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주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지. 진짜 영약을 먹는 건 처음이잖아. 혹시 아나. 이걸 먹고 나도 힘을 되찾을지.
심지어 이 영약은….
“와, 상아환! 이거 코끼리의 정수로만 만들 수 있다는 귀한 영약이잖아요!”
코를 킁킁거리던 힐데가 영약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감탄했다. 정말 감탄한 것도 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서 대화를 끌어내려 한 거다.
평범한 사교술이지만, 상대는 평범에서 가장 먼 회귀자였다. 회귀자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맞아.”
“어떻게 얻으셨어요? 코끼리는 동족의 사체도 각별하게 여겨서 갓 죽은 것도 줍기 힘들다는데!”
“어디서 주웠어.”
“와아. 알려주기 싫다는 의지가 팍팍 풍겨 나오는 정말 성의 없는 대답이네요! 마신도 주웠대, 영약도 주웠대. 도대체 여러분들은 이딴 사람의 무엇을 믿고 함께하는 건가요?”
티르가 힐데의 투덜거림을 받았다.
“정이라고 대답해주고, 정 부족하다면 미운 정이라고 덧붙여주마. 얼마 되지는 않지만 인상적으로 어울렸으니 말이다.”
‘미, 미운 정…?’
충격받는 부분이 이상해, 너. 당연히 미운 정이지. 고운 정이겠어?
“그나저나 셰이. 내 듣기로 영약은 최대한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취해야 한다더구나.”
“맞아.”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토록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위는 ‘안정된 상태’라 여겨지지 않는구나. 영약을 취하기 전 휴를 먼저 흔들리지 않는 곳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지.”
“예를 들어, 나의 관처럼 편안하고 잔잔한 장소라면 충분히….”
‘나의 관은 내 몸이나 마찬가지. 미세한 진동조차 아예 없게끔 할 수 있으니. 후후, 한 번 휴만을 관 속에 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찾아왔구나.’
“아, 그건 안 돼. 기력을 소화하려면 맨땅에서 하는 게 좋아.”
“…어째서냐?”
“움직이는 상태면 기력이 잘 정착하지 않거든. 특히 그 기력으로 곤기공을 쓰는 데 약간의 문제가 생겨. 이왕이면 멈춘 다음에 천천히 흡수하는 게 나아.”
“나의 관이라도?”
“관이어도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잖아?”
조금 실망한 티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면, 우리는 멈추지 않으니 영약을 휴가 먹을 일이 없겠구나.”
“아니. 슬슬 날도 지고 있고. 이제 열국의 세력범위니까 잠깐 쉬었다가 가자. 골렘도 이제 통신거리에 한계가 왔잖아?”
골렘은 대답 없이 운전대만 붙잡고 있었다. 잡음조차도 생기지 않는 걸 보면 한계는 진작 찾아왔던 것 같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느냐. 쉴 이유가 있느냐?”
“으응. 열국은 어지간하면 낮에 다니는 게 좋아. 한 번 보면 아마 바로 알 테지만….”
그것도 그렇다.
열국은 모든 것이 변하는 땅. 지형마저도 예외가 아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 변함없는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다. 모든 게 변하기에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땅이 이곳이다.
“저기. 마침 누가 캠프를 만든 것 같으니까. 한 번 들려보자고.”
회귀자는 저 멀리 반짝이는 모닥불과 그곳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 그림자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보통 낯선 땅에서는 이방인을 만나면 경계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떠도는 열국에선 모든 것이 낯설며,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모두가 이방인이다. 낯섦도 자주 마주하면 익숙해진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저들은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진 않았다.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도록 자기네 탈것에 올라탄 채 지켜보았을 뿐이다.
“거기. 뭐 좀 물어볼….”
그렇지만 캐터프랙트가 불빛 아래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 저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도망쳤다.
열 대 남짓한 탈것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미끼로 삼는 그 움직임은 자못 일사불란하기까지 하다. 쥐 떼처럼 도망치는 이들을 보며 회귀자가 혀를 찼다.
“칫. 길이나 좀 물으려고 했는데. 캐터프랙트를 타고 있어서 경계심을 샀나?”
“캐터프랙트는 상관없죠. 열국에서 희한하게 생긴 탈것이 흔한데요.”
달리 말해 저거너트 급 아니면 그 무엇도 특별하지 않다는 거다. 빨리 영약이나 먹고 쉬고 싶었던 나는 근육통으로 끙끙거리면서 지시했다.
