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가 허공에다 대고 물었지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페루만이 할 수 있다. 자연스레 시선이 페루에게로 모였다.
“…아마도.”
시선을 받은 페루는 느릿하게 창가로 걸어갔다.
황금함에는 조그만 창이 나 있었는데, 그마저도 티르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두꺼운 커튼이 쳐진 상태였다. 페루는 커튼을 살짝 걷어 올려서 바깥의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까워졌어.”
페루가 말이 짧은 편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 열국에서 가까워질 곳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황금경이겠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선실을 나섰다. 좁은 계단을 올라 갑판을 디디고 선 뒤, 쏟아지는 햇살에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좁은 갑판 한쪽에는 아우레아가 흥분해서 씩씩거리고 있다. 페루가 아우레아를 돌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뱃머리로 다가갔다. 황금함의 수평선에 가려졌던 풍경이 점차 드러났다.
“지금까지는 선실 안에 처박혀 있어서 몰랐는데. 풍경이 상당히 바뀌었군요?”
이윽고 뱃머리에 도착한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시야 한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이 있었다. 사람을 담그면 정수리 끝까지 잠길 정도로 키 큰 옥수수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수확하려고 했는지 가장자리 옥수수밭은 파헤쳐져 있었으나 전체 크기에 비하면 발톱 한 조각 정도에 불과했다. 이 옥수수를 다 모은다면 열국은 몇 년간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옥수수의 바다는 어딘가를 기점으로 뚝 끊겼다.
돌로 된 작은 벽을 넘으면 그 안에는 도심이 펼쳐져 있다. 반석부터 지붕까지 전부 새하얀 돌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도시였다. 건물을 가로질러 흐르는 상수도부터 굽어지며 이어진 길.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하고 웅장한 궁궐까지. 분명 위대한 문명이 남긴 역사적인 도시가 틀림없다….
“여기가 황금궁은 아니겠죠?”
“…응.”
“그렇다면 황금경이 만든 것이겠네요. 이 밭도, 저 도시도.”
…이곳이 열국만 아니었다면.
다시 보니까 이질감이 느껴진다. 무엇인지 딱히 찾을 필요도 없다. 도시 옆에 버젓이 있는 옥수수밭부터 충분히 이질적이었으니까.
“계획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도시군요. 물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저 크기의 밭을, 그것도 이토록 커다란 도시 바로 옆에 지어? 몇 주만 지나도 밭은 말라비틀어지고, 도시는 질병과 벌레의 온상이 되겠군요. 도시가 아깝다.”
내가 중얼거리자, 도시 쪽을 주의 깊게 살피던 힐데가 한마디 거들었다.
“글쎄요~? 도시도 그다지 아까워 보이지 않는걸요? 겉으로는 화려하고 웅장해 보이지만, 미적감각이 완전히 꽝이에요, 꽝. 차라리 군국이 더 아름답겠어요!”
“제가 예술 쪽은 잘 모르지만 군국보다 나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요. 네모블럭 쌓은 나라보단 여기가 낫지 않나요?”
“아버님도 미적감각이 완전 꽝이네요! 이 불쾌함을 못 느끼시겠다고요?”
미적감각? 먹지도 못할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아름다움이라는 건 너무 주관적인 개념이라서, 마음을 읽는 나는 오히려 그 기준이 없단 말이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보편적이라면 모를까.
“힌트를 드릴게요. 기둥을 보세요. 그러면 아실 거예요!”
나는 힐데가 말한 것처럼 도시에 있는 기둥에 집중했다.
신전 기둥. 다리 기둥. 그리고 건물 기둥. 각자 떠받치는 게 다르면 만드는 사람도 다르기 마련이고, 그러면 자연히 만들어지는 방식도 달라진다. 유행하는 양식이야 있겠지만 그것도 다 다르기 마련이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인간이 재현하는 과정은 전부 다르니까.
그런데 이 도시는 그렇지 않았다.
똑같다. 다리 기둥도, 신전 기둥도. 건물 기둥도. 혹은 길가를 장식하기 위해 놓인 기둥마저도 비슷비슷하다.
크기와 두께, 그리고 사소한 패턴의 변화는 있지만… 같은 뿌리가 아니라, 같은 가지에서 뻗어 나온 듯했다.
“안 들을 때는 괜찮았는데 듣고 보니까 조금 신경이 쓰이네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벽돌의 무늬. 쌓는 방식. 건물의 배치. 구획의 형태. 전부 똑같아요.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야. 진부하다 못해 기괴할 정도로.”
이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걸 보는 거야? 남들이 도시와 옥수수밭을 보고 있을 때 홀로 도시의 기둥이나 무늬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네. 관찰력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약간 음침하다고 해야 하나.
