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저기 있지 않습니까. 회주. 지금 보이지 않는 겁니까?”
“어디….”
헥토는 황금경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무성한 옥수수밭이다. 그곳에는 옥수수를 수확하는 기계는커녕 옥수수만 수북했다.
아직까지는.
“잘 보십시오.”
라고 말하며 황금경은 한 걸음 걸었다. 그때였다.
그가 가리켰던 그 공간. 바람에 흩날리던 옥수수가 일제히 분해되었다. 꽉 들어찬 옥수수알, 그 아래 기다랗게 수염, 넓적한 이파리, 줄기를 이루는 섬유. 옥수수를 옥수수로 만들어주는 구성요소를 완전히 해체한다. 대지모신의 작물마저도 부품으로 이루어진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주장하듯, 나누고 잘라 각각을 드러낸다. 허공에 그 재료들이 종류별로 수 놓였다.
황금경은 다시 한 걸음 걸으며 말했다.
“저기에.”
해체된 구성요소들이 순식간에 얽힌다. 섬유로는 기둥을 세우고 이파리가 감싼다. 옥수수알이 블록처럼 조립되고 수염이 그것을 꿰맨다. 그러한 과정이 수천, 수백만 번. 적재적소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윽고 마지막 한 걸음을 디뎠을 때.
“있잖습니까.”
황금경은 진리이며, 이 땅의 신이니. 그가 하는 말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다시 보니 그곳에는 옥수수풀의 세 배나 되는 커다란 기계장치가 있었다.
옥수수를 재료로 빚었으나 어떠한 강철보다도 단단하다. 황금경은 이미 재질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가 바란 성질은 이루어진다. 그가 떠올린 설계는 그대로 창조된다. 이 땅에 없더라도. 인간이 아직 모르더라도.
헥토는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기계장치를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저, 저것입니까…. 어디를 움직여야.”
황금경은 답답한 듯 말했다.
“그것부터 설명해야 하다니. 끙. 대충 움직여보십시오.”
억압회주의 고유마도는 강철에 압력을 가하는 힘. 표면이 균일하고 넓적할수록 효율이 극대화되는 특성 때문에 그는 피스톤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곤 했다. 달리 말하면, 모양이 균일하지 않으면 그의 힘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압력이 서로 상쇄될 테니까.
‘아무리 봐도 피스톤이 보이지는 않는데…. 일단.’
헥토가 고유마도를 썼다. 저 기계장치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고유마도를 펼쳐 힘을 가했다.
그러자 기계장치가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기계장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으며 움직였다. 바퀴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구르고 옥수수대를 집어삼킨다. 몸 안에서 과실만 수확한 뒤, 나머지는 처음 모습 그대로 되돌려놓는다.
그게 어떻게 되는지는 억압회주 헥토도 몰랐다. 따라서 나도 알지 못했다. 독심술도 아는 사람이 없으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게 어떻게….”
헥토 역시 경지에 이른 연금술사이자 열국의 회주. 그런 그조차 황금경이 한순간에 만든 기계장치를 파악하지 못한다. 설계하는 일보다 그걸 보고 파악하는 게 몇십 배는 쉽다는 걸 생각하면, 그와 황금경 사이에 얼마나 큰 격차가 있는지는 짐작도 못할 정도다.
헥토가 경외를 담아 중얼거렸으나, 황금경은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설계했으니까요. 이제 됐죠?”
헥토에게서 관심을 거둔 황금경은 엘릭에게로 향했다. 환한 미소로 엘릭에게 다가간 그는 못마땅한 듯 헥토를 흘겨보며 말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합니다만…. 그에게 금국의 식량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계란은 한 바구니에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혹 제 기계로 식량을 독점한 뒤 자기 배만 불리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만….”
“짐이 단언하마. 그는 우리를 배반하지 못할 것이다.”
“…폐하께서 그렇다면야 안심입니다만. 그의 능력이 영 미덥지 못하여.”
“네가 너무 뛰어난 것뿐이란다, 데모. 너에 비하면 누군들 모자라지 않겠는가.”