“셰이 씨. 됐고 잡동사니를 좀 꺼내주세요. 가장 덜 귀한 걸로, 종류는 상관없이 부피만 크면 돼요. 티르, 어둠으로 그걸 덮어서 양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해주세요. 아지야, 너는… 그래. 그냥 맨 위로 올라가서 앉아있어라.”
“어? 왜?”
“저들이 도망친 건 우리 수레가 빈 것처럼 보여서니까요. 지금이라도 우리가 최대한 부유한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해요.”
“그러면 우리를 털려고 않을까?”
“최소한 우리가 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배부른 짐승은 관대해지는 법이니까요.”
회귀자는 내 말에 따라 포켓에서 연금강을 꺼내 이리저리 쌓았다. 티르도 어둠으로 그 위를 뒤덮었다. 아지도 펄쩍 뛰어 그 위에 앉았다.
산처럼 쌓인 잡동사니 꼭대기에 아지가 모닥불의 빛을 받으며 앉아있으니, 우리 캐터프랙트가 꼭 보물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회귀자는 그 모습을 마음에 안 들어 했다.
“마치 한 건 제대로 하고 돌아온 승냥이 같네.”
“그렇게 보이는 게 목적이에요. 열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배고픈 이웃이고, 가장 좋아하는 건 배부른 이웃이니까요. 더 먹지도 못할 만큼 배부른 이웃일수록 더더욱.”
“배고픈 이웃이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두려워할 만하지만, 배부른 이웃은 왜?”
“배가 꽉 찼으니까, 다른 이들의 배를 가를 생각은 못 할 테니까요. 내가 가르면 갈랐지.”
내 말대로였다. 도망쳤던 승냥이들은 먼발치에서 우리를 맴돌다가, 캐터프랙트가 어둠에 뒤덮였을 뿐 무언가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자 슬금슬금 되돌아왔다.
“진짜 돌아오네?”
“짐칸에 뭐 더 담을 장소도 없어 보이잖아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저들 걸 욕심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죠. 저들은 가진 게 없고, 우리는 담을 공간이 없으니까.”
내 말대로였다. 확연히 가까이 다가온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거기, 군국에서 한탕하고 오는 길입니까?”
이럴 때는 회귀자보단 내가 맡는 게 낫겠지. 회귀자 대신 나서서 손을 흔들었다.
“맞아요. 그쪽은 이제 가시는 길인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약탈 보장이 그제인가 내려왔는데!”
“약탈 보장?”
내 물음에 사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고 물었다.
“약탈 보장권을 모르나?”
‘내가 약탈한 물건을 일괄적으로 전량 구매하겠다고 약속하는 권리. 황금궁이 보장하는 약탈이다. 빼앗길 걱정 없이 한몫 잡을 기회이고, 같이 가는 사람도 많아서 안전해지지. 그런데 그게 없는데도 국경을 넘어서 한탕하고 온다고?’
자기가 약탈한 물건을 빼앗길까 봐 걱정해서 그걸 보장하는 권리라. 뭔 신기한 권리도 있네. 거기다 그게 실제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도 놀랍다.
어쨌건 읽었으니까 대답해주지.
“모를 리가요. 약탈한 물건을 보장해주는 보험이잖아요?”
“아는데 왜….”
“그런데 그게 왜 필요하죠?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평소에 그런 거 신경 써가면서 약탈했나요?”
내가 눈짓을 주자, 힐데가 내 의중을 파악하고는 위협적으로 미소 지으며 살기를 내뿜었다. 건기공의 기초, 공간을 타고 퍼져나간 기력이 날카롭게 피부를 찌른다. 힐데의 기세에 움츠러든 사내는 벌벌 떨면서 생각했다.
‘엄청난 기세…! 그냥 승냥이가 아니야! 포식자다! 훔치려는 생각은 관두는 게 좋겠어!’
내심 우리를 등쳐먹을까 고민하던 사내는 마음을 고쳐 먹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용감하신 분이군요! 대단하십니다!”
“알면 됐어요. 피차 귀찮은 일 생기지 않게끔 알려준 거니까.”
‘혹여나 물건을 훔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거겠지. 뭐, 우리도 군국까지 나가려는 이상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굳이 벌집을 건드릴 이유는 없지….’