변신술사의 관찰력이야 어쨌건 들을 때마다 불편함이 더해간다. 힐데의 마음을 읽어서 생긴 ‘지식’ 자체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힐데가 지적한 부분을 알아차릴 때마다 내 감각이 불편함을 고하고 있다.
말로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싫은 게 있다. 이 도시가 그랬다. 화려하고 찬란하며 웅장하지만, 볼 때마다 시야 한구석에 모자이크가 낀다.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하기 어렵다. 작은 블록이 큰 건물과 똑같아 보인다. 마치 잎사귀가 전부 모자이크로 된 숲을 보는 듯하다.
사실 미적감각도 이런 본능의 연장선이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쩔 수 없잖아요? 이 도시는 황금경이 혼자 만들었으니까요.”
황금경의 힘은 신적인 것이지만, 그가 만든 세상은 어디까지나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다. 황금경은 세상 만물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세상 만물을 알지는 못했기에.
달리 말해, 이 도시에서 보이는 문제점은 황금경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증거인 셈이다. 힐데는 그 사실을 발견하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황금경이 대단한 연금술사일지는 몰라도, 대단한 예술가는 되지 못한 모양이네요~.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나 보죠? 쿡쿡.”
세상에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딨겠어. 황금경도 인간이라는 거지 뭐.
그렇지만 힐데의 비웃는 태도는 페루를 기분 나쁘게 했다. 페루가 살짝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하죠? 황금궁까지 가야 하는… 아.”
우리가 왜 밖으로 나왔더라. 황금함이 갑자기 멈춘 바람에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고 나온 거였지? 풍경을 구경하느라 깜빡했다.
“…아래를 봐.”
페루가 선미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풍경을 보느라 정작 발밑을 신경 쓰지 못했던 우리는 이제야 아래를 보았다.
황금함은 선수가 들린 채 헛돌고 있었다.
양옆에 거대한 피스톤을 매단 리프트가 있었다. 그게 황금함의 아래쪽을 파고들어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땅에서 바퀴가 떨어진 바람에 무한궤도는 애처롭게 허공만 긁었다.
아무리 치환 이동 방식이 선진적이라고 해도 땅을 디디고 움직이는 종류다. 공중에 떠 있다면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까 저거너트를 들어올리면 저거너트를 막을 수 있다…. 그건 상식적인 범위의 일이다.
다만. 그 대상이 비상적이잖아.
“이 커다란 쇳덩어리를 들어 올렸다고?”
저거너트가 왜 저거너트냐. 어지간한 건물도 내려다보는 초거대 쇳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황금경만이 설계하며 창조할 수 있는 기계장치가 들어있고, 그걸 보호하기 위해 황금경이 친히 연금한 초중량 초강도의 연금강이 둘러싸고 있다.
무거운 건 당연하고 강도마저도 세상에 비할 물질이 없으니, 아무리 강력한 리프트라도 들어 올리기는커녕 역으로 주저앉기 마련일 텐데.
저 리프트, 강도도 강도지만… 피스톤이 내는 힘도 경이롭다. 어중간한 능력으로는 불가능해. 저것도 혹시.
“…아틀라스 위니. 억압회주의 장비야.”
페루가 그 의문에 답했다.
“…황금함을 막았어. 도시가 부서질까 봐, 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황금함의 옆쪽으로 탈것을 탄 승냥이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시에 사람이 안 보인다 했더니만 황금함을 보고 이미 도망친 상태였나.
“뭐, 저쪽 입장에서는 웬 미친 쇳덩어리가 폭주해서 도시를 들이박으려는 것처럼 보였겠네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우회하죠?”
“…아니. 다 왔어.”
페루는 황금함을 멈추었다. 그녀가 능력을 거두자, 뱃고동이 작게 울리며 엔진의 정지를 알려왔다. 맹렬하게 헛돌던 무한궤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함은 동력을 잃고 차갑게 식었다.
푸쉬이익.
그에 화답하듯, 아래 피스톤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몸이 가벼워진다 싶더니 황금함이 크게 기우뚱거리며 쿵 주저앉았다. 리프트도 작동을 멈춘 것이다.
강철 거수의 격돌은 그것으로 끝났다. 세상이 잠시 조용해진 느낌이다. 공허한 고요 속에서 페루가 말했다.
“…억압회주는 황금궁의 최측근. 그의 근처에는 황금궁이 있어. 도착한 거야.”
황금함의 해치가 내려갔다. 밖으로 나와 보니, 바로 앞에 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보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무릎 아래가 없는 채로 서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섭긴 한데, 너무 느닷없어서 약간 당혹스럽다. 불쌍함을 어필하려는 건지, 아니면 무섭게 보이려고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뭐라 반응을 하기도 전.
