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 말 그대로 나에게 있어서는 천재지변과 같은 일.
그렇지만 직접 경고하러 찾아왔다는 것은… 확신해도 되겠지?
황금경도 마신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을 곱씹던 나는 태연하게 다시 거리를 걸었다. 누가 혼란을 흩뿌리면 죽이겠다고 경고했던 거 같지만 무슨 상관이람. 애초에 혼란이 뭔지 모르니까 뭐가 지뢰인지 모르잖아.
그때였다.
어둠이 일렁거렸다. 건물 그림자를 내달리며 달려온 형체가 붉은 눈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음산한 기운을 흩뿌리던 티르는 이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입술을 앙다물고 이곳에 있었던 무언가를 노려보는 티르는 솜털이 다 곤두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어라. 티르. 여기까진 웬일이에요? 햇빛이 싫다고 방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티르는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끔찍할 정도로 거슬리는 감각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더구나. 같은 대지에 발 디디고 살지 못할 기분이. 짓밟고 죽여, 그 피를 취하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휴, 이곳에서 무언가를 보지 못하였느냐?”
있었다. 조금 전에 성녀가 나에게 경고했었다. 만일 페르엘이 약간만 늦게 갔어도 성녀랑 시조랑 싸우면 누가 이겨? 하는 유치한 질문의 답을 오늘 확인했을 것이다.
흠. 궁금하긴 하지만… 그걸 확인하려고 몇 주간 둘이 싸우는 지루한 모습을 볼 순 없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시치미를 뗐다.
“지금은 저밖에 없는데, 그게 저는 아니죠?”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너나 다른 이들과는 종류부터 다른, 확연히 불쾌한 감각이었다. 정녕 아무것도 없었느냐?”
“잘 못 느꼈는데요. 누가 저를 축복이라도 하고 갔나? 어떻게 할까요? 티르가 어둠으로 좀 씻겨주실래요?”
“씨, 씻어?”
티르가 잠깐 머뭇거렸다. 왜 그래. 어둠 좀 두르는 게 어때서.
‘어둠은 나의 일부. 그걸로 몸을 씻겠다니…. 모르고 하는 말이겠지만, 조금 부끄럽구나.’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축복은 좋은 거잖아? 됐어요. 이대로 가죠.”
“가만히 있어보거라.”
어둠이 내 몸을 뒤덮듯이 휘몰아쳤다. 티르의 어둠은 바람처럼 별다른 촉감 없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지만, 방금 생각을 읽어서 그런지 뭔가 이상야릇한 느낌이었다. 느낌뿐이니까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어둠을 둘렀으니 잠시 ‘운명’의 눈을 가릴 수야 있겠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겠지.
시간을 끌 이유 없다. 바로 가자.
“티르. 우리 잠깐 산책이나 할까요? 햇빛은 싫겠지만 대신 양산 들어드릴게요.”
“무어라?”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흠칫거린 티르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 내키지는 않는다만, 네 체면을 보아 같이 가도록 해주마. 이끌어보거라.”
“기대하세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어드릴 테니까.”
“후후. 자신만만하구나. 도대체 무얼 보여주려고 그리 바람을 넣는 것이냐?”
손을 살포시 잡고 양산을 받아 들은 뒤, 티르의 곁에 선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옥수수밭이요.”
나무보다 갈대에 가까운 주제에 건방지게도 키를 한껏 키우고, 지력을 빨아들여 맺은 열매를 주머니에 꽁꽁 숨겨둔 옥수수는 분명 탐욕스러운 생물이다. 그걸 빼앗아 먹는 인간만큼은 아니겠지만.
옥수수밭에 다가가자 한 사내가 손을 들고 소리쳤다.
“거기, 멈춰라. 여기는 억압회주님의 드럼상회가 관리하고 있다. 이 이상 접근을 허락하지”
“아이고, 선생님.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옥수수 하나만 좀 가져가려고 그럽니다. 이토록 많은데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요?”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다. 그러나 사내는 내 실감나는 연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서리를 할 거라면 승냥이답게 외곽에서 찔끔찔끔 서리해라! 이 중심부는 드럼상회 이외의 인간이 접근할 수 없…!”
“식량을 독점하다니! 더러운 부르주아! 죽어라! 기절 찌르기!”
