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전에 존재했던 것. 인간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
“그것이 마신. 신에 이른 마.”
위대한 진리 앞에서는 지상의 지배자라 자부하는 인간마저 흘러가는 바람일 뿐.
그리고… 진리 앞에서 인간은 새로운 난관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물음이에요. 인간 역시 이 세계의 일부라면…. 위대한 규칙을 따르는 세상 만물 중 하나라면?”
나는 옥수수밭을 헤치며 천천히 걸어갔다. 티르는 홀린 듯이 내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몇 번의 옥수수를 건너. 나는 보이지 않는 어떤 공간에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이곳이다.
황금경이 기거하는 황금궁은… 바로 이 옥수수밭이었다.
“육체란 뭘까요?”
내가 다음 옥수수를 걷어낸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빠르고 은밀한 기습이다. 나 혼자 왔다면 부지불식간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왜 티르를 데려왔겠냐. 인간으로부터 나를 보호한다는 점에 있어서 티르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료다.
아지는 나를 보호하긴 하지만 인간 상대로는 별로고, 회귀자는 인간 상대는 잘하는데 나를 보호하진 않으니.
새까만 양산 틈에서 어둠이 솟구쳤다. 나를 습격했던 그림자는 어둠에 휩싸여 땅에 처박혔다. 고개를 돌려보니 티르가 작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역시 든든해. 줄 잘 댔단 말이지.
“햇빛 있는데 어둠 써도 괜찮아요?”
“조금이라면 문제없다. 그늘진 곳이기도 하니.”
티르와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어둠에 휘감긴 습격자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고한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땅바닥에 처박힌 주제에 뭐가 그리 당당한지, 습격자는 동요 하나 없이 말했다.
“자신을 지키고 싶다면, 당장 뒤로 돌아 걸어라. 본 것은 잊고, 들은 것을 지우고 그대로 떠나. 다시는 찾을 생각 마라. 호기심이 너를 죽일 것이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호기심을 안 가질 수 있겠어.”
습격자는 두꺼운 로브로 몸을 감싼 채로 황금 가면을 쓰고 있다. 얼굴도 체형도 꼭꼭 감추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노력도 무색하게. 불룩하게 튀어나온 등은 로브 아래에서도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꼽추라. 내가 열국에서 본 꼽추는 한 명뿐인데 말이지.
천천히 다가간 나는 황금 가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분명 죽었을 터인 당신이 이렇게 살아있는데.”
딸칵. 잠금쇠를 풀고 황금 가면을 들어 올리며, 나는 그 아래 있을 얼굴의 주인을 불렀다.
“안 그래, 로드 로우켓?”
열폭회주 로우켓. 분명 캠프에서 힐데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열국의 회주가 눈앞에 있었다.
정체를 들킨 열폭회주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죽었나. 역시, 오래 살 팔자는 아니었군.”
“덕분에 그쪽이 호문쿨루스라는 사실은 확실해졌고요. 그렇다면 역시 이곳이 황금궁이라는 뜻이겠지?”
“알고도 황금궁에 접근하려 하는가? 목숨이 아깝지 않나? 아니.”
열폭회주는 땅에 처박힌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더럽혀질 영혼이, 모독당할 존엄이, 유린당할 존재가 두렵지 않나?”
“영혼이든 존엄이든 유일성이든 내 알 바 아니거든. 내가 아끼는 건 목숨밖에 없어.”
“대단하군.”
“뭘. 그쪽도 원본에 비하면 훨씬 점잖은데?”
오고 가는 덕담 속에서 정이 피어난다. 이런 정상적인 대화가 이어지다니. 정신 회까닥 돈 인간을 호문쿨루스로 만들면 멀쩡한 결과물이 튀어나오나.
비슷한 발견을 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바로 나타나주다니 운이 좋네. 덕분에 설명할 필요도 없어졌으니까.
“휴. 설마….”