“큭큭큭! 얼빠진 표정 보는 건 언제나 즐겁군!”
노인은 장난스럽게 웃더니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치이이익. 바람 들어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몸이 불쑥 솟아올랐다. 어느덧 나와 같은 눈높이를 갖게 된 노인은 호쾌하게 웃었다.
없는 건 무릎 아래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하반신 아래가 통째로 없었다. 대신 다리에 피스톤을 붙여서 걸어 다녔다.
억압회주 헥토. 피스톤을 제 몸처럼 다루는 열국의 회주는 관절에서 푸쉬식 소리를 내며 반갑게 걸어왔다.
“오랜만이네, 잔녹. 과격하게 멈추게 해서 미안하네. 일하는 중이라 보고를 늦게 받았어. 그래도 자네는 이해하리라 믿네.”
“미안하다고 하면 다입니까?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찻물을 다 쏟았잖아요.”
다들 반응한 와중에 나 혼자만 치태를 보였다고. 내 정신적 피해보상 어떻게 할 거야. 내가 투덜거리자 헥토는 어쩌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쩌나? 바위와 강철을 분해하며 질주하는 쇄금선(碎金船)이 농지를 짓밟으려 하는데. 미안하다고 말했던 건 마음에도 없이 예의를 차린 거지, 옥수수밭을 짓밟기라도 했다면 아예 뒤집어버렸을 걸세.”
대답이 너무 호탕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지금껏 대화를 나눈 열국 출신이 톱니바퀴 성애자에, 다혈질에,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다다. 귀납적인 원리에 의해 다음 회주도 비정상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냅다 리프트로 황금함을 들어버리기까지 했으니 적이거나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말을 잘하잖아?
“뭐야. 왜 정상인 같지.”
아차. 본심이.
“큭큭큭! 이 나라에서는 내가 이상한 편이지! 한 명 정도는 나 같은 정상인이 있어야 나라가 돌아가지 않겠나!”
진짜 이상하네. 내 말도 그냥 농담으로 치부하고 웃어남긴다고? 이게 열국인?
이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돼. 다리 없는 사람 성격이 이리 좋잖아.
친절하게 대답한 헥토는 지팡이를 꺼내 길게 늘여서 땅을 짚었다. 균형을 맞춘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페루에게 물었다.
“자. 어쨌든. 볼일이 없다면 우회해서 지나가면 될 것을, 내린 걸 보면 다른 목적이 있나 보군. 나이가 들어서 오래 서 있기 힘드니 이제 슬슬 용건을 말해주지 않겠나?”
회귀자가 페루를 제치고 나서서 말했다.
“우리는 군국에서 온 평화 사절이야. 전쟁을 멈추고 협정하는 건으로 황금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몸쪽으로 꽉 찬 직구였다. 너무 솔직해서 오해의 여지가 없고, 그래서 믿기도 어려운 한마디였다.
억압회주 헥토도 잠시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믿음이 가지 않는지 의심스럽게 회귀자를 쳐다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신원을 보증할 수 있는 페루가 있었다는 점이다.
“정말인가, 잔녹?”
“…응.”
“혹 신분을 증명할 것이라도 있나?”
상식적인 절차지만 회귀자에게 그런 증명할 건 없다. 회귀자가 주저하는데 대신 힐데가 나섰다.
“신분을 증명할 건 있지만 그게 뭔지 알아보시겠어요? 대신이라면 대신이라지만, 막시밀리앵이 회주가 되지 못한 이유라도 알려드릴 수 있는데?”
“됐네. 군국에서 왔다는 건 사실 같으니. 애초에 황금경께 용건이 있지 않다면 어떤 바보가 잔녹회주의 저거너트에 올라타서 열국을 종단한단 말인가.”
납득한 헥토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평화 사절이라. 군국에서 먼저 보낼 줄은 몰랐군.”
그럴 만하지. 군국도 몰랐다. 회귀자가 아니었다면 평화사절이 아니라 군대를 보냈을 테니까.
이런 중대사를 쉽게 결론지을 수는 없다. 헥토는 밀짚모자를 벅벅 긁다가, 주위를 둘러싼 승냥이들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정치적인 의견을 꺼내기 좋지 않은 장소니. 잠깐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좋아. 안내해.”
회귀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헥토가 멈칫했다.
“함정일지도 모르는 땅에 그리 흔쾌히 발을 들이밀다니. 위기감을 느끼고 있진 않나? 평화 사절인 자네들이 사라지면 평화 자체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데.”
“해보던가.”
캬. 멋있다. 나는 언제쯤 저런 말 할 수 있을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도 저런 말은 못해.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수틀려서 진짜 해버리는 경우가 있거든. 회귀자처럼 폭발 한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