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키고 보자.’
회귀자가 나를 툭 밀었다. 생각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반응하지 못한 나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어라?”
기공까지 담아 민 탓에 내 몸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뒷걸음질 치다가 썰매 위에 발이 올라가 버리고, 그대로 미끄러져 캐터프랙트의 뒤쪽 경사면을 따라 주르륵 내려갔다. 눈치채고 보니 어느덧 나는 땅 위를 긁고 있었다.
어어, 잠깐만. 이걸 그냥 민다고?
“자.”
회귀자가 아지의 입에서 손잡이를 빼앗아 내게 던졌다. 물에 빠지려는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법이다. 내 코앞까지 다가온 손잡이를 냉큼 잡았다.
“꽉 잡아. 넘어지기 싫으면.”
눈앞에서 밧줄이 팽팽해진다. 반사적으로 온힘을 다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직후 손아귀와 팔, 다리와 허리에 팽 당겨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회귀자의 그림대로 썰매를 타고 있었다. 흔들리는 몸을 다잡으며 나는 다급히 외쳤다.
“끄아아아아! 뭐, 뭐 하는 짓이에요!”
미친! 이걸 그대로 밀어버려? 그것도 별다른 고민도 없이?
내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봐 왔지만, 이 회귀자처럼 발작적인 녀석은 처음 봤다! 심지어 생각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거라서 대처하지도 못했어!
내가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회귀자는 묵묵히 밧줄을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음. 잘하네. 최대한 버텨 봐. 넘어지면 아플 테니까 최대한 넘어지지 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아아아아! 당연히 아프겠지!”
‘뭐, 넘어질 것 같으면 잡아줄게. 하지만 그걸 알려주면 긴장감이 떨어지니까, 일단은 죽을힘을 다해서 잡고 있으라구.’
생각 다 읽히거든!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다. 누군가 나를 잡아줄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라도, 설사 그게 진심이더라도 그걸 믿고 뒤로 넘어지기는 어려운 법이다.
아무리 진심이라고 해도, 저 미덥잖은 회귀자가 혹시나 못 잡아주면 어떻게 해! 죽는다고!
칫, 어쩔 수 없다! 모양이 빠지지만!
“티르! 나 좀 잡아 올려주세요!”
내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티르는 별달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모습을 약간 반기는 듯하다.
“정진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이게 보기 좋다고요? 매번 죽을 위기인데요!”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은 너를 강하게 할 것이다. 더욱 강해진다면 더 큰 위협을 헤쳐 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도 지금 죽으면 끝인데요?!”
내가 뭐 판돈이야?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베팅하면 금액이 커져? 그러다가 실패해서 와장창 다 날려버리면 어쩌려고!
“괜찮다. 위험해지지 않도록 계속 지켜봐 주마. 그리고….”
‘여기서 넘어져도 죽지는 않겠지. 혹여나 내 힘이 필요할 정도로 다친다면 내 피를 아낌없이 베풀어주마. 어쩌면… 인간의 왕이 흡혈귀의 왕이 될 수도.’
내가 떨어지나 봐라.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만다.
사실 회귀자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나는 독심술사. 내 손패를 강하게 만들기보다는 상대방의 손패를 읽고 그걸로 굴리는 타입이다.
이길 수 없다면 맞상대하지 않거나 포섭한다. 억지로 작전을 걸면 역으로 이용한다. 압승은 없이 아슬아슬 줄을 타는 게 내 승리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쓸 수 있는 카드를 늘리는 방식으로 내 힘을 불려왔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손패의 가짓수는 의미가 없다. 보자기가 바위를 이긴다고 한들, 손바닥만 한 보자기로 쏟아지는 산사태를 다 감쌀 수 없는 노릇이니까.
수련한다고 강해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좋은 패를 손에 넣는다면 감수해주지!
“어디 좋을 대로 해보시죠! 이깟 수련 따위로 얼마나 강해지는지 똑똑히 두고 보겠어요!”
“수련하는 건 넌데 왜 네가 이를 가는 거야….”
회귀자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정신을 집중한다.
건乾, 곤坤, 감坎, 리離. 인간이 기력을 뻗어 낼 수 있는 네 가지 방향.
건은 하늘. 달리 말해 만물. 나를 중심으로 두고 세상 만물에 영향을 끼친다. 건기공으로 기력을 내뻗어 손잡이를 붙잡는다. 손잡이와 손이 꼭 하나가 된 것처럼 이어졌다.
곤은 땅. 세상을 중심에 두고 거기에 나를 바로 세운다. 웅대한 세상에 비해 내가 얼마나 작은지 제대로 깨닫고 땅에 단단히 발을 디디는 것이 곤기공의 정수. 발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기감으로 느낀다.
감은 육신. 이제부터는 세상도 무엇도 상관없다. 육체란 한 장의 얇은 피부로 격리된 작은 소우주. 근육, 뼈, 살점에 기력을 불어넣어 인간의 육신을 초월한다….
“으억. 벌써 기력이.”
…다만 여기부터는 내가 좀 약하다. 감기공은 육체 전반에 영향을 끼치다 보니 소모되는 기력량이 몇 배로 커지기 때문이다. 무기야 부러져도 괜찮지만, 육체는 그래선 곤란하다고.
최대한 자세를 고정한 뒤 허리와 팔을 잇는 부분에 최소한의 기력을 모아서 버텼다. 쥐꼬리만 한 기력이라도 쓰니까 좀 낫다. 이대로만 버티면.
“멍! 뭉! 멍!”
와중 내가 위험하다고 느낀 탓일까. 아지는 내 쪽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 맹렬하게 짖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움찔거리기까지 한다.
