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42화 (342/384)

조금 떨어진 곳에 가볍게 내려앉은 힐데는 피 묻은 칼날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흐음~. 이거, 칼날이 왜 잘 안 들어가나 했더니~.”

힐데가 망토 아래 드러난 로우켓의 몸을 보고 말을 흘렸다. 로우켓의 등은 굽어 있었다.

망토와 저거너트로 감추고 있었을 땐 배낭을 메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무언가가 들어찬 쪽은 복부였다. 그래서 힐데가 죽일 각오로 찔러넣었음에도 아직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아직’일 뿐이지만.

“열폭회주 로우켓. 열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주전파. 추진기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부대를 운용한다죠? 정보에 따르면, 용매 부대는 황금궁의 전령 역할로도 쓰인다고.”

“크, 헉…!”

“히스토리아가 없으면 상대하기 껄끄러운 부대였는데. 여기서 처리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운이 좋았네~.”

힐데는 순진하게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이건 죽여도 되죠, 아버님?”

“잠깐 기다려 봐.”

“어머? 또 왜요? 확인해볼 거라도 있나요?”

회귀자가 냅다 다가가서는 로우켓의 날개에 천앵을 박아넣었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천앵을 밟고 선 회귀자는 한껏 위압적으로 물었다.

“마지막 기회야. 황금궁의 위치를 말해.”

“쿨럭…! 네놈들…!”

“황금궁의 전령을 자처한다면 황금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알겠지. 살고 싶다면 솔직히 털어놔. 목숨만은 살려줄게.”

“허억, 헉…. 거기까지….”

‘거기까지, 안다고…? 군국 따위, 제 왕을 직접 죽인 멍청이들일 터인데…. 어떻게 그 사실까지….’

큭, 하고 로우켓은 짧게 웃었다. 무언가 각오한 듯, 로우켓은 피거품 섞인 기침을 내뱉으며 띄엄띄엄 말했다.

“…쿨럭. 그래. 말해주지….”

‘…내 병력도, 명성도, 재산에다가 저거너트까지. 이미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살 이유도 없고… 저, 자식들이 날 살려두지도 않겠지. 그렇다면….’

이어 그가 무어라 웅얼거렸으나, 애초에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어서 회귀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회귀자는 짜증을 내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해봐.”

회귀자가 앞으로 가니 자연스레 힐데도 앞으로 몸이 쏠렸다. 여차할 때 목숨을 거두기 위함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로우켓이 노리던 바.

로우켓은 고유마도를 펼쳤다. 그의 저거너트, 용매를 이루는 금속은 황금경이 로우켓을 위해 직접 만든 연금강. 로우켓이 아무리 불태워도, 폭발시켜도 소모되지 않는 불멸의 합금이다. 따라서 로우켓은 금속이 소모될 걱정 없이 거의 영원히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최후에는 그 불멸성조차 땔감 삼아 터뜨릴 수 있다.

“너희는… 죽는다….”

“뭐?”

로우켓이 피 묻은 팔을 들었다. 그에게 마지막 남은 마력이 팔을 타고 저거너트에게로 흘러들어갔다. 황금경이 만든 금속은 초월적으로 높은 수준의 것이나, 회주는… 미약하나마, 그 구조를 바꾸어낸다.

불멸의 금속을 필멸의 금속으로. 적을 단번에 태워버리기 위해.

“…황금경이 내리신 이 유산으로…! 길동무로 삼아주마!”

로우켓이 고유마도를 일제히 해방하며 그렇게 외쳤다. 대응하긴 늦었다. 반경 수백 미터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최후의 폭발은 회귀자와 힐데를 휩쓸 터였다….

다만.

“뭐하는 거야?”

회귀자는 멀뚱히 중얼거렸다.

천반경은 작동하지 않는다. 회귀자의 몸에 새겨진 방어 기공은 아무런 위험도 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로우켓은 빛을 잃어가는 그의 저거너트를 바라보았다. 황금경이 직접 내린 유산이, 그가 죽기 직전까지 남겨둔 비장의 수가 녹슬고 있다.

오직 금속만이 폭발의 제물이 될 수 있으나, 녹슬고 닳아버린 건 그 자격을 잃는다. 가치를 잃은 금속은 쓸 수 없다. 심지어 회주조차도.

“잔…녹…!”

다각, 다각.

마른 땅에 느긋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우레아를 탄 페루가 로우켓을 향해 다가왔다. 무감정한 페루의 시선에 대항하듯 로우켓은 격렬하게 외쳤다.

“어째서냐…! 어째서, 나를 방해하는 거냐, 잔녹…!”

페루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자폭, 하려고 했지.”

“이들은… 여기서 죽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그 땅은 우리의 것이 되었을 거다…! 그런데 왜! 내 저거너트를 잔녹으로 만든 거냐…!!”

“…똑같아. 네 열폭도. 내 잔녹도. 똑같아. 저거너트를 못 쓰게 만들어.”

‘…그리고 어차피 둘 다 같은 결과를 낸다면. 저거너트 하나를 이 열국에서 소멸시키는 행위라면….’

페루는 나지막이 말했다.

“…덜 죽는 편이, 나아.”

페루가 싸우지 않는 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녀의 능력은 가치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싸움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열폭회주가 모든 가치를 제물로 바쳐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파괴를 하려고 한다면. 잔녹보다도 더 끔찍한 결과만을 남길 거라면 페루는 막을 것이다.

저거너트에서 반응이 사라졌다. 황금경의 걸작의 수명이 다해가는 것을 느끼며 열폭회주 로우켓은 울부짖었다.

“웃기지 마아아!!! 너는 알 터인데, 우리의 비원을…! 너는…! 우리의 두 번째 고향을 빼앗았어……!!”