사내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짓했고, 그에 따라 도망쳤던 승냥이들이 캠프로 기웃기웃 모여들었다. 수많은 탈것이 모닥불 주위로 다시 동그랗게 모였다.
열국의 나무는 열량이 높은 편이라, 작은 모닥불로도 모두를 충분히 데울 수 있다. 이렇게 동그랗게 모여서 바람을 막고는 각자의 탈것을 기둥 삼아 천막을 치는 게 열국 떠돌이들의 야영법이었다.
아직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무리해서 나아갈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이 변하는 열국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두 눈 뿐이며, 조금만 어두워져도 사고가 생길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기공을 익혀서 몸이 멀쩡하더라도 탈것이 망가진다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
태양이 자기 퇴근할 테니 제 아래 모두 잠들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따라주어야지.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영약이나 먹고 쉬자.
“됐어요. 일 보세요.”
몸을 돌려 들어 가려는데, 우물쭈물거리던 사내가 용기를 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 외람되지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정말 군국에는 강철이 땅바닥에 굴러다닙니까? 마력으로 제련한 강철이?”
기껏 용기 내어 물어본 질문이 그거냐. 나는 사내의 눈을 보면서 생각을 읽었다.
‘소문을 듣고 군국으로 가고는 있지만, 거기에 털 게 없다면 곤란해. 도망칠 수야 있겠다만 그토록 멀리 갔으면서 빈손으로 돌아오면 죽는 거나 다름없어!’
약탈하러 가면서 이토록 결의에 찬 각오를 듣기는 또 처음이다.
자, 어디 보자. 열국의 인간이다. 좋아하는 건 변환하기 쉬운 강철. 혹은 연금이 쉬운 물질이다. 연금화도 좋아는 할 거다. 단 군국만큼의 가치를 두지는 않겠지. 그냥 무거우면서 유용한 게 최고.
그렇다면 어떤 대답이 알맞을까.
“조금 달라요. 굴러다니기보다는 식물처럼 군국 곳곳에 자라나 있죠.”
“시, 식물? 나무처럼 말입니까?”
“가로등이니 울타리니 하면서 느닷없이 솟아나 있죠. 거기에는 건물 기둥에도 연금강을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전사보다는 나무꾼의 마음으로 가세요. 그게 훨씬 더 잘 벌릴 테니까요.”
“오, 오오! 감사합니다! 귀중한 정보 새겨듣겠습니다!”
“뭐, 맨입으로 정보를 준 건 아니고, 우리 쪽에서도 물어볼 게 있어서.”
“뭐든 물어보십시오!”
원하는 대답도 주고, 판도 깔아줬다. 나는 회귀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셰이 씨. 볼일 보고 와요. 저는 천막을 치고 있을게요.”
“알았어.”
‘…으음. 유용하긴 하단 말이야. 힘으로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저리 자연스럽게 정보를 끌어낼 수 있지? 그것도 틈만 나면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열국 승냥이에게?’
네 반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말이야. 나는 네가 부러워. 귀찮게 상대 마음을 읽고 원하는 대답을 적당히 꾸며내서 대화를 주고받는 것보다는 힘으로 위협하는 편이 편하잖아.
회귀자를 두고 캐터프랙트 근처로 돌아오니, 어느새 힐데가 천막을 다 쳐 놓은 채였다. 능숙하다 못해 신속하기까지 하다. 장성이 공사는 잘 못 친다는데, 육장성이면 다른가.
천막 문을 젖히고 들어가자마자 힐데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나를 반겼다.
“수고하셨어요, 아버님! 어서 오세요!”
“다녀왔네요. 후우. 빡세라.”
한쪽에는 티르의 관이 주차되어 있고, 다른 한구석에는 아지가 등을 쭉쭉 펴고 있었다. 나는 모포 두 장 깔린 자리에 털썩 앉았다. 힐데가 내 앞에 물컵과 랜턴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황금궁의 명령이 내려왔을 줄은. 국경 근처가 혼란해지겠네요~. 군국민들 불쌍해서 어쩌나.”
궁금해진 티르가 물었다.
“약탈 보장권이 무엇이더냐?”
나는 힐데가 떠다 준 물로 손과 발을 씻으며 대답했다.
“으음, 설명하기 복잡한데요. 간단하게 말해서 이 녀석을 털어라, 하고 명령하는 거예요. 그러면 열국 곳곳에서 흩어져 다니는 승냥이들이 소문을 듣고 우르르 몰려가서 물어뜯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