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를 상대로 결투를 신청하고, 그것을 실제로 성공으로 이끈 절창 파트락시온.
기수는 그의 일화를 떠올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자식.”
“결투다. 무기를 들어라. 승리야말로 곧 정의이니, 승자는 이 땅을 얻겠지. 그건 천신… 아니, 이번엔 지모신이 보우하시리라.”
그렇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상대가 전쟁을 불사한다고 물러나 보았자 더 큰 상실만 있으리라.
모두가 전쟁을 기피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 까닭이 이것이다. 기수가 외쳤다.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하하하하하! 바라던 바다!”
군국과 열국 사이의 전쟁은 한 명의 외침을 시작으로 발발했다.
“그리하여. 절창이 이끄는 선봉대는 간악한 침략자를 격파하고, 군국의 깃발을 높이 세웠답니다.”
독창을 끝낸 힐데는 허리 숙여 인사하며 가만히 우리 반응을 기다렸다. 나와 티르는 작게 손뼉을 쳤고, 아지는 내 모습을 빤히 보다가 따라하듯 앞발로 바닥을 텅텅 두드렸다. 가만히 있는 사람은 회귀자뿐이었다.
양눈박이 마을에서는 외눈박이가 이상해 보이기 마련이다. 잠시 시선이 회귀자에게로 모였다. 침묵으로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은 회귀자는 손뼉을 치는 대신 혀를 찼다.
“벌써 처들어갔다니.”
“쳐들어갔다니! 지금까지 이야기를 뭘로 들은 건가요? 저들이 먼저! 탄탈로스를 갉아먹고 있더라니까요! 군국은 어디까지나 방어 태세를!”
“상관없이 본토로 진격할 생각이었잖아. 내 말이 틀려?”
회귀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힐데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힐데는 들켰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흐으음. 정말 묘~하다는 말이죠. 평소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처럼 모자라 보이는데, 어쩔 때 식견은 백 년 묵은 노인처럼 노회하다니까요?”
“시끄러. 너희가 진정 지킬 생각이었다면 군단보다는 공병단을 보냈겠지. 누굴 바보로 알아.”
‘이전 회차에서도 그랬는데 뭐. 그때는 열국이 이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웠지. 하필 불사자의 시체골렘 때문에 군국도 열국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으니까….’
회귀자도 은근히 나와 비슷하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서 얻어낸 답을 마치 내가 추리한 것처럼 떠벌이지만, 회귀자는 회귀 전에 겪은 경험을 자기가 한 예측처럼 말한다. 둘 다 수단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셈이다.
저거 회귀 없었으면 텅 빈 밑바닥이 다 보였을 텐데. 쩝, 어쩔 수 없지. 독심술이 능력인 것처럼 회귀도 능력이야. 꼬우면 내가 회귀했어야지.
'가끔 보여주는 단순한 모습은 과감한 결단이었을까요? 아버님의 장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달리 해야겠어요.'
힐데는 그 사실도 모르고 회귀자에 대한 평가를 조정했다.
“후후. 그러니까 아셨죠? 군국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지. 여러분이 강요한 휴전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상당히 많이 포기했다고요?”
“어렵긴? 그냥 거기 있는 것뿐인데.”
“적의 심장부까지 진군할 무력을 모은 채 가만히 있는 거.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데…. 뭐, 모르시고 하는 말씀은 아니겠죠.”
“….”
‘가만히 있는 것뿐이잖아. 그게 어렵나?’
모르시고 하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티를 전혀 내고 있지 않지만.
너무 부끄럽지 않도록 슬쩍 알려줘야겠다.
“보급망 때문이죠?”
“네에. 군국의 병력 공백은 곧 행정 공백이에요. 군인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직업은 아니잖아요? 군국 전역에서 짐 나르고 공사도 해야 하는데. 그들을 급히 모아 허허벌판에 놓아두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지금이야 쌓아둔 물자도 있어서 괜찮지만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무언가 세는 시늉을 하던 힐데는 포옥 한숨을 내쉬며 말을 흐렸다.
“냉정하게 따졌을 때 일주일. 그 이후로는 군단의 와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진군해야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더 힘을 내주세요? 일주일 전에는 황금궁에 도달해 휴전서약서를 내밀어야 해요?”
“일주일?”
“왜요, 부족한가요?”
“아니, 충분해.”
‘휴전이야 뭐. 군국만 설득하면 쉽겠지. 열국은 비교적 약하니까.’
