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55화 (355/384)

“아닌데요? 당신이 제 속에 들어갔나 나와 보셨어요?”

그게 되면 네가 인간의 왕 해야지. 내가 대놓고 뻗대자 헥토는 아무 말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때였다.

“되었다. 오게 두어라.”

마을회관의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황금을 녹인 듯한 찬란한 금발을 아깝게 꽁지머리로 묶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은 몸매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작업을 방해하지 않도록 없애둔 것처럼 보인다. 가죽 장갑을 끼고 발목까지 온 부츠를 신은 여인은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 파헤쳤다.

“당신이 황금경?”

“아니다. 하나, 너는 짐에게 말할 것이 있을 터이다.”

“나는 황금경에게 평화를 제안하러 왔는데? 그쪽이 누군 줄 알고?”

그러나 여인은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자기를 소개했다.

“짐은 황금회주 유리아 엘릭. 금국을 지배하는 이해의 군주.”

금국의 지배자이자, 세상 모든 기술을 재현하는 권능을 지닌 군주.

그리고 이해의 괴물에게 ‘잡아먹힌’ 왕.

“또한, 열국을 다스리는… 황금궁이다.”

엘릭 왕의 호문쿨루스는 의연하게 말했다.

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건 저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동산부터였다. 시야 뒤편으로 능선이 보이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광경이다.

황금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저런 동산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광경. 저건 현실인가, 아니면 허상인가.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내가 그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독심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다.

왜냐면 이 황금궁에 속한 이들 중,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그나마 황금궁 내 유일한 인간인 헥토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금회주. 저자입니다.”

엘릭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도 태연하게 그녀…라고 해야 하나. 그것의 표정을 읽었다.

잔류사념은 살아있지 않다. 그래도 한때 인간이었던 흔적이라 꽤 자세하게 알아낼 수 있지만, 살아있는 인간처럼 완벽하게 읽어내진 못한다. 즉 내 독심술은 현재 봉인당한 것과 마찬가지.

티르도 사라지고, 나 홀로 적진 한복판. 와중에 독심술이 통하지 않다니. 이건 좀 위험한가.

내가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엘릭은 수첩을 꺼내어 무언가를 읽고는 말했다.

“휴전 협상을 위해 온 사절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무저갱 평야에서의 분쟁을 원치 않는 모양입니다.”

“…무저갱이 사라진, 기회의 땅 말인가.”

다시금 수첩을 팔락이며 무언가를 읽어 들인다. 내가 수첩 뒤편을 노려보아도 그 수첩의 내용이 보이진 않는다.

독심술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엘릭의 수첩에 적힌 내용, 지금 하는 생각, 어떻게 할 예정인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부터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읽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엘릭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먼 옛날, 금국이 멸망하게 된 계기와 그녀가 가진 회한만이 허공에 떠돌 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조금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데 독심술도 안 통하고.

내가 생각하는 동안, 생각…인지 뭔지 모를 판단을 끝마친 엘릭이 입을 열었다.

“억압회주. 어떻게 판단하나.”

나이 지긋한 노인을 향해 하대하는 데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비록 시체라도 왕의 시체에는 위엄이 어려 있었다.

그런 태도가 익숙한지, 헥토 역시도 훨씬 어려 보이는 여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높였다.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열국은 제대로 땅을 일군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승냥이들에게 씨앗을 쥐여준다고 해도 그걸 한 끼 식사로 바꾸지 않을지 싶습니다. 차라리 군국이 땅을 일구도록 두고 그 일부를 우리가 가져가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틀렸다.”

엘릭은 이견의 여지 없이 단언했다. 헥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눈치를 보며 황금회주가 한 말의 의중을 파악하는 동안, 엘릭은 나를 돌아보며 한쪽 손을 펼쳤다.

“무저갱 평야는 원래 금국의 땅이로다. 금국이 시작할 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금국…? 예전에 망한 나라는 왜?

“너희가 역사를 잊지 않았다면, 엘릭 왕가가 무저갱을 실패작의 무덤으로 썼다는 사실을 알 터. 그렇지 않나, 전령?”