엘릭은 그리 말하며 손을 뻗어 황금경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왼손이 황금경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헝클이고, 오른손으로는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다. 그러자 황금경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헥토를 대할 때와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조금 전 세상을 제멋대로 주무르던 절대자 황금경은 어디 가고, 지금은 동경하던 이와 함께하여 행복해 하는 어린아이만 있을 뿐.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만일 엘릭이 살아있는 인간이며 제 의지로 쓰다듬는다면 좋은 사랑 하라고 자리에서 비켜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껴안은 엘릭은 물론, 안긴 황금경조차도 만들어진 인형이라는 생각하면.
이 얼마나 음침한 광경인가.
“수고했다, 데모.”
“아, 아, 아닙니다! 폐하에 비하면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네가 있어 한시름 덜었다. 의지가 되는구나. 이 나라에 가장 큰 복은 바로 네 존재가 아닐까 한다.”
“전혀요!”
황금경은 엘릭의 손을 마주 잡은 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호소했다.
“만일 폐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저를 찾아주시 않으셨다면 저도 없었을 겁니다! 금국에 있어 가장 큰 복은 바로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신 폐하께서 왕으로 계시는 겁니다!”
“데모….”
“제가 그 은혜에 답하기 위해… 폐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해보이겠습니다!”
이제는 나쁜 말 하고 싶지도 않다. 이미 충분히 불쌍한데, 나마저도 뭐라 하면 너무하잖아.
내 감상이야 어쨌든, 한 소년과 여인은 죽어서도 떨쳐놓지 못한 깊은 유대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명확해졌다.
세상에 이미 금국은 없다. 하지만 황금경은 연금술의 마신. 또한, 세상 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이해의 괴물.
자기 고유마도가 닿는 범위 안에 금국을 ‘연금’한다면? 금국의 땅, 금국의 건물, 금국의 성과 도시, 금국의 풍경. 심지어 금국의 백성까지.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연금하여 자기 주변을 장식한다면.
사랑하던 왕마저 만들어 곁에 두고. 자기 자신을 그 무대 위에서 뛰놀게 한다면.
최소한 그를 둘러싼 세상은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금국일 테니.
우리가 봤던 성곽도, 도시도, 옥수수밭에 온갖 잡동사니도. 전부 그가 금국을 재현하려고 만든 흔적. 그에게 열국은 옛 금국의 영토에 들어선 나라이자, 쓰던 물건을 버릴 쓰레기장이다.
대단하네. 연금술이 극에 달하면 이런 짓도 가능하구나. 세상이 조금만 더 좁았어도, 이 세상 만물을 창조했을지도 모르겠네.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잠시 휴가를 주어도 모자라나, 그럴 여유가 없구나. 데모. 급히 필요한 것이 생겼다.”
“무엇입니까? 말씀해주십시오! 무엇이든 마련해보겠습니다!”
엘릭은 내 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금국의 적을 없애기 위한 무기다.”
하긴, 이 공간은 황금경이 금국을 재현하기 위해 만든 모형정원. 손익계산 따위는 할 필요 없다. 손실이 생겨도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까.
사실 황금경 입장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관계없을 거다. 다른 관심사가 생긴다면 휴전에도 응하리라. 다만… 자존심마저 금국의 구성요소라는 거겠지. 신과 같은 능력을 지녔으면서 괜히 싸움을 포기할 이유도 없고.
“무, 무기… 말입니까?”
“그래. 데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강철을 타고 흐르는 피냄새가 나라를 뒤덮을 터. 네가 일해준다면, 오직 적의 피만 흐르게 될 것이니.”
“….”
알 만큼 알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허공에서 저거너트를 만들어내는 신과 같은 능력. 솔직히 막막하다. 군국이 다른 모든 분야에서 열국을 압살하지만, 이 황금경이 마음만 먹는다면 군국 전체가 달려들어도 당해내지 못할 거다.
회귀자가 이전 회차에서 군국이 이레만에 열국을 이겼다고 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했니? 이걸 이길 방법이 있어? 혹시 황금궁은 따돌리고 나머지 회주들을 족쳤나?
