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39화 (339/384)

“꺄아아아악!”

여자가 세차게 비명을 질렀으나, 빅터에겐 이마저도 사냥을 꾸며주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는 짐수레 위에 가볍게 내려앉으며 웃었다.

“큭큭큭. 가만히 있으라고.”

“다, 당신들 뭐야! ‘나’는 이제부터 군국을 갈 거라고! 건드리지 마!”

“워, 워. 진정해. 다 군국에 갈 필요는 없거든? 몇 명은 여기 남아있으라고.”

“꺄아아악! 오지 마! 저리 가라고!”

떨어뜨리려고 핸들을 이리저리 꺾지만 용매 부대에게 이 정도는 흔들림은 산들바람처럼 가볍다. 빅터는 가볍게 그녀의 뒤까지 다가갔다.

“앙칼지군. 뭐, 이 편이 더 좋지만 말이야!”

이대로 어깨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오르면 끝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는 저항도 못 할 테니까….

빅터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어깨를 잡아 챘을 때. 그는 무언가 이상을 느꼈다.

움직이지 않는다. 단단하다.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 올리려고 했는데, 마치 바위를 잡은 것 같은 굳건함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이?”

“분명~ ‘제’가 오지 말라 했는데요~.”

이상하다. 아니, 이제는 이상함을 넘어서 기괴함에 가까워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긴 머리를 가진 여자였던 것 같은데, 아무리 어둠 속이라고 해도 헷갈리기 힘들 정도로 분명한 여자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아니, 달라지고 있었다. 쾌활한 인상의 여자에서… 약간 음침한 인상을 가진, 자주 볼 일은 없지만 낯이 익은 누군가의 얼굴로.

빅터는 영문도 모른 채로 얼굴의 주인을 불렀다.

“…나?”

‘빅터’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대답했다.

“반가워, ‘나’.”

잠시 뒤, 시체 하나가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렇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용매 부대의 수는 그대로였다.

새까만 그림자가 급히 땅을 내달렸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달려가는 그림자는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용매 부대는 꼬리에 빛을 매달고 다니며, 앞선 용매가 내는 빛은 뒤따르는 용매의 시야가 된다.

용매 부대 중 한 명이 빛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하! 까만 옷을 뒤집어쓰고 달려가면 안 들킬 줄 알았냐!”

마치 어둠과 동화된 듯 새까맣다.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니 형체가 분명하게 보였다. '깃털' 한 명이 날개를 접고 빠르게 급강하했다.

“제법 머리를 썼구나!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는 호기롭게 외치며 발에 붙은 칼날을 쭉 내질렀다. 속도가 붙어 더욱 예리해진 칼날이 검은 형체의 몸을 꿰뚫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피가 튀는 소리. 인간의 비명 소리. 생명이 빠져나오는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검은 형체는 팔을 움직여 그의 다리를 꽉 붙잡았다. 어둠이 그의 발톱을 휘감고 다리까지 뻗어온다.

“어, 어? 이게!”

용매 부대는 전원 건기공까지 익힌 실력자들. 그는 기공으로 어둠을 떨쳐내며 몸을 빼냈다. 한숨 돌리는 것도 잠시, 무언가가 그의 등에 올라탄 탓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

추진기를 더욱 세게 당겼지만 위아래도 모를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 땅에 한 번 충돌한 뒤, 흙바닥을 길게 미끄러지고서야 간신히 멈추었다. 그동안에도 검은 그림자는 더더욱 몰려들어 그를 둘러쌌다.

그가 낑낑거리며 외쳤다.

“이, 이 미친놈들이! 몸을 던져서 막을 생각을 해?! 같이 죽자는 거냐?!”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인간은 악에 받치면 동귀어진을 꾀할 수 있지만, 그건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가져야만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죽고야 만다.

그런데 그 하나 잡겠다고 수십 명이 몸을 던지다니. 이런 비인간적인 대응은 명백히 이상하다….

비인간. 그제서야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잠깐…. 너희, 인간이 아닌 거냐?!”