한 번 죽었던 이가 눈앞에 있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티르는 드물게도 경악했다. 1200년을 살아와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놀라지 않지만, 눈앞에 드러난 진실은 그녀조차 놀라게 할 자격이 있었다.
“네 말뜻은, 황금경은, 인간을 창조할 수 있는 뜻이냐…?”
타당한 추측이고 정답에 근접했다. 하지만 황금경은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열폭회주를 가리켰다.
“진정한 의미로 인간을 창조하진 못해요. 만일 완벽하게 창조할 수 있다면 열폭회주를 본뜰 필요는 없을 거고, 정 본떴다면 원본과 같은 성격을 가졌겠죠.”
만일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면 황금경이 인간의 왕 해야지. 아니, 생각해보면 인간의 왕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왕을 넘어,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
그렇지만 황금경은 신의 경지까진 도달하지 못했다. 신이 되었다면 인간을 수집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최소한… 인간의 ‘몸’은 거의 완벽하게 창조했군요. 열폭회주, 그렇지?”
열폭회주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 아니다. 이상(理想)이다. 황금경께서 만드신 육신은 불완전한 인간은 결코 도달하지 못할 하나의 극한. 원본만 멀쩡했더라도, 이 육신에는 아무런 흠도 없었을 터다.”
“호오. 살과 피로 빚은 기계라는 거네. 그렇다면 황금경의 저주를 받은 작물도 마찬가지인가?”
“황금경께서 만든 작물은 저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의 작품은 '이상적'이라, 작물이면서 연금성까지 뛰어날 뿐.”
연금성이란 연금술에 반응하는 성질. 나무나 풀은 구조가 불규칙해서 연금성이 낮다고 알려져 있지만, 황금경이 만든 작물은 또 다른 모양이다.
그래서 황금경의 작물로 몸을 채운 이들은 황금경과 공명하게 되는 거였나.
“그리고… '몸'만이 아니다. 그게 황금경의 위대한 이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한 회주라면. 그 심상까지도.”
열폭회주가 그 말을 내뱉은 직후였다.
열폭회주의 전신에서 국소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열과 빛의 발산. 어둠이 터져나가며 열폭회주의 구속이 한순간 약해졌다. 그 틈으로 강철의 날개가 불쑥 솟아 올랐다.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열폭회주는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회주의 심상은 근본적으로 황금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유마도라고 해도 황금경에게는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일 뿐.”
로우켓의 저거너트, 용매. 그건 이전보다 훨씬 흉악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열폭회주는 용매 전체를 불꽃으로 수놓으며 우리를 향해 포효했다.
“나는 황금궁의 가디언!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한 채 죽어라…!”
쳇. 저 멍청이가. 자기가 진짜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 인간이었다면 생각을 읽어서 내가 고유마도를 훔쳤겠지.
하지만 나는 '저것'의 생각을 읽지 못한다. 고유마도도 훔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두어라.]
그때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불꽃을 흩뿌리며 달려들려고 했던 열폭회주는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황금회주…!”
그에 대답하듯, 황금회주라 불린 여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울렸다.
[오게 두어라. 황금경께서는 영감을 필요로 하신다.]
“큭…!”
얼굴을 일그러뜨린 열폭회주는 불꽃을 거뒀다. 추진력을 잃은 용매는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쿵, 하고 두 발로 땅에 착지한 열폭회주는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너희는…! 여기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잔류사념만 남았을 뿐이면서 우리를 배려한 건가? 시체 주제에.
우스워진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열폭회주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그럴 일 없어. 나는 죽기 전까진 후회할 일 없다니까?”
열폭회주는 나를 노려보다 다시 황금 가면을 썼다. 나는 돌아서는 열폭회주를 뒤로 한 채 황금궁으로 향했다.
이제 다 왔다. 느껴진다. 황금경. 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마신의 생각이.
***
세상 모든 부를 거머쥔 금국의 왕이자 세상 모든 지식과 기술을 익힌 강철의 왕 유리아 엘릭. 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손에 든 부채로 책상을 탁 내리쳤다.
