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보급다운 보급을 하는구나.”
요즘 카드를 쓰기만 했지 보급을 못 했으니까. 클로버에 담긴 마력은 천천히 담는다고 치더라도 다이아몬드의 소모가 극심하다.
상당수는 아예 잃어버렸고, 몇 개는 망가져서 카드 뒤쪽이 다 비쳐 보인다. 더 이상 게임으로는 쓸 수 없다. 와중에 무저갱에서 만들었던 꼬챙이가 남아있던 탓에, 내 덱에 다이아몬드 1만 두 개라 몹시 거슬린다.
마술사라면 짝은 맞춰야지. 이건 너무 잡덱이잖아.
그렇지만 바쁜 여행길. 내가 만들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회귀자에게 용돈도 받았겠다 뛰어난 연금술사에게 맡기도록 하자.
나는 연금술사를 찾아 캠프의 야시장을 걸었다.
승냥이는 황금경이 만들다 만 부산물을 주워다 판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는 사는 사람이 있다는 뜻. 열국에는 온갖 재료를 물건으로 바꾸어주는 상회가 존재한다.
저거너트를 가졌다면 몰라도,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상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캠프에 자리를 잡기 마련이니. 여기서 주의 깊게 쓸 만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
모든 게 틀에 정해진 군국과는 달리, 열국의 시장은 철쪼가리 하나를 살 때도 전쟁을 벌여야 하는 각축장이니까.
“드럼상회에서 제작한 공인 럼주다! 50리터에 990알케. 한 푼도 못 깎아!”
“씨발! 공인가가 500인데 두 배나 붙여 먹으면 어쩌자는 거야!”
“꼬우면 네가 떼어다 팔던가. 다음!”
간단한 물건을 살 때도 지난한 흥정을 거쳐야 하며.
“내 차 고쳐줄 사람 구한다!”
“종류는?”
“톱니바퀴 이륜차!”
“톱니바퀴? 막시밀리앵 제인가. 쓰벌, 유물을 타고 다니네….”
“남이야 뭘 타든. 안 고쳐줄 거면 꺼져!”
“내가 언제 못 고친다고 했나? 안내해. 보수나 넉넉히 준비해두고.”
부품이고 인간이고 너무 달라서 각자 맞추어야만 하고.
“부자인가?”
“저기, 나으리.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럼주 한 잔만 사주실 수….”
와중에 한 입이라도 빌어먹으려는 이들까지. 온갖 인간군상이 모여들어 혼란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었다.
당연히 그 인간군상 중에는 사기꾼도 포함이다. 마침 내 눈앞에서 누더기를 입은 노인이 책상 너머로 용케 멱살을 잡았다.
“쿨럭쿨럭. 이 자식, 장난해! 이게 어떻게 14알케 밖에 안 돼?!”
“손님. 진정하시고 저울이나 보시죠. 이 무게의 잡철에 어떻게 가격을 더 쳐줍니까?”
“성곽 바위틈에서 발견한 부러진 화살촉이다! 잡철일 리가 없잖냐! 그리고! 내 감각으로는 분명 30kg이 넘었는데, 왜 여기는 28kg밖에 안 나와 있어?!”
“저울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당신 감각에 문제가 있나 보지요…. 뭐, 손가락이 세 개라면 이 무게도 버겁게 느껴질 만합니다만.”
하하하. 구경꾼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웃음을 받은 노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화를 낸다고 해도 저울의 눈금이 바뀌지는 않는다.
눈금을 바꾸려면 옆에 있는 페달을 밟아야지.
“얍. 발이 미끄러졌네!”
나무 상자 위에 저울을 올려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자까지 하나의 세트. 나는 미끄러지는 척 자연스럽게 상자 옆면의 페달을 밟고 지나갔다. 그러자 저울의 눈금이 들썩이며 세 칸 돌아갔다.
아주 잠깐 좌중이 조용해졌다. 나는 내가 만든 적막을 유유히 뚫고 지나가며 말했다.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많이 파세요~.”
“너, 너….”
잠시 뒤, 뒤에서 온갖 욕설과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 세 개로 쥔 주먹이 상인의 얼굴을 강타했고, 기어코 상인의 이 세 개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노인이 주춤했지만, 상인의 이는 귀중한 금속을 가공해 박아넣은 금니였다. 상인은 다급히 금니를 주우려고 했지만 눈치 빠른 승냥이들이 이미 소매 속에 숨긴 이후였다.