그를 둘러싼 이들. 그를 짓누른 이들. 하다못해, 그의 발에 꿰뚫린 이까지. 전부 새까만 갑옷을 입은 악령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까만 옷을 입은 게 아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권속이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뿐.

“어둠…?! 흡혈귀?! 하지만, 권속이 이따위로 많을 수가…?!”

그도 소문은 들은 적 있다.

안개 산맥 너머, 햇빛이 비치지 않는 땅에는 흡혈귀가 산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처럼 기르며 피를 취하고, 온갖 신을 모독한다고 한다. 햇빛을 싫어하기에 산맥을 넘진 않지만, 언제나 구름 낀 클라우디아에는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전해진다.

그가 공포에 잠겨 있을 때, 그의 곁으로 색을 가진 누군가가 다가왔다.

“후우. 한 놈 겨우 잡았구나. 날파리처럼 재빨라서 잡는 데 애를 좀 먹었다.”

달빛 아래 창백한 피부. 어둠 속에서도 새빨갛게 빛나는 듯한 눈동자. 시리도록 아름다운 외모.

어디를 보아도 흡혈귀다. 안개 산맥 너머에서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다 알려진, 피를 마시는 종족.

“내 너에게 하나를 묻겠다.”

흡혈귀는 흑기사로 하여금 그를 무릎 꿇게 하고는 물었다.

“이것을 나에게 쏘아낸 이는 누구냐?”

억지로 고개가 들려진 그는 흡혈귀가 내민 물건을 보았다. 길쭉한 원통에 타들어간 심지, 조금 찌그러졌긴 해도 명백히 열폭회주의 로켓이었다. 아마… 흡혈귀를 직격한.

그가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을 무렵. 흡혈귀는 전혀 서두르지 않는 어조로 그를 재촉했다. 마치 급한 건 그쪽이라는 듯이.

“빨리 말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다른 녀석에게 물어야 하니 말이다.”

흡혈귀의 뒤쪽으로, 수십 개의 불꽃이 유성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봐봐.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손 쓸 필요도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용매 부대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데도, 티르도 각자의 위치에서 사냥하고 있었지만…. 역시 이런 싸움에서는 회귀자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회귀자는 지금 구름을 밟고 서 있었다. 디딤구름을 밟은 채로 기수식을 취한 회귀자는 천앵을 크게 휘둘렀다.

“천검기. 단공(斷空).”

후우웅. 바람이 사라진다.

아무리 천앵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공간을 다 벨 수는 없다. 거기에 공기밖에 없더라도, 길이가 길어질수록 무게도 무거워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회귀자는 칼날로 베는 대신, 바람의 성질을 바꾸었다.

바람이 멈춘다. 공기가 굳는다. 일정 공간 보수적인 성질이 된 공기에서 불이 붙지도, 냄새가 퍼지지도 않는다.

용매 부대가 멋모르고 잘린 공간을 지나자, 그들을 앞으로 밀어주던 추진기가 일제히 꺼졌다.

“뭐, 뭐야! 추진기가!”

“불을 붙여!”

날개를 펼쳐 활공하며 빠르게 추진기를 재점화한 이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실패한 이들은 땅에 추락했다. 날개 덕분에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었다.

땅에 떨어진 새는 짐승의 먹잇감이 되는 법. 몇몇 승냥이들이 용매 부대를 보고 눈이 뒤집혔다. 갈고리, 칼날, 창날, 혹은 개조된 앞바퀴가 그들을 노렸다.

하늘을 날며 빠른 속도로 적을 유린하던 용매 부대는 속도와 고도라는 강점을 잃자 그대로 추락해 승냥이의 먹잇감이 되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네. 용매 부대고 뭐고 후두둑 떨어지고 있구만. 이렇게 강한 이들이 내 아군이라서 참 좋아.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수레에 매달려 가는데, 옆에서 달리던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고 외쳤다.

“도, 도대체 저것들은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혼잣말이겠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대답해주지. 그의 옆을 나란히 달려가며 친절하게 알려줬다.