엘릭은 자기가 아직도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연하게 말했다. 황금경에 의해 ‘잡아먹힌’ 왕이 보이기에는 과하게 당당한 태도다.

어쩌면. 내 예상대로라면… 하지만 그게 맞을까?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인정하자. 내 평생을 함께한 든든한 친구 독심술은 지금 효과가 없다.

그러나 독심술만이 내 힘인 건 아니다.

내 독심술도 인간의 마음 말고 다른 건 못 읽는다. 짐승의 생각은 물론, 내일 찾아올 날씨도 못 읽는다. 당장 내가 뿌린 씨가 무엇으로 자라날지 몰라. 나는 예언자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인간의 능력은 독심술이 아니다. 인간의 진짜 능력은 목적을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하는 힘, 그 자체니까.

세상을 조사하고, 분해하고, 예측하고, 이용하고. 비록 잘못되더라도 그걸 발판으로 삼아 다시 나아가는 게 인간이다. 불가능은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뒤에야 심사숙고하여 내리는 선고다. 심지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없던 가능성이 생겨나곤 한다.

할 수 없다고 낙인찍는 건 하지 못한다고 결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미리 포기해버리는 건 예언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해보자. 일단 내 가설부터.

“맞는 말이야. 장인들의 나라인 금국에는 장작을 태우고 난 다음의 재나 다시 쓰지 못할 잡철을 무저갱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지. 왕국과 금국 중, 무저갱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실효지배했던 쪽은 금국.”

“잘 아는구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금국과 왕국 사이의 이야기.”

황금경은 열국의 신비라고 알려져있지만… 그래서야 황금경이라는 호칭을 쓸 이유가 없다.

앞에 단 수식어, 황금은 금이다. 뒤에 붙은 칭호, 경은 왕의 신하를 뜻한다.

즉, 황금경은 그 자체로 금국을 내포하고 있다.

왜 그런 호칭을 썼을까? 어쩌면 황금경은 아직까지 금국을 잊지 못했나? 아니면….

“열국과 군국의 관계는 정확히 그 반대지. 연금술의 나라, 열국이 된 이후로는 연금 코스트의 영구적인 상실이 두려워서 가까이 접근하지도 않았잖아? 그 이후 방치된 땅에 군국이 투자해서 성과를 얻었으니, 이젠 군국 지분이 더 큰 거 아니야?”

“나름 사절이라고 제 나라의 유리한 부분만 언급하는군. 하나, 네 어리석음을 지적해주마.”

알 게 뭐야. 무저갱 평야가 군국 거든, 열국 거든 상관없어. 지금 필요한 건 오직 정보뿐이야.

무언가를 자꾸 창조하면서 움직이는 황금경. 그렇지만 창조하는 게 하나같이 뭔가 이상하다. 옥수수밭이야 그렇다고 쳐도, 돌로 지은 도시나 높은 성곽 같은 건 요즘 추세에 맞지 않는 건축물이다. 연금술의 발달로 성벽 무용론이 나왔는데 정작 연금술사들의 시초인 황금경이 만들다니.

황금경이 만들었기에, 가 그게 존재하는 이유라지만. 황금경은 왜 그걸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그 의문 역시, 한 가지 간단한 가설로 해결할 수 있다.

“너는 틀렸다. 이곳은 금국이니까.”

어쩌면, 황금경은.

이 땅 위에… 금국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돼. 금국은 황금경의 손에 의해 멸망했잖아.”

“너는 틀렸다. 이곳에는 왕이 있고, 영토도 있으며, 따르는 백성이 있다. 그것들은 금국의 왕, 금국의 영토, 그리고 금국의 백성이다. 따라서 이 나라는 금국이다.”

“금국의 왕 엘릭은 죽었어. 황금경의 손에! 당신은 엘릭 왕이 아니야!”

“짐은 여전히 존재한다. 왕의 기억, 왕의 외모, 왕의 능력을 지닌 짐을 무어라 부를 셈이냐?”