회귀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힐데는 회귀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거 하나만 더 말씀드릴게요. 일주일이면 저희는 물론, 열국도 준비를 끝마치기 충분한 시간이에요.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적의 예봉을 꺾고 정보를 차단한 뒤 저거너트를 각개격파하며 진군했겠지만, 일주일 뒤에는 그러지 못해요.”
“뭐, 우리 때문에 전쟁이 어려워졌으니 도와달라고?”
“전쟁을 멈출 거라면 확실히 하라는 말이에요. 한 달 뒤에 일어나는 전쟁은, 어제 일어났어야 할 전쟁보다 몇십 배는 더 끔찍할 테니까.”
힐데는 한없이 가벼운 얼굴로 진지한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나름대로 가꾼 스킬이겠지만 소름 끼치니까 자중해주었으면 한다.
할 말이 없어진 회귀자는 시선을 홱 돌리며 대답했다.
“…칫. 누가 보면 평화를 사랑하는 줄 알겠어. 그래서, 황금궁의 위치는 알아?”
힐데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몰라요! 움직이는 궁궐이 지금 어디쯤 있을지 과연 누가 알까요?”
“하긴, 그건 그렇지. 가면서 찾아보자고. 아무리 못 찾겠어도 클라우디아 들리면 정보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잠깐만. 지도가 있었는데….”
회귀자는 몸을 돌리고는 그녀의 포켓을 뒤적거렸다. 그 사이, 내 눈치를 보던 힐데는 슬금슬금 다가왔다. 혹여나 티르나 회귀자에게 들리지 않게, 몸을 딱 붙이고 기공까지 써가며 귓속말했다.
“아버님,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숨기려는 게 아니고, ‘저’는 물론 그녀도 정말 몰라요. 그야….”
“볼 수 없기 때문이죠?”
“…네에. 그것까지 아시네요.”
힐데가 엷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리안은 세상 만물을 볼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볼’ 수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 빛이 닿지 않으면 커다란 난항을 겪는다. 성황청의 가장 큰 적이라고 불리는 티르가 괜히 어둠을 두르고 다니는 게 아니다.
유엘이 우리를 쫓아내려고 했던 이유 중에는 그것도 포함되어 있다. 티르의 어둠은 유엘의 천리안을 가리니까. 유엘은 천리안을 갖고도 우리의 양동작전을 파악하지 못하고 속았었지.
‘…거기다 황금궁의 구조는 유엘도 알지 못하니까요. 아버님이라도 과연 아실지.’
그래도 세상에 누군가 아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겠지? 그 사람 생각을 읽으면 되니까 괜찮아. 일단 접근만 하자고.
“좋아. 결정했어.”
궁상스럽게 혼자 무언가를 살피던 회귀자가 손뼉을 치며 우리를 불러 모았다. 회귀자는 작은 지도를 하나 꺼내 우리 앞에 늘어놓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고,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텅 빈 지도. 무슨 지도가 이따위냐 싶지만 그것이 열국이다. 수많은 측량사들을 절망에 빠뜨린 저주받은 땅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편이 낫다. 도시고 지형이고 매순간 변하기 때문이다.
그 지도의 오른쪽 끝에는 산맥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열국의 땅을 지도에 새기려던 측량사들은 그 산을 발견하고는 반가워했음이 틀림없다. 오늘이 어제 같지 않은 나라에서 그나마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지형지물이었으니까.
거기다… 변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측량사 뿐만은 아니다.
회귀자는 그 산맥의 한 점을 짚었다.
클라우디아.
열국을 그린 지도에 홀로 외로이 놓인 도시 이름. 열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곳.
“일단 열국 유일의 정주 도시인 클라우디아로 향할 거야. 가는 도중에 승냥이나 저거너트를 털면서 황금궁의 위치를 찾으면 바로 거기로 향하고, 없다면 클라우디아에 들려서 황금궁의 위치를 알아내는 거야.”
“클라우디아? 동쪽 구름산맥 기슭에 있는 도시잖아요?”
“그래. 황금궁이야 제멋대로 움직인다지만, 거점이 되는 클라우디아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가기만 하면 돼. 황금궁에서 온 사람을 만나기 쉬운 곳이기도 하고.”
좋은 의미로 회귀자답지 않은 착실한 정공법이다. 그렇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클라우디아는 산맥을 따라 계속 올라가야 하잖아요. 캐터프랙트를 타고 일주일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이걸로는 무리야. 방어력은 좋지만 그리 빠르지는 않으니까.”
