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46화 (346/384)

그러나 인간 중 그 누구도 감탄하지 않았다. 음식에 관심이 없는 티르를 제외하고도, 페루는 식재보다 회귀자가 했던 말에 더 관심을 보였다.

“…열국에서 난?”

회귀자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응. 그건 우리가 먹으면 안 되잖아?”

“…무슨, 뜻이야?”

페루의 물음에는 글자 이상의 것이 담겨있었다.

열국에서 난 식자재는 저급해서 못 먹겠다, 그래서였다면 페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을 것이다.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회귀자의 말투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열국이 저주받은 것처럼…. 애초에 먹을 수 없는 것을 논하는 듯했으니까.

당연히, 그건 회귀자가 열국을 무시하거나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었기에.

“열국에서 난 음식은 안 먹는 게 좋잖아. 황금경이 만들어낸 모든 작물은 호문쿨루스니까.”

“….”

회귀자의 입에서 열국의 은밀한 치부가 줄줄 새어 나왔다. 페루는 차마 회귀자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조차 못 했다.

당연히 그럴 거다. 같은 일행인 우리조차 모를 거라고 상상도 못 할 테니까.

“호문쿨루스의 딜레마에 의해 인간을 직접 만들 순 없었지. 하지만 열국의 모든 것은 다 황금경이 만들어낸 인공물인 탓에, 그것에 노출된 열국인들 몸에 기형이 생기잖아? 조금 먹는 거야 상관없겠지만, 황금경을 만나기 전엔 되도록 입에 안 대고 싶은데.”

‘내 몸의 일부가 황금경의 작품으로 채워지면, 그를 직접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니, 회귀자. 그거 열국의 가장 거대한 기밀 아니냐. 왜 시사 상식처럼 이야기하는 거야? 모든 사람이 너처럼 온갖 기밀을 알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놀라잖아.

경악한 페루는 우리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군국은, 거기까지 알아…?”

아니, 몰라. 힐데는 물론이고 나도 처음 안 사실이야.

심지어 회주인 페루조차도, 그 작물까지 호문쿨루스라는 건 모르고 있었으니까!

“글쎄요~? 기밀이라서~.”

힐데는 아는 척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눈짓으로 나를 불렀다.

‘전혀 몰랐는데요? 뜻밖이에요. 도대체 여기서 금기가 왜 튀어나오죠? 아버님, 혹시 아시나요?’

아니, 나도 몰랐어. 정확히는 회귀자가 오늘 말하기 전까지도 그런 생각은 읽지 못했어. 페루의 생각을 읽고 황금경과 호문쿨루스에 대한 내용은 대충 알았지만….

네게 말한 건 페루도 모르고 있었다고! 열국의 기형이 황금경이 만든 호문쿨루스 농작물 때문이라니?! 그토록 중요한 사실은 미리미리 생각해두라고. 미리 읽고 대비할 수 있게!

그러나저러나, 회귀자는 이런 반응이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왜? 회주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내가 안다고 해도 이상할 일 없지.”

“…어떤, 회주가… 그런 치부를, 외지인에게.”

“그건 못 말해주고.”

‘이전 회차, 클라우디아의 우레회주에게 들었지. 이번 회차에서 들은 건 아니라 밝힐 수는 없지만.’

우레회주라면 클라우디아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가장 위대한 회주잖아? 칫, 독심술로 잔녹회주 생각을 읽으면 뭐해. 저 인간은 이전 회차에서 훨씬 대단한 비밀을 많이 알고 왔는데!

군국에서만 있다 보니까 잊고 있었다. 회귀자, 이 여자는 군국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었지만…. 사실, 군국도 회귀자에게는 거쳐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군국은 따지자면 첫 번째 스테이지. 회귀자 입장에서 가장 먼저 올려야 할 주춧돌. 앞으로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라도 완벽하게 해낼 필요는 있지만, 단순히 쌓아 올리기는 가장 쉬운 단계.

죄악의 왕까지 도달하기 위한 길은 아득히 멀고 험난하다. 군국에서 마주쳤던 것과는 격이 다른 방해물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마신, 금기, 그리고 성황청과 만물의 영장까지.

그리고 아마 그 대부분이… 나와 겹칠 텐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페루가 더욱 긴장하며 말했다.

“…그럼. 알겠지. 열폭회주가 왜 필사적이었는지.”

“응?”

“…열국은, 황금경께서 발을 들이시지 않는 땅을 원해. 클라우디아처럼, 정주(停住)할 수 있는.”

