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오는 용광로 앞에 페루가 서 있었다. 용광로 속에 부러진 금속을 던져 넣는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단장이 페루를 불렀다.
“페루 님. 그들이 찾아왔습니다.”
페루는 단장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 모습을 확인한 페루는 다시 용광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아직 남았어.”
“알겠습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무탈하십시오.”
“…고마웠어.”
단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갔다. 그 뒤 침묵이 찾아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금속을 던져넣는 페루의 모습에 회귀자가 답답한 듯 물었다.
“뭐가 남았는데 자꾸 집어넣는 거야?”
“…용매.”
“용매? 동물?”
“…아니야. 로우켓의 무기.”
로우켓의 무기라면 하나밖에 없다. 그의 저거너트인 용매. 그걸 깨닫자마자 회귀자는 경악해서 물었다.
“저거너트? 그 용광로 안에 저거너트가 있다고?”
“…응.”
“그걸 연금할 수 있는 사람은 황금경 뿐이라고 들었는데. 너는 뭐야?”
“…연금, 아니야. 나는 분해밖에 못해.”
페루가 고개를 젓고는 마지막 남은 조각을 용광로에 넣었다. 먹잇감을 잔뜩 삼킨 용광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르르 떨었다.
“…열폭은 저거너트와 자폭하려 했어. 그랬다간, 귀한 저거너트가 사라졌을 거야. 그래서 막았어. 너희를 구할 의도 없었어.”
“흥. 그거 좀 터뜨렸다고 죽진 않거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고개를 저은 페루는 용광로에 달린 레버를 돌렸다. 용광로의 뚜껑이 비스듬히 닫히고, 틈으로 거친 뱃고동이 들렸다. 그 사이사이로 페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쟁이 벌어지면, 잔해가 쌓이면. 열국은 부유해져. 그러나 많이 죽을 거야. 승냥이들도, 군국의 병사도.”
“흐음? 글쎄요~. 군국이 딱히 열국에게 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
회귀자도, 힐데도 페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가치관이 다르다 보니 핀트가 살짝 엇나가네. 회귀자도 힐데도 전투의 결과를 논하고 있지만 페루는 그걸 신경 쓰고 있지 않다. 연금술사인 그녀의 가치관에 '어느 편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에게 중요한 건 승패가 아니라, 가치의 총량이죠? 전투든 전쟁이든 벌이면서 생길 손실을 꺼리는 거죠?”
“…응.”
“연금술사의 마인드네요. 저울 한쪽에 나라의 가치 전체가 있다는 건 좀 예상 밖이지만요.”
“…내 저울 아니야. 황금경의 저울이니까.”
마지막으로 페루는 고유마도를 펼쳤다. 나는 기겁해서 몸을 빼려고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고유마도가 나에게 닿지 않았다. 물질을 붕괴시키는 페루의 힘은 오직 용광로 안쪽에만 작용했다.
페루의 힘이 합쳐지자, 용광로는 진정한 의미로 달아올랐다.
용광로는 대부분 마력으로 움직인다. 연금술이 나타나기 전에는 불을 크게 지펴서 금속을 녹였다곤 하지만, 연금술과 백마법의 발전 이후 그런 방식은 사장되었다. 마력 그 자체로 금속을 연금하거나, 그게 힘들 경우 마력으로 화염을 일으켜 가공하곤 한다.
그러나 황금경이 하사한 저거너트는 페루의 고유마도로 용광로를 달군다. 고유마도란 세상에 자기만의 규칙을 덧씌우는 것. 고유하기에 그 어떤 것과도 호환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나… 황금경의 저거너트는 고유마도 이상의 신비다.
고유마도에 의해 붕괴된 강철에서 힘과 열이 빠져나온다. 그게 황금경의 금속에 갇혀서 더더욱 응축된다. 그러다 어느 임계점을 넘은 순간 복잡한 기계장치를 타고 저거너트 곳곳으로 흐른다.
그리고 용광로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흙더미를 헤치고 선미가 솟구쳐올랐다. 거대한 무한궤도가 쏟아지는 흙과 모래를 거슬러 오른다. 흙과 모래의 바다를 헤엄치며 그 속에 숨겨졌던 저거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광로는 이 저거너트의 일부에 불과했다. 흙 속에 묻힌 부분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몇 배는 컸다. 유선형 무한궤도를 가진 저거너트는 마치 용광로를 뱃고동으로 삼은 거대한 배처럼 보였다.