온갖 소동이 일어났지만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조금 시끄럽네. 물 관리 안 하나.”
투덜거린 나는 소동을 뒤로 하고 비교적 한산해진 거리를 둘러보았다.
내가 만들 건 파괴력이나 내구성보다는 휴대성에 중점을 둔 다용도 연금장비. 드는 재료에 비해 쓸데없이 손이 많이 가는 제품이다.
그만큼 뛰어난 연금술사가 필요한데, 과연 하룻밤만에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고민하며 걷던 중, 성의 없는 간판을 걸어 놓은 작은 천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무거나.]
흐음. 자신감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괜찮을까?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는 사람치고 진짜 아무거나 말했을 때 좋아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디, 실력이나 볼까. 나는 천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 오너라. 손님이 행차하셨….”
“…첩자.”
어디서 본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낮에 보았던 그 여자다.
열국의 회주가 왜 이런 잡일을 하나 싶지만, 사실 인간의 왕인 나도 길바닥에서 구르는 중이다. 그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말자.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일단 하나만 확인하고.
“아무거나 만들어주는 곳 맞죠? 아무거나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곳 아니죠? 조금 전에 쟁기가 잿더미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해서.”
“…나가.”
“의뢰하고 싶은 건 이 연금장비인데요.”
책상 위에 내 카드를 쫙 펼쳐놓았다. 본래 트럼프 카드 한 뭉치…임이 분명하지만, 군데군데 불에 탄 것처럼 사라지고 닳아 있었다.
여자는 그중에서 보풀이 풀린 것처럼 닳아 사라진 카드 한 장을 들어올렸다. 다이아몬드 8, 가늘고 긴 모든 것. 내가 애용한 야심작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어때요? 많이 닳긴 했지만, 그만큼 요긴하게 쓴….”
“…쓰레기네. 누가 만들었는지.”
아니, 남이 만든 작품에다가 대고 험담을?
잠깐. 진정해. 저 인간은 지금 내가 만든 건 줄 모르고 있다. 아무리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결여 되어 있더라도, 만든 당사자 앞에서 작품을 깎아내리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기회다. 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점을 어필해서 저 인간을 무안하게 만들어야지.
“흠흠. 사실, 그거 제 작품이거든요. 뭣도 모를 어릴 적, 온갖 지식과 자금을 끌어모아서 마련한 건데….”
“…왠지.”
“왠지? 왠지라고? 농사도 하나 제대로 못 짓는 주제에 남이 피땀 흘려 만든 물건을 비난해! 배려라는 게 뭔지 모르는 거냐?! 아까는 참았는데 나도 솔직하게 말해주지. 당신 농사로 밥 벌어 먹고살긴 글렀어! 가장 게으른 농부도 그쪽에 비하면 농경의 신일걸!”
내가 발끈해서 외치자, 여자는 조금 주눅이 들어서는 변명했다.
“…쓸데없어. 낭비.”
이게 변명이야, 시비야? 어디. 뭔 생각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비싸고 복잡해. 손이 많이 가는 물건. 그런데 그 값어치를 못 해. 귀중한 연금화와 고난도 기술로 만든 결과물이 고작 얇은 철사를 펼쳐내는 게 전부. 극히 비효율적이야. 차라리 다른 무구를 만드는 편이 나을 텐데….’
정작 생각을 읽어보니 납득이 가네. 내가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까 봐준다. 독심술사가 아니었다면 당장 멱살을 잡았을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조심해.
“…용건은? 수리?”
“수리라고 할까. 이런 방식으로 카드 13장을 다 복원하고 싶거든요? 다 해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리죠.”
꼬챙이, 갈고리, 각궁, 단창, 낫, 리볼버, 와이어, 손도끼, 방패와 검.
이중 대다수가 군국 수도 아미텐그라드를 벗어날 때 전투로 소모되거나 파손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리볼버는 리아를 주고 왔고, 와이어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회수했음에도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급해서 다시 채워넣을 겨를이 없었다만, 이 기회에 내 전력을 완벽하게 복구해야지. 해봤자 얼마나 쓰겠냐만.
