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적이 여기까지?”
“그래! 짐과 이 나라를 위해! 저들을 배제하라!”
황금경은 당황하면서도 그대로 엘릭의 말을 따랐다. 그가 손으로 땅을 짚었다. 순식간에 땅 표면이 강철로 연금된다. 그대로 황금경이 손을 휘젓자, 표면이 말려 들어가며 강철의 파도가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어? 잠깐만! 딱히 싸울 생각은!”
회귀자는 당황하면서도 상대 공격에는 반사적으로 대응했다. 늘어뜨린 지잔을 땅에 내리찍고는 좌우로 휘젓는다. 지잔에 밀려난 땅이 지진을 일으키며, 밀려오던 강철의 파도가 그 진동에 부딪혀 부러지고 깨졌다.
“싸울 생각 없어! 멈춰 봐!”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강철의 장막을 걷어낸 회귀자가 본 건 이쪽을 겨냥하고 있는 총구였다.
“미안하네. 싸움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철컥. 억압회주 헥토는 꺼낸 피스톤 위에 철구를 장전하며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황금경은 우리의 신. 그가 명령한 이상, 나 역시 따르겠네!”
“치잇!”
헥토는 총보다는 대포를 닮은 피스톤을 겨누고 그대로 발사했다. 투웅,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묵직한 철구가 회귀자와 나를 노리고 쏘아졌다.
헥토는 저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 생각을 읽은 나는 냅다 땅을 굴렀으나, 회귀자는 천반경으로 대응했다. 사람 주먹만 한 철구를 겁먹지 않고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회귀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외쳤다.
“이딴 느린 걸로 나를 맞출 수 있을 줄 알아?”
고수의 품격이 느껴진다. 개처럼 땅을 구르는 나와 대비되니 더 돋보인다.
그때 헥토가 손아귀를 폈다.
“억압, 해제!”
그가 쏘아낸 철구는 이미 압축되어있던 특제 연금강. 그가 고유마도를 거두자 철구를 억압하던 압력이 사라졌다. 동시에 잔뜩 오그라들었던 철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강철이 팽창하는 진귀한 광경이 적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철구를 피했던 회귀자는 그 강철의 폭발에 휘말렸다. 머리, 어깨, 허리. 팽창하는 철구가 회귀자의 전신을 난타했다.
봐봐. 내가 폼은 없어도 안전하긴 하단 말이야. 철구에 맞기 싫었다면 나처럼 온힘을 다해 피했어야지….
‘천반경 수비식, 반투경!’
뭐, 맞아도 상관없으면 너처럼 하는 게 맞고.
몸에 강철이 닿은 순간 그를 통해 기공을 불어넣는다. 압축된 강철이 반발하는 힘조차 기공으로 붙잡고 억압한다. 고유마도는 거두어졌으나, 철구가 기지개를 피려는 순간 회귀자의 기공에 의해 다시 억눌러졌다.
포탄과도 같은 충격을 주먹질 정도로 상쇄시킨 회귀자는 발끈해서 외쳤다.
“진짜 싸우자는 거지?! 좋아, 바란다면 해줄게!”
우리 회귀자도 감정적인 걸로는 너희 못지 않다. 한 번 공격당하니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는지 냅다 공격태세를 취했다.
“지곤류, 맹타!”
회귀자는 지잔을 양손으로 잡고는 날아오는 철구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때리기 직전에는 흡착기공, 때린 직후에는 반탄기공. 지잔과 철구가 닿는 찰나 순식간에 기공의 성질을 뒤집어 억압회주의 철구를 밀어낸다.
지잔에 가격당한 철구가 소리를 찢으며 날아갔다. 총탄과는 비교도 안 될 중량. 맞으면 팔다리가 그대로 뜯겨 날아갈 것이다.
그러나….
“배제한다.”
황금경이 되뇐 순간, 헥토를 향해 날아간 철구는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강철을 쇳가루로 만들어버린 황금경은 음울한 어조로 되뇌었다.
“배제한다. 배제한다. 배제한다.”
아까의 천진난만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지금의 황금경은 꼭 기계처럼 단조로운 목소리로 엘릭의 명령을 반복했다.
단순히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세계에서는 황금경의 말은 말로 끝나지 않는다.
농부들이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모형 정원의 배경으로만 있었던 말없는 농부들은 황금경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전력으로 뒤바뀌었다.