안개 산맥에 만들어진 클라우디아는 황금경의 발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은 황금경의 연금으로부터 안전하며, 열국에서 정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땅이다.

따라서 클라우디아는 열국에서 가장 중요한 땅이다. 황금궁은 땅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에 가까우니까. 가장 번성한 도시인 클라우디아야 말로 열국의 핵심이다.

“…무저갱은 만물을 삼키는 구멍. 황금경께선 그곳으로는 가지 않으셔. 따라서, 만일 그 땅을 얻는다면. 두 번째 클라우디아가 돼.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전히 설명이 부족하다. 페루의 말로는 만족하지 못한 티르가 호기심을 보이며 내게 물었다.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이 나라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장소도 정해져있다는 말이냐?”

“그건 아닌데, 열국인은 아이가 생기면 열 살이 되기 전까지 클라우디아에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거든요. 클라우디아에서는 돈을 잘 벌지는 못하지만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죠. 그래서 승냥이 생활 중 크게 다친 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게 배우자를 찾기라고 해요. 아이가 생기면 다 자라기 전까진 휴양할 수 있으니까.”

“만일 휴양을 원치 않으면?”

“그러면 휴양을 원하는 이에게 판다고 하네요. 그래서인지 신생아 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진다고 해요.”

이건 비밀도 뭣도 아니고, 군국의 역사 시간에도 배우는 내용이다. 군국을 제외한 타국을 하루 살아가는 것도 힘든 구제불능의 나라로 폄하하는 경향만 빼면 대체로 사실이라, 나름 양심적이네~하고 넘어가곤 했는데.

“여기까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금 전 셰이 씨가 한 말을 생각할 때. 클라우디아의 우레회주가 아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도 금기에 닿아있기 때문이겠지.

내 예상대로, 회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릴 때부터 황금경이 만들어낸 식량을 먹고 자라면, 그 육체는 호문쿨루스가 될 거거든. 우레회주는 열국인 전원이 그의 호문쿨루스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런 규칙을 만든 거야. 클라우디아의 식량은 호문쿨루스가 아니라 정상적인 거니까.”

인간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네 가지 금기.

탐식. 접목. 교접. 사교.

여기서 열국은, 분류하자면 2종 금기를 재현한 듯한 나라다.

2종 금기, 접목.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다른 무언가로 대신하는 금기. 나라 전체가 황금경의 부산물인 이 열국은 2종 금기를 정면으로 위배한다. 기형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열국에서는 부족한 몸뚱이를 연금술로 메워야 하니까. 거기다 호문쿨루스는 2종 금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고.

성황청이 이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지만, 황금경은 살아있는 마신. 섣불리 손대지 못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흐음.

우레회주가 정한 규칙이 본능적으로 터득한 지혜인지, 아니면 성황청이 무슨 수를 쓴 건지. 한 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네.

쳇. 이러면 꼼짝없이 회귀자를 따라가게 생겼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손절하고 하차할 생각이었는데….

어수선함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페루는 열국을 대신하여 말했다.

“…열국은 그 땅이 필요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야.”

“헤에. 그거 말도 안 되는 일인 거 아시죠? 그쪽에게 어떤 사정이 있든 ‘제’ 알 바 아니거든요?”

열국 입장 대변이 끝나자, 군국 대변인인 힐데가 발끈해서 말했다.

“원했다면 ‘저희’ 군국처럼 돈, 시간, 인력과 자원 갈아가면서 무저갱을 없애려고 시도하던가. 물건 잃어버릴까 봐 접근하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숟가락 얹겠다? 어림도 없는 소리죠!”

“…인정해.”

“네?”

“…그래서, 너희를 안내하는 거야. 황금궁으로.”

페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힐데가 할 말이 없어졌다. 힐데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궁시렁거렸다.

“그걸 냉큼 인정하면 어떻게 해요? 괜히 발끈한 ‘저’만 속 좁은 사람이 되었잖아요!”

“힐데 속이 좁긴 한 것 같은데요.”

“아버님이 확인해봤어요?! 확인해 봤냐구요!”

확인해야 아나. 척 보면 보이지.

힐데가 다시 발끈하며 외치는 동안, 페루는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인정해도. 황금궁은 다를지도….”

저거너트 안에 있어서 그럴까, 시간은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바르게 흘러갔다. 대충 저녁을 때우고 정리를 끝마치니 어느덧 날이 어둑해져있었다. 요란스러운 캐터프랙트 위에서는 시간이 왜 이리 안 가나 했는데, 저거너트에서는 눈 깜짝하니까 밤이다. 시간도 탈것을 타는 모양이다.