금국의 구성요소 중 가장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왕이다. 황금경이 금국을 만들기 위해선 먼저 엘릭 왕을 구현할 필요가 있었겠지.

좋아. 대충 윤곽이 보였다. 황금회주 엘릭은 호문쿨루스. 황금경의 창조물이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는 분명 황금경 본인도 있을 거다.

“나는 열국의 지배자, 황금경과 협상하러 온 거야. 금국의 왕 엘릭이 아니라. 황금경을 불러줘. 협상은 그와 하겠어.”

황금경을 불러보자. 직접 황금경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수수께끼가 해결될 테니까.

그러나 엘릭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예의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도다. 좋다. 그렇다면 보다 확실하게 알려주겠다.”

엘릭은 손을 뻗었다.

대지를 연금, 그 아래에서 커다란 창이 나무처럼 솟아올랐다. 흔한 흙을 연금했다고 고코스트의 연금강이 나올 리 없지만, 이곳은 황금경의 땅. 등가교환 같은 고리타분한 개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엘릭은 자기 키보다 두 배는 더 큰 창을 한 손으로 들었다. 범상치 않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창은 서늘한 빛으로 내 목을 노렸다.

“사절의 목을 베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선전포고는 없겠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마.”

어라라. 너무 세게 건드렸나? 황금경을 불러달라니까 갑자기 죽이려고 드네. 그게 역린이었나 봐!

“자, 잠깐만요. 기다려봐요.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고.”

“상관없으니 친히 처형해주마.”

“아니, 폐하! 진짜로!”

이러다 죽는다. 독심술도 통하지 않는 지금 저 호문쿨루스에게 당해낼 수단이 없다. 독심술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도망칠 텐데. 아니, 애초에 황금경을 불러달라고도 안 했을 텐데! 독심술 돌려줘!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억압회주 헥토가 황급히 놀라서 엘릭을 만류했다.

“기다리십시오, 황금회주여. 저들의 전력은 무시할 게 못 됩니다.”

‘잔녹회주의 말로는 시조 티르칸쟈카가 동료로 있다고 했으니까. 피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흡혈귀들은 까다로우니. 이왕이면 공국으로 곱게 보내주는 편이….’

그러나 엘릭은 헥토의 충언도 무시하고는 철창을 고쳐 잡았다.

“누가 오든 관계없다. 금국은 강철로서 영원하리라.”

“끄응….”

싸워야 하나. 다이아몬드도 없는데. 카드에 마법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내가 카드를 들고 결사의 항전을 각오하던 그때였다.

딸랑, 청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크지 않다. 그러나 꽉 들어찬 소리만 들어도 공들여 만든 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질이 황금이 아니라 철이었으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화음이 났을 것이다.

엘릭의 시선이 빙글 돌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느릿하게 열리는 마을 회관의 문이 있었다. 그 틈으로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완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이 멀어진 듯한 감각이 나를 잡아 이끌었다.

감각뿐만 아니다. 얇지만 보이지 않는 막이 나와 저들을 갈랐다. 공기가 유리처럼 굳어진 것마냥 내 손은 이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아마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거다. 어쩌면 모습도 안 보일지도 모르지. 마치, 건너편 세상으로부터 나라는 존재가 배제된 것처럼.

기분 탓이 아니다. 그의 등장만으로도 엘릭과 헥토의 표정이 바뀌었다. 엘릭은 지금껏 보이지 않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반겼다.

“데모.”

황금경의 이름을 부르면서.

황금경의 이름으로 불리며 나타난 이는 앳된 소년이었다. 그에게서는 별다른 기품도, 강렬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보이는 건 오직 호기심과 탐구심뿐이었다.

종소리를 울리며 마을회관에서 뛰쳐나온 소년은 신이 난 듯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옥수수를 수확하는 기계입니다! 의뢰에 맞게 피스톤으로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억압회주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헥토는 기다렸다는 듯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성되었습니까, 경? 어디 있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