“지나가던 평화 사절입니다.”

내 말에 그는 화들짝 놀라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넌 또 뭐야?! 나를 어떻게 따라오고 있는 거냐?!”

“보면 몰라요? 개썰매잖아요. 이 개, 엄청 빠르거든요.”

“뭉뭉!”

아지가 장대를 문 채로 긍정하듯 짖었다. 칭찬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다만 그에게는 별로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는 않았는지, 그는 느닷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멍청한 소리 좀 지껄이지 마! 고작 개 수인 따위가! 어떻게 나의 속도를 따라오는 건지 묻는 거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멍청한 소리 좀 지껄이지 마세요. 로켓 추진기 몇 개 좀 달았다고 아지를 따돌릴 리가 없잖아요. 상식을 가져요, 열폭회주.”

아지는 개의 왕이라고. 개의 왕이 끄는 개썰매가 그깟 장난감보다 느릴 리 없잖아. 상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진지하게 조언해줬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폭발 직전의 얼굴이 된 그는 빼액 외쳤다.

“나를 열폭회주라고 부르지 마라!!”

생각대로, 열폭회주는 정말 다혈질이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자제심조차 없었다.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에 동그란 고리 철편을 가득 매달았다. 머리카락, 어깨, 옷까지 철편이 가득해서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가 그리 많이 들어있는지 그의 등은 불룩 튀어나와 있다. 그가 나를 보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더니, 바로 폭탄을 꺼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실린더에 짧은 심지가 달린 폭탄. 겉보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상대는 열국의 회주. 그리 쉽진 않겠지.

그는 양손에 넘치도록 폭탄을 든 채 외쳤다.

“로드 로우켓이다!!! 귓구멍이 막혀 있다면 새로 뚫어주마. 똑똑히 들어라!”

“사람들이 당신보고 열폭회주라는데요.”

“그건! 세상의 멍청이들이! 멋대로 처부르는 거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불러야 할까 모르겠을 때 딱 정해주는 게 호칭의 기능이잖아요. 그러면 맞지 않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로우켓이 든 폭탄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음.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열폭회주라는 호칭은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분명 노리고 지은 것이겠지. 암.

“너 같은 자식을 날려버리기 위해 있는 게 폭탄의 기능이다아아아아!!”

화를 참지 못한 로우켓은 세차게 폭탄을 뿌렸다.

열폭회주 로우켓의 고유마도는 철을 가연성 물질로 만든다. 본래 강철은 그을릴 뿐 연소하지는 않으나, 로우켓의 능력에 닿으면 팝콘처럼 격렬하게 폭발한다.

철이니만큼 그 파괴력은 팝콘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 그걸 가루로 내서 담아두었다면… 더더욱.

아차. 지금 이럴 때가 아닌가. 나는 급히 외쳤다.

“아지야! 피해!!”

“무우우우웅!”

먼저 낌새를 느낀 아지가 도리질을 쳤다.

커다란 수레가 아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급격한 회피기동에 몸이 퉁 튕겨나갈 뻔했다. 몸을 미리 고정해두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저 멀리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나를 수레와 함께 던져버린 아지는 냅다 뛰었다. 그 뒤, 등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수십, 수백 개의 폭탄이 일제히 터지면서 등 뒤로 후끈한 바람이 불었다.

“후우. 열 받으니까 폭발해버리네. 진짜 열폭회주는 맞나 보네요.”

“시끄러워어어어! 네까짓 게 나를 도발해?!”

로우켓은 그가 타고 있던 사륜차에 손을 뻗었다. 손에서 시작된 마력이 뻗어나가 사륜차의 구조를 뒤바꾼다.

덮개가 벗겨지고 숨겨진 추진기가 튀어나왔다. 개수는 총 8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추진기가 일제히 뒤를 겨누고는 거센 불꽃을 토해냈다. 이글거리는 파이프에서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개썰매라고?! 네가 따라잡은 건 내 속도의 4분의 1이다! 어디, 내 전력도 피할 수 있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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