그래, 인간의 가장 소중한 친구야. 짖을 뿐이라지만 고맙다. 역시 개는 위로가 돼.
“아지야. 너밖에 없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무우우우웅! 못 참아!”
그렇게 한 마디를 내뱉으며 아지는 냅다 뛰어내렸다.
아지의 신형이 내 뒤로 스쳐나간다. 나를 뛰어넘어 저 멀리 착지한 아지는 급한 발소리를 내며 내 뒤를 쫓아왔다.
어라, 설마. 아지에게서 느껴지는 이 두근거림은 신남이었던 건가.
“멍멍! 꼬리잡기!”
“사냥 본능이었냐야아아아!”
“앙! 멍, 잡았다! 놓아줄게!”
“놓을 거면 잡지도 마! 흔들리잖아!”
시야 끄트머리에서 아지가 살짝 나타날 때마다 썰매가 미친 듯이 흔들린다. 다행히도 아예 덮쳐서 넘어뜨릴 생각은 없나 보지만, 자꾸 툭툭 건드려서 균형이 무너진다.
큰일이다. 썰매를 건드는 게 인간이었다면 미리 읽고 대비하겠지만 하필 아지라서 순수하게 내 기량으로 승부해야 해! 그건 자신 없다고!
“진짜 위험해요! 힐데! 비상! 비사아아앙! 도와줘요!”
내가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자, 힐데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도움을 드릴까요?”
“네! 빨리!”
힐데가 벌떡 일어섰다. 진지한 얼굴로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뒤, 팔다리를 번갈아 쭉쭉 내뻗으며 소리쳤다.
“파이팅, 파이팅! 아버님,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응원만 하지 말고! 현실적인 도움을 주란 말이에요!”
“훈수를 좀 드리자면 무릎을 조금 더 굽히세요! 아버님은 왠지 하체가 부실해 보여서!”
“훈수가 어떻게 현실적인 도움인데!”
그리고 하체부실은 어쩔 수 없다고! 인간의 왕은 다리에 그다지 강점이 없단 말이야!
제기랄. 저기서 내가 고생하는 꼴을 즐겁게 쳐다보고 있다니. 내가 험한 꼴은 많이 당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인간의 왕인데.
나는 악을 가득 담아 외쳤다.
“다들 두고 봐! 내가 강해지면 먼저 거기 있는 모두에게 한 방씩 먹일 테니까!”
“그래, 제발 그래봐.”
특히 너! 회귀자, 각오하고 있으라고!
***
“멍. 다 썼어.”
탈진해서 쓰러질 뻔한 나를 아지가 구해줬다.
아니, 구해줬다고 해야 하나. 내가 더 버티지 못할 거 같으니까 뒷덜미를 물고 단숨에 뛰어올랐을 뿐이니까 말이지.
팔이 뻐근하다. 허리가 아릿하다.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리고 종아리는 잔뜩 부어올랐다.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고 제뜻대로 기운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재밌었어! 멍! 나중에 또 놀자!”
“개 아니랄까 봐 입만 열면….”
같은 짐승의 왕인데, 누구는 썰매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기력을 쓰는가 하면 누구는 비슷한 속도로 달리면서도 여력이 있네. 확실히 이건 불공평해.
악만 남은 채 캐터프랙트 바닥에 엎어져 있더니 회귀자가 말을 걸었다.
“벌써 기력이 고갈되었어? 믿을 수가 없네! 곤기공까지 익힌 것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잖아!”
“…난들 이렇게 태어나고 싶었겠습니까. 나도 태어나기 전에 들어갈 몸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셰이 씨 육체를 선택했을 거라고요.”
“나는 뭐 힘을 거저 얻은 줄 알아?”
네 힘은 모르겠지만 회귀는 거저 얻은 거 맞잖아. 회귀 덕분에 기공이랑 마력이랑 유물을 얻은 거라면 거저 얻은 거지 뭐.
회귀자는 턱을 긁적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밸런스는 생각보다 좋아 보여. 기력의 방출이나 운용에는 문제가 없어. 단지….”
“단지 뭐요.”
“…처참할 정도로 기력이 부족해.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일반인보다 조금 많은 정도인데.”
고맙다. 나도 아는 사실에 확인 도장까지 찍어줘서.
“하지만 괜찮아! 오히려 더 단순해졌어. 기력이 부족하면 기력을 늘리면 되잖아!”
“말이 쉽지. 어떻게 늘려요?”
“간단한 방법이 있지. 비싸긴 하지만.”
회귀자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손가락 끝의 궤적을 따라 그대로 허공에 동그란 구멍이 나타났다. 회귀자는 거기에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뒤적거렸다.
힐데가 그것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와아. 셰이. 그건 설마?”
“내 주머니야.”
“르네의 주머니잖아요? 그런 것도 갖고 있었어요?”
“하나 정도.”
“세계에 네 개밖에 없는 건데요! 그걸 하나 정도라니? 어딘가 왕의 아들이라도 돼요?”
“그랬으면 좋겠네.”
‘이거… 음 연금화네. 이건 비상용. 이것도 아니고. 아. 찾았다.’
곤란한 질문을 대강 흘려넘긴 회귀자는 몇 번 손을 휘젓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까만 자물쇠로 잠긴 작은 목함이었다. 회귀자는 가볍게 목함을 열고는 내 앞에 내밀었다.
“자. 이거. 영약이야.”
약초지에 싸인 하얀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비릿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한 향기가 가득 풍겼다. 나는 고개만 살짝 들어서 그걸 보았다.
“영약이네요?”
“그래. 얼마나 흡수하느냐는 네 기량에 달려있지만,”
영약이라. 애매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