간의 왕이라면 더 그렇지. 여기 태어난 이상 나는 군국에서 살아가야 해. 그래서 초등시민학교와 중등군사학교를 다닌 거고. 사고만 없었다면 고등사관학교까지 나와서 차근차근 정석적으로 군국의 비밀을 알아갔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고등사관학교까지 가진 못했으니. 고등사관학교 진학은 평범하지 않은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 결과론적이지만, 인간의 바람은 그런 보편성을 따른다.
그래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했는데.
“와중에 셰이 씨와 만나면서 어떤 사실을 알아버렸거든.”
“죄악의… 왕?”
“응. 그걸 확인해야 해. 그게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잘 몰라. 나만 멀쩡하면 되는 걸 수도 있고, 그래도 안 되는 것일 수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