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34화 (334/384)

설사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결실을 맺더라도, 지나다니는 승냥이들은 열매가 영글기 전에 다 뜯어먹을 것이다.

아니면 그 전에 황금경이 한 번 더 지나가, 논밭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고.

그렇지만 그녀는 밭을 갈고 있다.

“이 땅, 지력이 쇠했군요. 하긴 적합하지 않은 토지에 억지로 만든 밭이 오래 갈 리 없지.”

“….”

“황금경도 전능하지는 않으시네요? 어디까지나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가?”

“…너.”

“아니, 잘못 생각했을 수도. 어쩌면, 황금경께서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 충분한 고민 끝에 오랜 시간 공을 들인다면 토질마저도 바꿀 텐데…. 딱히 열국에는 관심이 없으신 듯?”

콰직.

겁을 잔뜩 집어먹은 말이 울부짖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달려가는 말 뒤로 한때 쟁기였던 강철이 흩날려 떨어진다. 누군가 걷어 찬 잿더미처럼 새카맣게 부스러진 채로.

별다른 일 없다면 천 년은 그대로 있었을 강철은 여자의 손에서 순식간에 녹슬었다. 아니, 단순히 녹슬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붕괴. 강철이 철이라고 인식되게끔 하는 구조 자체가 무너졌다.

순식간에 쟁기를 못 쓰게 만든 여자는 서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창조는 파괴보다 어려워.”

“그럼요. 저도 카드로 탑을 쌓아 봐서 알아요. 쌓는 건 고생이지만 누군가 톡 치면 무너지니까요.”

“…황금경께선, 그 어려운 작업을 계속하고 계셔. 군국인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망가뜨리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나에 비하면, 만물을 만들어내는 그분은 대단하셔.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세상마저 창조하시는…. 지고의 존재인데.’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자기를 공격하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것을 공격할 때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

이럴 때는 그쪽을 건드려주면 솔직한 반응이 튀어나와서 좋아.

“…딱히, 너희가 뭘 하든. 신경 안 써.”

‘…전쟁을 벌이든, 암살을 기도하든. 내 알 바 아니야. 군국이 무슨 짓을 해도 황금경께 티끌만큼의 해도 못 입혀.’

말은 좀 서투르네. 내가 생각을 읽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커뮤니케이션에 장애를 겪었을 거야.

“…단, 황금경을 욕보이려 한다면.”

‘…내가 직접 녹여주겠어.’

허풍이 아니었다.

단지 마력을 흘려냈을 뿐인데 땅이 가라앉는다. 대지술도, 곤기공도 아니다. 그냥 한때 밭으로 만들어진 땅이, 씨앗이 숨쉬는 흙과 자갈이 부스러지고 무너졌다. 마치 개미귀신이 함정을 판 것처럼, 그녀 주변으로 부스러진 모래가 흘러내린다. 발을 잘못 디뎠다간 그대로 미끄러질 것 같다.

붕괴의 고유마도, 곤란한 능력을 가지고 있네. 빼앗아봤자 쓸데가 없잖아. 부식과 붕괴를 가속하는 기능 뿐이라, 상당 부분 도구에 의존하는 내가 써도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렇다면 갈등은 접어두고, 이제 친분을 쌓아볼까.

“지금 뭔가 오해를 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딱히 황금경을 욕보일 생각은 없거든요?”

“…그럼?”

“단지 그쪽이 자꾸 자기네들이 유리한 듯이 말하길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그쪽 불리한 점을 지적했을 뿐이라고요.”

사방을 갉아먹던 마력이 사라졌다. 여자가 고유마도를 거두며 되물었다.

“…협상?”

“네. 저희는 군국 총사령부에서 파견한 평화 사절이거든요.”

여자가 미심쩍은 눈으로 대꾸했다.

“…첩자, 아니야?”

“첩자였으면 군국의 탈것을 타고 당당하고 활보하지는 않았겠죠. 말마따나, 어떤 첩자가 생체 단말을 다 보이고 다닐까요.”