저거너트는 둔중하게 땅 위에 내려앉았다. 운 나쁘게도 그 앞에 있던 울타리가 우지끈 부러졌으나, 그 누구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퀴만 해도 3m가 넘는 거대한 탈것 앞에서 울타리 따위는 돌부리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싸우지 않기를 바라.”
페루가 그 위를 걸어 올라갔다. 오르는 계단 앞에서 뒤돌아본 페루는 뒤를 돌아보았다.
“…타. 안내할게.”
마다할 이유가 없다. 우리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저거너트에 올라탔다….
와중에 힐데가 갑자기 떠오른 듯이 물었다.
“잠깐만요. ‘저희’ 캐터프랙트는요?”
“이게 훨씬 좋아 보이는데 두고 가죠?”
“무슨 소리예요! 군국의 캐터프랙트는 가장 기술적이고 뛰어난 전천후 탈것이에요! 쓸데없이 큰 저거너트보다 경제적이고 조용하고 평범한 병사들도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군국 기술력의 정수라고요!”
“미안해요, 힐데. 하지만 한 번 저거너트를 탄 이상… 그딴 보잘것없는 탈것 따위, 성에 차지 않아서.”
“이래서 안 돼! 남자들은 크고 거창한 게 제일인 줄 안다니까요!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되지!”
“캐터프랙트 이전에 아지 개썰매가 있었는데요. 따지고 보면 그게 가장 먼저 생긴 탈것인데.”
“멍! 다신 안 해! 힘들어!”
아지가 질린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개썰매가 힘들다기보다, 그 뒤에 매달린 내 안전을 신경 쓰기 힘들다는 뜻이겠지만. 앞으로는 개썰매 타기 힘들겠는걸.
그때 이야기를 듣던 페루가 갑판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져 와. 실을 공간 있어.”
“저 제안, 왠지 마음에 안 들어요! 마치 저거너트는 ‘제’ 캐터프랙트를 싣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것 같잖아요!”
“힐데가 직접 그 말 하기 전까지는 순수한 의도로 한 제안이었을 걸요.”
“그래서 더 싫어! 차라리 자랑질이라도 하라고요!”
왜 이렇게 투정이야. 열국에게 비교당하는 게 싫은 거야? 에휴, 사실 누구보다도 군국을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니까.
어, 잠깐.
“잠깐만요, 힐데. 그보다 캐터프랙트를 어디 세워놨었죠?”
“그야, 울타리 바깥에…. 어라.”
힐데는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짓밟힌 울타리 아래 무언가 낯익은 광경이 보였다. 처참하게 부서져서 튕겨나간 낯익은 기계장치도 역시.
군국 1패 적립.
페루의 저거너트, 황금함. 모래의 바다를 항해하는 무한궤도의 성은 고요하게 열국의 땅을 나아갔다.
거센 바람이 불어도 강철의 거체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윗덩이도 가볍게 지르밟고, 가파른 언덕도 부드럽게 올라간다. 황금함이라는 이름이 딱 무색하지 않다. 대양과는 달리 대지에 파도 따위는 치지 않기에, 황금함의 진격을 방해하는 건 없었다.
갑판 아래 있는 선실에서 지내게 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여행을 즐겼다. 티르는 의자에 앉아 황금함의 탑승감을 평가했다.
“부드럽고 조용하구나. 내가 탈것을 타고 있는지, 혹은 고아한 성에 앉아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근시일 본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경이로구나.”
표정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페루는 기쁜 듯이 대답했다.
“…치환 이동이라서.”
“치환 이동? 휴, 그게 무엇이냐?”
페루가 설명에 그다지 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티르는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나에게로 돌렸다. 내가 뭐 대답이 나오는 자판기인 줄 알아. 나도 인간이 모르는 건 모른다고.
뭐. 페루의 생각을 읽었으니 알긴 알지만.
“연금술에서 이론상 최강으로 내려오는 이상적인 이동방식이에요. 티르, 보통 빠르게 가고 싶을 때는 앞에 있는 물건이 방해물이잖아요? 맞부딪치는 바람이나 툭툭 걸리는 돌부리처럼요.”
“혹은 햇빛이거나.”
아니, 햇빛은 그 대상에 포함되진 않을 텐데. 어쨌건.
“만일 그런 방해물을 닿는 순간 연금술로 분해한다면, 앞을 가로막아야 할 방해물이 전혀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게 되겠죠? 아무런 방해도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흐음. 그렇겠구나.”
“네. 거기다 그렇게 분해한 방해물을 지나친 후에 다시 원상복구 시킨다면, 오히려 방해물이 등을 밀어주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겠죠? 겸사겸사 분해하는 데 썼던 마력도 회수하고요.”