세상 모든 기술을 재현하고 수많은 지식을 익힌 그녀는 지금 지독한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왕의 권능을 타고 난 그녀는 만들 수 없는 것 빼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가능과 불가능의 선이 분명히 보이는데 도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지를 헤치고 나아가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에게 세상은 진부하고 단조로운 교과서 같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매진하는 일이 있다면 제자를 키우는 것이었다.
인간은 혼돈을 간직한 생물. 무엇이든 이해하는 엘릭조차도 인간은 예측할 수 없다. 기술로는 발치에 미치지도 못하나, 제자들의 하잘것없는 상상력이나마 영감의 불씨가 된다. 다른 모든 엘릭과 마찬가지로, 유리아 엘릭 역시 수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그러나 요즘은 그마저도 시원찮았다.
시작은 엘릭이 장난삼아 낸 과제 때문이었다.
금편 한 닢으로 이 방을 가득 채우라.
지혜와 기지를 확인하는 시험이라고 널리 알려졌으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금편 하나를 종잣돈으로 삼아 굴리면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적어도 엘릭은 그랬다.
무엇보다 예리하며 무엇보다 튼튼한 검이라면 보통 검보다 몇 배는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몇 가지 금속을 특정한 비율로 조합하여 만들어 낸 합금은 전설의 금속으로 부르는 게 값이 된다.
엘릭이 가진 온갖 기예 중 극히 일부만 발휘해도 가능한 일이다.
엘릭은 그걸 원했다. 금편 한 닢을 최대한 불릴 수 있도록, 제자들이 모자란 머리를 짜내어 온갖 시도를 하기를 바랐다.
하나.
“촛불의 빛으로 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황금의 찬란함도 진짜 빛 앞에서는 무색하기 마련이니, 정녕 이 방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건 오직 빛뿐만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그런 잔꾀를 부렸다. 유치했지만, 수많은 실패작 사이에서 등장한 나름 참신한 대답이었기에 엘릭은 그를 크게 칭찬해주었다. 원하던 방향은 아니지만 이 역시 충분히 영감이 되었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횃불입니다!”
“향초입니다!”
“연기입니다!”
그러나 이후 모든 이들이 똑같은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게 정답이라도 된다는 듯이.
참신한 답도 반복되면 진부해진다. 하물며 그게 편법에 불과하다면 짜증만 날 뿐이다. 그래서 엘릭은 두 번째 문제를 준비했다.
“채운 것을 다시 금으로 바꿔오거라.”
그러면 다들 얼빠진 얼굴이 되어 머리를 쥐어뜯곤 했다.
깊은 뜻을 담고 낸 문제가 아니었다. 엘릭은 단지 심술을 부렸을 뿐이다. 빛이든 향이든 한 번 퍼뜨리면 가치를 잃으니, 감히 강철의 왕 앞에서 잔꾀를 부린 녀석들을 골려주고 싶었을 뿐.
엘릭의 계략은 정확히 들어맞아, 잔꾀를 부리던 이들이 점차 줄어들 무렵이었다.
“종입니다! 종소리로 이 방을 채웠습니다!”
소식이 늦었는지, 한 제자가 자그만 종을 들고 나타났다. 엘릭은 언제나처럼 두 번째 문제를 내렸다.
“이걸 금으로 바꾸어오라.”
“네, 네? 금으로 말입니까?”
제자는 크게 당황했다. 속내를 짐작한 엘릭은 크게 혀를 찼다.
장인 중에는 그런 이들이 있다. 물건을 사고 만들 줄은 알지만 팔 줄 모르는 이들. 기술에 능할지라도 장사에 재능이 없다면 평생 혹사당하다가 객사할 팔자다. 엘릭은 짐짓 인상을 쓰며 말했다.
“못하겠단 말이냐?”
“저, 저. 송구하오나. 도저히 짚이는 바가 없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왈칵 화가 치밀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