‘…그냥 멍청한 줄.’

말이 심하다. 아지야 개니까 멍청한 게 맞지만, 나는 아니라고.

흠. 생각은 많이 읽었는데, 정작 황금궁의 위치나 찾을 방법은 못 읽었다. 고위층도 모르다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땅이냐고.

그래도 상대는 황금궁에 직접 찾아간 적 있는 열국의 회주. 우리보다는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한 번 물어나 볼까.

“어쨌든 잘됐네요. 타향에서 길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황금경을 아는 사람과 만날 줄이야. 어때요, 우리를 도와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해보지 않겠어요?”

“…세계 평화?”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별거 아니고, 우리를 위한 협상 자리만 마련해주시면 돼요.”

“…협상? 누구와?”

“당연히 황금경이죠. 열국의 지배자가 황금경 아니면 누가 있나요?”

“…진심?”

“불안하게 왜 그래요. 문제라도 있나요?”

‘…황금경을 알현하여 직접 협상을? 겁이 없는 걸까. 대책이 없는 걸까.’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도와준다는 뜻인가요?”

“…아니.”

칼같이 거절한 여자는 아예 몸을 돌려 자기 발밑을 바라보았다. 이제 농사보다는 공사에 쓰여야 할 것 같은 땅을 보며 여자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농사를 지을 작정인가. 쳇, 협조성이 부족하네.

“그러면 황금궁의 위치나 좀 알려주세요.”

“…몰라.”

“잠깐만요! 황금궁을 찾을 방법이라도!”

“…평범하게.”

“아니, 평범하게가 뭔데! 내가 모르는 평범함이 어떻게 평범함이야!”

‘…평범하게, 땅의 흔적을 읽고 길 물어가면서. 다른 방법은 없어.’

이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궁궐이 어딨는지를 몰라! 아무리 움직인다고 해도 한 명쯤 알 법하잖아!

차라리 꽁꽁 숨겨진 비밀장소에 있다면 독심술로 읽고 알아냈을 텐데. 땅을 활보하니까 다들 모르네. 쳇, 진짜 발품밖에 없나?

“농사 짓는 걸 보면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안내 좀 해줄 의향 없어요?”

“…딱히.”

“아니, 우리 평화 사절이라니까요? 피, 불꽃, 전쟁! 이 끔찍한 비극의 연쇄를 끊고 사이좋게 지내자는데 도와야죠!”

“…알 바 아니야.”

‘…너희는 이 땅을 열국이라 하나로 묶어 부르지만, 사실 황금경께서 남기신 부산물을 주워 먹는 승냥이들만 있을 뿐. 저거너트는 제멋대로 움직이고 회사도 각자의 이윤만 추구해. 누구도 다른 누군가의 명령을 듣지 않아… 황금경께서 직접 명령하신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사람, ‘평화’가 아니라 ‘협상’에 대해 회의적이다. 평화가 싫다기보단, 유의미한 협상 자체가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끙. 아쉬운데.

나는 황금경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 그렇지만 만일 황금궁이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그 생각도 읽기 쉽지 않다. 독심술이 아무리 좋아도 과거를 읽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고, 무엇보다 가까이 접근할 기회가 필요하다. 내가 황금궁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거기까지는 우호적으로 접근해야 해.

황금경의 추종자이면서, 저거너트의 주인이기도 한 이 여자라면 도움이 될 텐데….

당장 설득할 수 없다면 밑밥이나 깔아볼까.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좋은 정보를 주신 답례로, 저도 한 가지 알려드릴까요?”

“…필요 없어.”

“유목민은 모르는,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인데. 필요 없다면야 뭐.”

여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말이랑 표정에서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행동은 솔직하다. 어서 말해보라는 눈짓에, 가볍게 미소 지으며 한마디 떡밥을 흘렸다.

“자, 잘 들으세요. 농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에요!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봐요!”