지척까지 접근한 나는 손날을 들어 목을 가격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그는 격하게 콜록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쿨럭! 커헉! 비겁하게…!”
어, 한 방에 쓰러지지 않았네. 번거롭게.
“기절 펀치! 참고로 저는 기절할 때까지 때립니다. 순순히 기절해주세요.”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머리를 후려쳤다. 누군가 호문쿨루스로 변하는 일을 막기 위해 명령받고 옥수수밭을 지키던 선량한 드럼상회의 경비병은 잇단 충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크헉…. 이 자식…. 두고봐라. 호흡을 좀 가다듬으면 모든 상회원을 불러 보아주마! 곱게는 못 나갈 줄 알아라!’
다 데리고 와. 원하던 바니까.
나는 우아하게 옥수수를 헤치며 길안내를 계속했다.
“티르, 가시죠.”
“휴. 아직 의식이 있는 것 같다만.”
“두세요. 이런 흉한 일에 고운 손을 쓰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후후. 맡기마.”
즐겁게 웃은 티르는 나를 따라 옥수수밭을 거닐었다. 옥수수 잎이 티르의 머리에 부딪치려고 할 때마다 슬쩍 치워서 점수를 땄다. 티르는 내 사소한 행동이 기꺼운지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하나 따 드릴까요?”
“먹지 못할 것이지만,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꾸나.”
옥수수를 꺾어 떼어내고 껍질을 여러 겹 벗긴다. 얇은 옷으로 애지중지 감싸 보았자 인간에게는 정복욕을 돋구는 가냘픈 저항일 뿐. 한 장 한 장 우악스럽게 뜯어내고 그 안에 숨겨진 속살을 꺼냈다.
알이 실하다. 옥수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풍작이로구나.”
“알이 터질 것 같네요. 어디. 맛이나 볼까요.”
갓 수확한 옥수수는 그냥 씹어도 단맛이 난다. 나는 황금경의 옥수수를 냅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맛도 기가 막히네. 군국의 키메라 콩과는 차원이 달라. 그건 실용성을 위해 맛을 포기했지만, 이건 양도 맛도 비할 바가 안 된다. 황금경의 저주만 없다면 말이지만.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 티르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조금은 괜찮아요. 지금 먹어봤자 소화되지도 않고, 애초에 외지인인 제 몸은 열국 바깥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괜찮다니까요.”
오히려 황금경과 조금이나마 공명하려면 먹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티르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앞에 둔 채 옥수수를 꼭꼭 씹어서 뱃속으로 넘겼다. 헤픈 위장은 방금 먹은 게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소화 과정에 돌입했다. 진정한 의미의 박애주의다.
꿀꺽 침을 삼킨 나는 솔직하게 감상을 표했다.
“맛있지만 빨리 먹어야겠는걸요. 옥수수는 수확하면 맛이 떨어진단 말이죠.”
“아직 수확하지 않았잖느냐.”
“수확한 셈이에요. 황금경은 연금술사. 이만큼의 옥수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재료가 필요하죠. 옥수수가 지력을 빨아먹어 작물을 맺듯, 황금경도 이 땅의 지력을 다 끌어다 썼을 거예요.”
흙은 완전히 말라 바스라져 있다. 척박하다 못해 죽어버린 땅이다. 마법은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을 가속하는 힘이며, 연금술은 물질을 변환하는 마법.
아마, 황금경은 옥수수가 몇 개월에 걸쳐 벌일 온갖 기작을 한순간에 발휘했으리라. 연금술로.
“아직 매달려있지만 사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것과 다름없어요. 물도 지력도 없는 이딴 땅에서는 키메라 콩조차도 안 자랄 테니까요.”
헥토가 이걸 모르진 않을 터. 얼른 수확해야 해도 모자를 판국에 아직 수확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알고 있다. 생각을 읽었으니까. 그가 하루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일 역시도.
티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존재구나. 황금경이란 도대체 무어란 말이더냐?”
“티르. 마신에 대해 아세요?”
뜻밖의 물음이었지만 티르는 반문하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던 티르는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대답했다.
“마신이라…. 들어본 적 있다. 성황청, 그것들이 기를 쓰고 없애려는 존재지.”
“보신 적은 없죠?”
“찾아본 적은 있다만, 정체를 짐작하기도 어렵더구나. 설명도 뜬구름을 잡은 듯 모호하고, 각자 하는 말이 다 다르니.”