“그러면요? 설마 날아가시게요?”
“아니, 천앵으로는 그렇게 먼 거리를 날아갈 수는 없어. 천앵에 담은 공간이 부족해. 그러니까 대안이 필요하지.”
작전이랑 계획도 짜고, 그 대안까지 제시하다니. 회귀자, 너는 다 생각이 있구나. 나 처음으로 네가 좀 믿음직스러워 보이기 시작했어.
회귀자는 천앵과 지잔을 들어 올리고는, 한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캐터프랙트를 둘러보았다.
“개조하자.”
왜 칼을 들고 그런 말을…. 뭔가 불안한데. 너 개조가 뭔지 아니? 설마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은 아니겠지…?
내 기분 탓이겠지만, 캐터프랙트가 부르르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회귀자가 말한 개조는 내 예상대로 상당히 우악스럽고 폭력적인 방식이었다.
먼저 우레바퀴가 있는 엔진부는 손상이 가지 않도록 분리한다. 그리고 지잔과 천앵으로 보다 윗부분을 단칼에 잘라낸다. 캐터프랙트는 3레벨 연금강으로 뒤덮고 취약부에는 4레벨을 덧붙인 걸작이지만 회귀자의 잔인한 손속에는 버티지 못했다.
[아, 아아아. 캐터프랙트가….]
골렘은 캐터프랙트가 처참하게 분해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캐터프랙트의 중량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두꺼운 장갑이다. 그것을 통째로 잘라서 덜어내자 캐터프랙트는 더없이 가벼워졌다.
회귀자는 뿌듯한 얼굴로 짐수레가 된 캐터프랙트를 보았다.
“자! 이제 훨씬 빠르게 갈 수 있겠지!”
그러면 그렇지. 말렸어야 했는데.
나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셰이 씨. 가볍게 만든다고 더 빨라지지는 않아요.”
“어? 왜?”
‘마차는 짐을 덜어내면 빨라지던데?’
왠지 좀 믿음직스럽게 보이더니 바로 허당질이다. 말의 엉덩이 살을 덜어낸다고 더 빨라지냐? 속도는 얼마 바뀌지 않아. 구조와 설계의 문제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망연자실 앉아있는 골렘에게 말을 걸었다.
“…하아. 잠깐만요. 디지. 이거 어떻게 해요?”
[흐윽…. 차라리 본 기체를 파괴해주십시오….]
“혼자만 편해지는 건 용서하지 못해요. 두 눈 크게 뜨고 이 지옥을 헤쳐 나가요. 그게 당신의 의무입니다, 통신병.”
[…통신병 디지 대위… 알겠습니다. 이 슬픔을 딛고 서겠습니다.]
골렘조차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 회귀자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눈만 끔뻑거렸다.
“어떻게 고쳐야 좀 쓸 만해질까요?”
[무게를 줄인 만큼 속도를 올리기 위해선… 기어의 크기를 조정하고 우레바퀴를 재가공해야 합니다….]
“될까요?”
[연금술로 우레바퀴를 가공할 수준이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
쳇. 아슬아슬하네.
우레바퀴까지는 가공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골렘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능력은 나 자신에게 있다기보다는 타인의 생각을 읽어서 얻는 부분이 좀 많다.
그런 내가 골렘의 설명만 듣고 규격에 맞게 재가공해? 이 부족한 마력을 갖고? 어찌어찌 우레바퀴를 가공한다고 쳐도, 거기에 담을 번개는? 마력이 한참 부족할 텐데.
“어? 안 돼?”
회귀자가 태연히 되묻자, 힐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섰다.
“휴우. 어쩔 수 없네요~. 하긴 마신을 휘두르는 사람이 기계장치에 대해 뭘 알까요.”
“뭐, 뭐! 가벼워진다고 나쁠 건 없잖아!”
“됐네요~. 비켜봐요.”
힐데는 우레바퀴를 움켜쥐고는, 힘으로 단숨에 당겨 뽑았다. 캐터프랙트의 심장부에 단단하게 박혀 있던 우레바퀴가 힘없이 뽑혀 나왔다.
이치에 닿은 기공사다운 힘이다. 완력으로 강철을 우그러뜨린 힐데는 자기 손톱에 기공을 불어넣고는, 우레바퀴의 표면을 긁었다. 단단한 우레바퀴에 깊게 흠집이 났다.
‘나는 연금술사. 마력으로 물질을 변화시키는 강철의 이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