그렇다면 불가능하지도 않겠네. 어차피 군국에서 필요한 건 황금경의 굴복이 아니라 열국에 흩어져 있는 연금자원일 테니까. 보건대 식량을 총괄하는 억압회주 말고는 황금궁과 깊게 교류하는 회주도 없어 보이고. 유엘이 천리안으로 회주의 위치만 찍어주면 기동전으로 각개격파할 수 있겠어. 힐데도 원래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고….
어라, 잠깐만. 혹시 이전 회차 군국이 전쟁을 이긴 이유가.
시간 끌지 않고 냅다 내지른 덕분이었다면?
“제가 무기를 만든다면…. 폐하께 도움이 될까요?”
“매우.”
“…그렇다면, 만들겠습니다. 무기.”
어이, 회귀자.
네가 휴전하겠다고 시간을 준 데다가 황금궁까지 직접 찾아와서 큰일 난 것 같은데.
황금경이 무기 만든대. 아무리 생각해도 무기 만들면 군국은 승산 없는데? 어쩔 거야, 이거. 빨리 와서 처리해봐!
그때였다.
“천검기, 유성우!”
세상이 깨졌다.
시야마저도 교란하던 힘의 장막을 부수며 한 인영이 유성처럼 떨어졌다. 유성이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화염의 꼬리를 뒤에 길게 늘인 채 떨어진 지잔은 굳건한 대지마저도 박살내며 땅으로 파고들었다.
지잔 앞에서는 대지조차 물컹한 젤리와 다를 게 없다. 하늘에서 떨어진 땅이 대지를 뒤틀고 땅을 요동치게 했다.
황금경과 엘릭조차도 충격에 비틀거리는 사이 회귀자가 몸을 일으키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찾았다. 여기가 황금궁이었어! 설마 옥수수밭에 있을 줄이야…. 어라? 휴즈?”
생각해보니 신이 별거냐. 하늘이랑 땅 쥐고 흔드는 인간이 있는데.
믿겠다. 회귀자. 너는 히어로다.
“왜 여기 있어? 그것도 황금경까지 앞에 두고.”
황금궁을 깨부수며 나타난 회귀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 어떤 고민도 없는 태연한 얼굴이다. 문제가 있으면 힘으로 깨부수고, 힘에 부칠 땐 자살하면 그만인 회귀자는 내가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나를 구하러 왔다면 몰라도 돼.
나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회귀자를 반겼다.
“셰이 씨. 눈물 나게 반갑네요.”
“나는 딱히? 조금 전에 봤잖아.”
이 자식이? 너에게는 감동조차 아깝다.
“그보다 여기는 왜 왔어? 황금경을 찾아가는 건 내일이잖아.”
“그러는 셰이 씨는요?”
“혹시나 내일 안 알려줄 수도 있으니까 미리 찾아두려고.”
“저도 비슷해요. 주변 정찰 좀 하러 왔다가 찾아버렸지 뭐예요.”
“좋은 생각인데, 찾았으면 말을 하지. 한참 뒤졌잖아.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 몰랐단 말야.”
“셰이 씨가 어딨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틈도 없었고요. 보세요.”
회귀자와 내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동안 저쪽도 상황을 파악했다. 엘릭을 지키려는 듯 제 몸으로 가린 황금경은 우리를 보고 삿대질했다.
“너희는 누구냐!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쳐들어온 것이냐!”
명백히 적의와 경계를 담은 외침이다. 자기 세상에 틀어박혀 있더라도 벽을 부수니까 반응하네. 나 같은 떨거지는 잠시 치워두지만, 회귀자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라면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지?
나와 엘릭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는 회귀자는 지잔과 천앵을 늘어뜨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조금 전 지진을 일으키며 등장한 주제에 옷매무새 가다듬는다고 괜찮아 보일 리 없건만. 회귀자 딴에는 노력한 거니까 봐주자.
“황금경? 제대로 찾아왔네. 나는 평화 사절이야. 휴전하자.”
안 되겠다. 노력했다고 해도 말을 그딴 식으로 하면 되겠니. 말 잘 했다고 해도 안 통했겠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회귀자를 만류했다.
“셰이 씨. 의미 없어요. 이미 저들은 싸우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응? 뭐?”
“저들은 휴전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도망칠 준비나 하죠!”
동시에 엘릭도 소리쳤다.
“데모! 저들이 짐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