“….”

“아, 미안해요.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농담도 못 하겠네.”

사실 농담 아니고 저것이 가장 중요하긴 한데.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모든 농작물은 한때 씨알도 없는 야생 식물이었죠. 인간은 그나마 먹기 좋은 작물을 선택하고, 거기서 교배에 교배를 거듭해가며 더 나은 품종을 만들었어요. 인간끼리 그런 짓을 하면 3종 금기랍시고 우르르 몰려와 돌을 던지지만, 식물은 품종개량이란 이름으로 널리 행해지죠.”

“…좋은 품종이라도?”

“그건 찾아봐야죠! 하지만, 그것도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좋은 품종이라고 해도 여기 심어서 열매를 맺기 전까지는 잘 자라는지 모르잖아요? 실패할지 성공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가능한 많은 종류의 씨앗을 뿌리고 봐야죠.”

농사를 짓는 이유가 먹을 게 부족해서는 아닐 거다. 열국의 회주라면 돈이 부족하진 않을 테니까.

그녀에게는 열매보다는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겠지.

“…어떻게 구해?”

“열국에는 그런 품종이 없으니, 가까운 나라… 예를 들어 군국 같은 나라에서 구하면 되겠네요! 군국에는 전문적으로 품종 개량을 하는 회사도 있거든요! 휴전 협정만 맺으면 되겠어요!”

돌고 돌아 다시 평화 협정 이야기로 돌아오자 여자의 흥이 식었다.

“…결국, 같은 말을.”

“뭐, 어쩌겠어요. 당신만 씨앗을 심는 건 아니거든요?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일단 최대한 많이 뿌려봐야죠.”

어떠냐, 내 빌드업 설득이.

그러나 이토록 처절한 빌드업도 여자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여자는 완전히 나를 무시한 채 다시 쟁기를 만들었다. 말을 부르고, 고삐를 다잡고, 다시 맨 뒤 천천히 말을 몰았다.

쳇, 어쩔 수 없지. 귀농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돌리겠어.

“쳇. 싫음 말아라. 아지야, 가자.”

아지는 폴짝폴짝 뛰어 내게 다가왔다.

“멍! 고기반찬!”

“말도 못 잡았는데 뭔 고기반찬이야. 없어. 오늘은 콩죽이다.”

“멍?! 거짓말쟁이!”

“그러게 누가 그걸 못 참고 뛰어내리래? 가만히 지키고 있었으면 고깃조각이라도 넣어주었을 것을. 없어! 앞으로 고기는 꿈에도 꾸지 마라!”

“머어어어엉!”

"야! 나는 고기 아니야! 물지 마!"

여행이 길수록 더 느긋하게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이제 열국 초입. 지금 방향을 잘못 잡는다면 후일 생길 오차는 걷잡을 수가 없다.

회귀자는 동쪽인 클라우디아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만일 황금궁이 서쪽에 있다면 간 거리만큼 낭패를 본다. 천하의 회귀자라도 그건 싫은지 대략적인 위치라도 파악하려고 온갖 수를 동원했다. 다소 경제적인 방향으로.

열국의 캠프는 지금 회귀자발(發) 자금투입에 의한 행복한 경제보복을 당하고 있었다.

쳇. 그 돈 나 주지.

어쨌건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회귀자의 물량공세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는지, 시간이 좀 걸리는 바람에 오늘은 하루 캠프에 묵게 되었다.

열국의 캠프는 군국의 밤처럼 적막하지 않았다. 야심한 밤에도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남의 천막을 들락날락했다. 말을 탄 인간이 넓지 않은 길을 세차게 내달린다.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자기 갈 길을 갔다.

가로등은 따로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램프 하며, 길가의 연금술사가 내는 연금광까지 사방팔방에서 온갖 빛이 반짝이는 덕분에 캠프 안은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 한 가운데, 나는 카드 뭉치를 손에 든 채 홀로 캠프를 걷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