밀짚모자 너머로 의안이 번뜩인다. 어떤 농부는 얼굴 표면의 절반을 철로 뒤덮었다. 오른손 손가락에 강철 나뭇가지를 박은 농부도 보인다. 가지각색의 외모를 한 농부들이나 공통점은 한 가지.
강철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회귀자가 호문쿨루스 군단을 보곤 전신에 힘을 잔뜩 주었다.
“가디언들이잖아?”
“가디언이요?”
“역대 회주들의 호문쿨루스야. 황금궁은 가디언으로 쓰고 있어! 긴장해! 하나하나가 열폭회주 급일 테니까!”
“긴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요?!”
정말 그랬다. 그들이 일제히 손을 치켜들자 온갖 강철이 튀어나왔다. 하늘에서는 불타는 강철을 두른 열폭회주가 쏜살같이 날아오고, 강철로 만든 거울을 잔뜩 매단 거울회주가 일제히 회귀자를 겨눈다. 그밖에 이름 모를 회주들이 각자 자기 장비를 꺼내 우리를 겨눴다.
“호문쿨루스도 고유마도를 쓸 수 있을 거야!”
고유마도? 아니야. 개인의 심상으로 이루어진 고유마도였으면 내가 읽었지. 저건 고유마도가 아니라, 황금경의 권능으로 고유마도조차 통째로 '만든' 거야! 회주의 고유마도는 그 근간을 연금술에 두고 있으니까!
도망쳐야 한다. 생각이 안 읽혀. 공격이 어딜 향하는지, 어떻게 오가는지 모르겠어! 이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선 다른 방도가 필요해!
하지만 도망치려면…!
“셰이 씨! 황금경을 노려요! 저것들 어차피 죽여도 부활할 거예요!”
“어쩔 수 없지!”
회귀자는 천앵과 지잔을 양손으로 들었다. 왼손에는 천앵, 오른손으로는 지잔. 하늘과 땅을 나눠 들고는 양끝을 서로 맞댔다. 두 유물의 끝으로 천지가 꼬리를 물었다.
지잔은 근거리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성능을 발휘하지만 원거리에는 그 성능을 발휘할 방법이 없다. 집어 던지지 않는 한.
그렇다면 던지면 된다. 힘이 부족하다면 천앵을 이용해서라도.
“천지검곤!”
천앵을 로프로 삼고, 지잔을 투포환으로 삼아 빙글빙글 돌린다. 처음에는 회귀자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던 지잔은 점차 범위를 넓혀가며 대지를 휩쓸었다.
속도는 줄넘기 정도이나, 문제는 지잔의 무게다. 항거할 수 없는 무게로 온갖 물건을 부수는 지잔은 파괴신과 같았다. 강철도, 대지도 지잔의 궤적에 걸리면 산산이 쪼개져 흩날렸다.
그렇게 회전이 극점에 달했을 때, 회귀자는 힘차게 천앵을 뿌리쳐 지잔을 해방했다.
“달던지기!”
후우웅. 지잔은 별다른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그저 그 무게로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며 황금경을 향해 나아갔다. 비슷한 무게가 아니라면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설사 황금경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상대는 황금경이다.
“중압회주. 쐐기회주. 미장회주.”
감히 그 이치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연금술이 이루어졌다. 황금경이 말을 떠난 땅이 들썩였다. 황금경을 중심으로 반경 50m의 대지가 반구형으로 분리되어 황금경을 지키기 위해 지잔의 앞을 막아섰다. 땅의 무게를 지닌 검과 강철로 변한 땅이 충돌했다.
강철로 연금된 구조물. 하물며 그 하나하나가 황금경이 직접 연금한 것이다. 지잔에 닿았으면서도 연금강은 살짝 우그러질 뿐. 태산마저 부술 것 같던 지잔도 점차 기세를 잃어갔다.
“미친…! 지잔을 막아? 사기잖아!”
“사기 무기 들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이때에요! 도망치죠!”
“웬일로 나랑 같은 생각을 했네!”
회귀자는 늘어진 천앵을 잡아당겼다. 이미 기세를 다 잃은 지잔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회귀자의 곁으로 돌아왔다. 날아오는 지잔을 낚아 챈 회귀자는 냉큼 몸을 돌려 뛰었다.