이것이야말로 한 천재가 떠올린 연금술 기반의 기술. 치환 이동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티르는 개념을 이해하고는 손뼉을 짝 쳤다.
“그 말대로라면, 맨땅에서도 순풍이 부는 것처럼 나아갈 수 있겠구나!”
“이론상으로는 땅속에서도 산책하듯 지나다닐 수 있어요. 어디까지나 ‘이론상’이지만요.”
세상 여느 곳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론상 가능이라는 말은 사실상 불가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게 말처럼 되었으면 전설로 내려오지 않았겠지.
“실제로는 장애물을 연금술로 분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제대로 분해하지 못하면 그 마력 찌꺼기도 장애물이 되고, 아무리 열심히 재구성한들 소모한 마력을 100% 효율로 되돌려받을 수도 없으니까요. 불가능에 가까워요.”
“가깝다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뜻이겠지?”
“소문으로는 땅 밑을 치환 이동으로 다니는 승냥이들도 있다곤 들었어요. 승냥이 대신 두더지라는 이름을 쓴다나. 하지만 이론에 비해 너무 느려터져서 잠든 상대를 기습할 때 아니면 쓰지도 못한다고 해요. 인간의 몸으로도 그런데, 그걸 어떻게 장치로 만들겠어요? 절대 안 되죠.”
내가 단언하자 티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했다잖느냐.”
“어라?”
그러네. 어떻게 했대?
고유마도가 있다고 한들 물질을 붕괴시키는 힘. 연금술과 같은 보편적인 기술이 아니고, 오직 페루만이 가진 아주 제한적인 능력일 뿐이다. 그 능력을 활용해서 이토록 커다란 저거너트에 적용한다고…?
뭐라 설명할 길이 없네. 같은 인간 맞아? 인간의 왕인 나도 짐작 못하겠는데, 도대체 무슨 괴물이야.
“이 또한 황금경의 위엄이겠지요.”
“…음.”
와중에 내 말을 들은 페루는 작게 콧김을 뿜으며 만족스러워했다. 딱히 널 칭찬한 거 아닌데, 왜 으쓱거리는 거야? 황금경과 하나가 되었어? 황금경을 향한 칭찬은 너에 대한 칭찬으로 간주하는 거야?
“씨이! 이건 사기예요!”
또, 또 그 와중에 열국에 대한 칭찬을 군국에 대한 모독이자, 자기 자신을 향한 모독으로 듣는 사람이 하나 있네. 힐데는 발을 쾅쾅 구르며 불만을 표했다.
“이들은 저거너트의 구조도 몰라요.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요! 그냥 황금경이 준 거니까 쓰고 있을 뿐이라고요! 군국의 캐터프랙트와는 달리, 저거너트에는 피와 땀과 노력이 없어요!”
“…이 또한, 황금경의 위엄.”
너, 그 말 마음에 들었구나. 곧장 써먹네.
약이 바짝 오른 힐데가 투덜거렸다.
“잘났어, 정말!”
쾅. 힐데는 약간의 불만을 기공에 섞어 발을 굴렀다. 파괴적인 의도가 다분한 발길질이었으나, 저거너트는 망가지기는커녕 조금도 찌그러지지 않았다.
이 또한 황금경의 위엄이겠지. 암.
“체엣! 안 되겠어요. ‘저’도 군국의 위엄을 보여주지 않으면!”
“군국에서 보여줄 게 있던가요? 설마 제식기공 시연 같은 건 아니겠죠? 혹시나 해서 충고하는데, 그거 자랑거리 아니에요. 하면 할수록 국격 떨어집니다.”
“흥, ‘제’가 늙다리 장성인 줄 아세요? 그럴 리 없잖아요! 아버님은 입 다물고 계세요!”
씩씩거리던 힐데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위를 가리켰다.
“아, 맞다. 페루, 갑판에서 아지가 말 뒤를 쫓고 있던데요?”
“…아.”
페루의 말 아우레아는 갑판 위에 만들어진 작은 밭에서 풀을 뜯고 지낸다. 지금까지 아우레아는 움직이는 땅 위에서 편안하고 쾌적한 생활을 했겠지만, 아지가 있는 지금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아지는 틈날 때마다 말을 몰며 좌우로 짖으며 길을 들이려고 했다. 겁 많은 아우레아는 구슬프게 울부짖었고, 페루는 그때마다 올라가서 아지를 떼어내야 했다. 누가 뭐래도 인간 말은 꽤 잘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