“네에~. 잘 들었어요.”

서걱.

외침이 칼로 잘린 듯이 끊겼다. 잠시 뒤, 로우켓의 목이 비스듬히 떨어졌다. 회귀자에게, 군국에게, 끝에는 자신을 막은 페루에게까지 분노를 쏟아냈던 열폭회주는 죽으면서까지 울분에 찬 얼굴이었다.

그을음이 가득 묻은 책에 마침표가 찍혔다. 조금 떨어져 있던 나는 마음 속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시길, 로드 로우켓. 숨이 멎을 때까지 타올랐던 불꽃 같은 인간.

인사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힐데는 칼날을 자기 몸 뒤로 숨기면서 회귀자와 페루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내보이고 있었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는 모두가 차마 하지 못한 궂은일을 떠안았을 뿐이라고요. 저걸 죽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겠어요?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죠!”

내숭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가득했으면서.

정작 로우켓을 무력화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 나인데 말이야.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지만, 인정받지도 못하는데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야?

어쨌든,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중재하러 가자. 내심 한숨을 쉬며, 아지를 불렀다.

“아지야.”

“수고했어, 멍!”

“…아니, 칭찬해달라는 뜻이 아닌데.”

아침이 밝자, 전날 있었던 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널따란 평야에는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핏자국, 잿더미, 그리고 처참하게 파헤쳐진 구덩이까지. 오만 굴곡이 다 새겨진 땅은 흉측하다 못해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와중에도 승냥이들은 흥겹게 시체를 뒤지고 있었다.

탈것은 물론, 그 시체에 있는 무기나 도구까지 전부 귀중한 재산이다. 용매 부대와 다른 승냥이들이 남긴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도망쳤던 승냥이들이 몰려들었다.

시체로 벌어진 축제 속에서 승냥이들이 배를 불렸다. 그나마 새로이 시체가 쌓이지 않는 건 캠프단장이 질서를 엄격하게 유지한 덕분이리라.

“거기! 자기가 턴 시체는 제대로 매장해라!”

시체를 놔두고 물건만 챙겨가려던 승냥이 하나가 혀를 찼다.

“쳇, 까탈스럽긴. 어차피 뒤진 놈인데.”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고 하진 않겠다. 최소한 네 물주에 대한 예의를 지켜!”

“알았수. 하긴, 물주라면 구덩이를 파서 묻어주는 정도야 싸지.”

승냥이가 투덜거리면서 시체를 매장할 동안, 깊게 한숨을 내쉰 단장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페루 님이 떠나기 전에 시체를 수습하고 싶었소. 이들의 시체가 남아있다면 달아난 용매 부대가 회수하러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오.”

당연히 동료애 때문은 아니다. 용매 부대의 시체에는 용매 부대가 필요로 하는 자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빠른 기동력을 가지고 있는 용매 부대라면 습격해서 날개와 추진기만 가지고 도망칠 수도 있다, 이 가능성을 두려워했겠지.

그렇지만…. 나는 힐끔 힐데를 보았다. 힐데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헤프게 웃었다.

“헤헷. 왜요, 아버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 용매 부대 태반을 저 인간이 죽였는데? 그것도 동료의 얼굴을 빼앗고 하늘을 날면서, 공중에서 차례차례 암살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용매 부대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건 오합지졸이라서가 아니라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무서운 능력이야. 소름이 끼치네.

회귀자는 캠프단장을 향해 물었다.

“잔녹회주는?”

“캠프에 계시오. 저거너트의 봉인을 풀고 계시지.”

“아직도?”

“슬슬 끝났을 거요. 따라오시오.”

단장은 부하들에게 뒷일을 맡기고는 채 캠프로 향했다.

대부분의 승냥이들이 밖에서 대목을 즐기고 있었기에 캠프는 기분 좋은 한산함으로 가득했다. 사람 수백이 죽어갔던 땅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열국은 방랑의 땅. 한 번 헤어진 승냥이끼리 다시 마주칠 일은 극히 드물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헤어짐과 같은 의미다.

단장은 재물을 챙기는 이들의 사이를 지나가며 말했다.

“이미 드러났으니 말하겠소. 페루 님은 잔녹회주요. 다만, 그분은 별다른 세력을 구축하지 않고 홀로 다니시오.”

“외톨이라는 뜻이네요. 조금 그래 보이긴 하더라.”

“…틀린 말은 아니오. 그분의 능력으로 돈을 모으기에는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으니까.”

불편한 진실을 입에 담은 단장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하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분만큼 안전한 회주를 찾기는 또 어렵소. 열폭회주 로우켓을 보시오. 그는 물론 그의 부하들도 돈을 펑펑 터뜨리고 다니지. 써도 써도 모자라 언제나 다른 이들을 사냥하고 다니오. 그에 비해 페루 님은 돈에 그다지 관심이 없소.”

“모아봤자 언젠가 자기 능력 때문에 사라질 거라?”

“…내가 페루 님의 마음에 들어갔다가 나오지는 않아서 그건 모르겠소만. 어쨌건 페루 님은 싸움을 꺼리시는 온화한 분이오.”

은근히 나를 째려본 단장은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환대받지는 못하지만 적대할 이유도 없을 거요. 잘 부탁하오.”

“네,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쪽에서 잘 맡을게요.”

“…저기, 이 사람은 원래 이렇게 시끄럽소?”

참다못한 단장이 회귀자에게 따졌다. 그러자 회귀자가 내게 물었다.

“뭐가 불만이야?”

“저 사람이 말을 빙빙 돌리잖아요. 점잖은 척하지 말고 본심을 말하라고 자극해봤죠.”

“그렇대.”

“…됐소. 내가 괜한 말을 했지.”

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마저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점차 캠프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다 왔소. 저곳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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