그 오랜 시간동안 저거너트는 쉬지 않고 달렸다. 조금 느려지려고 하면 페루는 창고에서 새카만 강철을 꺼내 고로에 던져넣었고, 그럴 때마다 저거너트는 채찍에 맞은 것처럼 박차를 가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저거너트는 회주의 능력으로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이거 밤에도 움직이나요?”

“…연료를 많이 넣으면.”

그게 어떻게 되는 건지 신기하지만 원리는 페루도 모른다. 이걸 만든 사람은 황금경이기 때문이다.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배도 든든히 채우고, 오랜만에 몸도 깨끗이 씻은 다음. 잘 곳을 찾는 나에게 페루가 말했다.

“…방. 저기.”

페루는 창고로 쓰던 방을 가리켰다. 대강 정리된 방에는 침대 두 개가 단출하게 놓여 있었다. 사생활을 지키기는커녕 생활조차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좁아 보인다.

내가 인상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저기. 손님 된 입장에서 너무 까다롭게 굴고 싶진 않지만, 왜 하필 제가 저 구석진 방에서 자야 하죠? 아지나 티르와는 달리 저는 생활감이 필요한 인간이라고요.”

“…달리 수가 없어.”

‘…침상 둘 공간이 부족하니. 남자 둘을 창고에 두는 수밖에.’

온전히 나 혼자 잘 수 있다면 그건 나름대로 만족이지만, 심지어 그것도 아니잖아. 하필이면 룸메이트가….

“엥? 왜 내가 쟤랑 같은 방인데!”

남장한 회귀자라니. 진짜 위험하다고.

잠결에 다가가기라도 했다간…. 천반경으로 반격당해 잠에서 깨지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셰이 씨가 왜 까다롭게 굴어요? 도리어 셰이 씨와 함께 자는 제 신변이 더욱 위험하거든요!”

“네가 위험할 게 어딨다고!”

‘같은 방을 쓰면 내 쪽이 훨씬 위험하잖아! 정체가 드러날까 봐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한다고! 치잇. 언제까지 남자 취급받으면서 살아야…!’

뭐가 위험해? 애도 아니고, 고작 이성과 같은 방에서 잔다고 위기감을 느껴? 같은 침대라면 모를까 방은 너무 나갔잖아. 그럴 거면 애초에 남장하지 말던가.

“저는 셰이 씨가 엄한 생각을 했을 때 저항할 힘이 없잖아요! 밀실에서 단둘이 두면 제가 어떤 꼴을 당할 줄 알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래! 너한테 엄한 생각 한 적 없거든! 애초에 난!”

“난, 뭐요?”

‘아예 내가 여자라는 걸 밝혀버릴…! 후우. 진정해. 아직 일러. 공국의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남자로 있는 게 유리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성녀라고 오해받기라도 하면… 공국과 티르칸쟈카가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르니까.’

회귀자는 솟아오르는 충동을 가라앉혔다.

미래를 아는 힘은 성녀의 것이다. 그러니 회귀자는 성녀로 오해받은 적이 많은 모양이다. 꽤 많은 경우 성녀로 오해받는 건 득이 되지만… 티르와 함께 있는 지금은 아니겠지.

회귀자도 나름의 작전이 있구나. 과연, 성녀로 ‘오해’받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번에도 제가 깨우려고 하니까 냅다 제 목 날릴 뻔했잖아요? 그래 놓고 뻔뻔하게 하는 말이, 자기가 잘 때 건드리지 말래. 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 어쩔 수 없잖아! 여행자는 잘 때 자기를 지켜야 할 수단 정도는 마련해야 한다고!”

“자기를 지키는 선에서 끝나면 아무 말 안 하죠! 그게 친절하게 깨워주려는 사람 목을 정확히 겨누니까 문제지!”

“안 잘랐잖아!”

“잘랐으면 당신은 살인자야! 안 잘랐다고 뻗대지 말고, 내가 안 잘려준 걸 고맙게 여겨!”

옥신각신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 문밖에서 짧은 단발을 한 소년이 걸어들어왔다.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곱상한 외모를 지닌 소년이 키득거리며 말을 걸었다.

“아이, 참. 셰이도 아까운 줄 모르네요~. 아버님과 같이 자는 게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데.”

회귀자는 힐데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지금 힐데는 회귀자를 닮았다. 목이 다 드러나는 짧은 단발 아래 드러난 날카로운 눈매는 회귀자의 것과 꼭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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