여자는 카드를 뚫어지게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쓰레기 같다며 험담해 놓고 못 하겠다고요? 요즘 장사는 이런 식으로 해요?”
“…아냐. 만들긴 쉬워. 그런데.”
“그런데?”
“…귀찮아.”
지금 장사하겠다는 사람 맞아? 귀찮으니까 안 하겠다고?
물론 말한 대로의 본심은 아니겠지만… 어디, 독심술.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야. 손이 너무 많이 가. 변하는 무기를 만드는 건 쉽지만, 그걸 카드 형태로 바뀌게 하려면… 뜨개질로 한 땀 한 땀 만드는 정도의 고생을 해야 해. 거기다, 특정한 모양으로 만드는 건 기술보다는 예술의 영역.’
확실히 능력은 있나 보네. 단시간에 그걸 파악하다니.
만드는 데 고생 좀 했지. 가장 형태가 간단한 다이아몬드 1, 다용도 꼬챙이도 하룻밤이 꼬박 걸렸다. 다른 한 벌은 얼마나 걸렸는지 말도 못 할 정도다.
…쳇, 그래서 남 시키려고 한 건데.
“하룻밤 꼬박 새우면 세 장은 완성할 수 있을 텐데요?”
“…싫어.”
“아니, 일하고 돈 벌려고 여기 앉아있는 거 아니에요? 왜 고객을 상대로 파업을 해요? 돈 벌기 싫어요?”
‘…종알종알, 시끄럽네. 내가 여기 있는 건 돈 때문이 아닌데….’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대신.”
여자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짚었다. 팔에 그려진 문신이 번쩍이고, 철로 만들어진 탁자에 마력이 전해지며 새하얗게 달아올랐다. 탁자가 하얀 빛에 휘감긴 순간 여자가 손바닥을 들었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강철로 만들어졌을 탁자가 잔뜩 눌어붙은 밀가루처럼 손바닥에 딸려 나왔다. 반짝이는 빛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녹은 게 아니다. 연금술에 의해 가변 상태에 접어든 강철은 차가운 채로 부드러워졌다. 꼭 빛으로 된 실타래처럼 보였다. 여자는 손바닥으로 강철 타래를 몇 번이고 휘감아 더욱 얇게 뽑아냈다. 다발이 충분히 가늘어지자, 그녀는 단숨에 움켜쥐고는 내 카드 위에 쏟아부었다.
빛이 번쩍이고 잠시 뒤.
“…자.”
내 눈앞에 있는 건 멀쩡해진 다이아몬드 8이었다.
나는 감탄을 섞어 말했다.
“잠깐만요. 이걸 1초 만에 다시 고쳤다고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엄살 부린 거였어요?”
“…같은 구조가 반복되니까. 본떠 만들었어.”
아무리 구조가 같다고 해도 그렇지. 그 구조를 통째로 연금한 다음 붙여넣어? 심지어 와이어에 탄성까지 부여해서!
괜히 홀로 다니는 연금술사들이 상회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게 아니다. 혼자 원재료 가공에 제품 제작까지 다 하면 그게 1인 공장이고 상회지, 다른 뭐가 더 필요할까.
단시간에 구조를 이해하고 바꾸는 힘, 연금술.
모두가 그걸 익히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열국의 인간들은 다른 인간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 필요한 게 있다면 자기가 만들고,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만 거래할 뿐이다.
열국이 커다란 사회를 이루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타인이 그다지 필요가 없으니까….
“좋네요. 이 기세를 몰아 다른 카드도 고쳐주세요!”
“…안 돼.”
‘…여기엔 없어진 실만 다시 채워 넣으면 되지만, 다른 카드는 변환했을 때의 형태가 정해져 있어서. 일정 부분 예술의 영역이라 손대기 어려워.’
“칫. 알았어요. 그렇다면 보수는 얼마나 주면 되죠?”
여기서부터 중요하다. 회귀자에게 용돈을 받아오긴 했지만, 차액을 돌려달라는 말은 들은 적 없다. 그렇다면 내가 흥정해서 깎은 돈은 그대로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법.
정승 같이 쓰기 위해서라도 아지 같이 벌어야 한다.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며 가격을 제시하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