“그러면 알려드릴게요. 마신은 위대한 이치에 닿은 신이에요.”
흐음,하고 티르는 작지만 확실하게 반응했다. 리액션이 크진 않지만 좋은 편이다. 말하는 보람이 있어.
“그리고 인간이기도 해요.”
이번에는 약간 놀랐지만 내 말을 가로막지 않고 경청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정말 설명해주기 좋은 사람이라니까.
“티르. 제가 전에 고유마도 말씀드렸죠? 고유마도는 자기 심상의 확장이에요.”
“알고 있다.”
“그렇지만 확장에는 두 가지 확장 방식이 있어요. 대상의 확장, 그리고 심상의 확장이에요.”
나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보통 심상이 물체, 혹은 그 물체의 기능에 관련된 것일 경우, 예를 들어서 막시밀리앵의 톱니바퀴처럼 특징적인 도구에 심상이 담길 때 대상의 확장이 일어나요. 적용 대상은 좁지만, 마도사는 그 대상이 가진 기능에 한해 강력한 지배력을 갖죠.”
이 경우는 적용 대상을 변질시키면 고유마도가 힘을 잃는다. 나는 막시밀리앵의 톱니바퀴 사이사이에 작은 톱니바퀴를 끼워서 그의 무기를 봉인하기도 했다.
오직 나에 한해서 그 대상에 접촉한다면 역이용할 수 있지만… 이 비루한 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상이 현상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반대에요. 일정 범위의 규칙을 뒤바꿀 때는 그 정도로 강력한 지배력은 발휘할 수 없어요. 대신 그가 지배하는 공간에 한해서는 규칙이 뒤바뀌죠. 모두에게 적용되게.”
로우켓이나 페루가 이 경우다. 로우켓은 일정 범위 이내의 강철을 폭발물로 바꾸고, 페루는 모든 물질의 붕괴를 가속한다. 원하는 대상만 직접 지정하긴 어렵다. 그들이 바꾸는 건 규칙이니까.
내 능력은 이때도 애매하다. 능력을 훔쳐 봤자 그 경향성을 살짝 더해줄 뿐 상쇄할 수는 없으니까.
“단, 어떤 고유마도라도 타인의 신체를 직접 뒤바꿀 수는 없어요. 타인의 몸은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소우주.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고유마도고, 기력은 그 소우주에 대한 완전한 보호를 약속하죠. 마력이 심상의 확장이라면 기공은 신체의 확장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고유마도라도 기공을 두른 갑옷, 무기에는 직접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워요.”
“옛 기사가 사악한 마법사와 대등하게 싸웠던 것도 그 때문이렷다.”
“네. 기공이 마법을 튕겨낸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에요.”
기공과 마법 ~심화편~ 강의. 보통 사람이라면 지루해할 법한 이론적인 내용에도 티르는 흥미로워했다.
역시 학생 중에서는 만학도가 최고야. 배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거든.
“타인의 신체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라…. 호문쿨루스 딜레마를 설명할 때 했던 말이구나.”
“정확히 기억하셨네요. 그래서 타인의 마력에 기대 변형될 수 있는 건 오직 죽은 사람뿐이라고 말한 거예요. 그걸로 죽지 않더라도, 그렇게 저항력을 상실한 신체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게 마신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마신은 그 한계를 극복한 존재이기도 하느냐?”
고개를 저었다. 마신에게 그런 사소한 건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물론 마신의 힘을 한 인간을 죽이는 데 쓰면 그런 결과를 만들 수 있겠지만, 그건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격… 아니, 단두대로 개미를 처형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뻘짓.
“그런데 어떤 고유마도가 있어요. 그 고유마도를 지닌 인간의 심상은 그 사람 고유의 것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관통하는 위대한 이치이기도 해요. 그러한 이치는 고유마도가 아니어도 본디 존재하기에, 그 힘은 이 세상과 공명해요.”
생사가 아니라, 그것을 가르는 기준을.
존엄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믿음을.
마신은 인간이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그 작은 소망을 짓밟는다.
“작용 대상은 세상 만물. 작용 범위는 우주 전체. 기한따윈 없어요. 설사 그가 죽는다고 해도. 왜냐면, 그의 생전에도 존재했으며 사후에도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