지잔의 위용은 어마어마해서, 황금경과 그 가디언들도 수비에 집중하느라 템포를 놓쳤다. 호문쿨루스들은 뒤늦게 우리의 뒤를 쫓았다.
“하하! 느림보들! 쫓을 수 있으면….”
“…배제한다.”
도망치던 중 코앞으로 하늘에서 거대한 철창이 떨어졌다. 주춤거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열폭회주를 비롯한 수많은 호문쿨루스가 용매를 매달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자 수십 개의 무기를 손에 쥐고서.
열폭회주가 중얼거렸다.
“도망치지 못한다.”
“저게 어떻게 되냐고!”
이제 고유마도도 아니잖아! 진짜 열폭회주는 저딴 짓 못해!
위아래, 앞뒤로 다 포위되었다. 심지어 이 호문쿨루스들은 생각도 읽지 못한다.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황금경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가까운 무언가라서!
그야말로 진퇴양난. 회귀자가 철창을 걷어내곤 있지만, 이대로 발목이 잡히면 황금경의 세상에서 도망칠 수 없다. 절체절명의 순간. 어떻게 해야….
그때, 깨진 공간으로 어둠이 줄기줄기 흘러들었다. 허공을 더듬던 어둠은 공간을 잠식해나가더니 순식간에 티르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휴! 드디어 찾았구나. 도대체 어디 갔던 것이냐?”
내가 할 말이야!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보디가드 삼아서 데려왔건만, 잠깐 안 보였다고 내 위치를 놓치는 게 말이 돼!
그렇지만 지금 당장 나를 구해줘야 하니, 이 속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채 다급히 외쳤다.
“티르! 이럴 때가 아니에요. 도망쳐야 해요! 뒤에!”
“뒤에?”
뒤편에 안 보여? 댁 뒤쪽으로도 호문쿨루스가 있잖아! 생각은 읽지 못해서 누군지 모르나 그들 역시 회주일 거다. 양쪽에서 협공당하면 답도 없어!
느긋하게 뒤를 돌아본 티르는 호문쿨루스를 보고도 태평하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저들은 내 수족이니.'
뭐?
내가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멈칫한 동안, 티르의 뒤에 있던 호문쿨루스들이 삐걱거리며 일제히 돌격했다.
나와 회귀자를 지나, 우리 뒤를 추격하던 호문쿨루스들에게.
티르가 조종하는 호문쿨루스는 회주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검붉은 기운이 그들의 몸을 불길하게 휘감고 있었다. 티르의 어둠과 혈조술로 강화된 채 오직 육신의 힘으로 황금경의 호문쿨루스를 몰아붙였다.
같은 호문쿨루스의 공격을 받은 호문쿨루스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숫자는 황금경 쪽이 훨씬 많은데도 미리 막지 못하고 코앞까지 접근을 허용했다. 그들의 얼굴로 검붉은 주먹이 유성처럼 날아온다.
피가 튀고 철이 흩어진다. 고개가 세차게 돌아간 호문쿨루스들은 누가 봐도 즉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때 검붉은 기운이 스며들고, 목이 돌아간 호문쿨루스들이 눈을 붉게 빛내며 다시 일어섰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들은 티르의 군세를 따라 황금경의 호문쿨루스를 공격했다.
검붉은 안개가 점차 번져가며 전황을 알린다. 티르는 호문쿨루스의 전투를 느긋하게 보며 말했다.
“신기한 것이, 저들은 피가 몸 안에 있으면서도 나의 감각에 느껴지더구나. 별다른 상처도 없는데 꼭 제 피를 몸 밖에 내놓은 것처럼. 내 능력이 상당히 약해졌어도 이들 정도는 다스릴 수 있지.”
다뤄? 피? 흡혈귀는 호문쿨루스의 피도 지배할 수 있단 말이야?
아니지. 달리 생각해봐야 한다. 흡혈귀가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피는 오직 인간의 피. 달리 말하면, 호문쿨루스의 피도 인간의 것과 완전히 똑같다는 말.
티르의 말을 듣고 진상을 깨달았다.
“딜레마에 걸렸구나!”
“딜레마? 호문쿨루스의 딜레마 말이냐?”
“네! 황금경이 지배하는 호문쿨루스라면 티르도 지배할 수 있어요. 호문쿨루스라고 해도 그 성분은 인간의 피와 똑같으니까요! 그 몸도 인간의 것과 똑같을 거예요! 다만,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없으니까 티르의 힘에 저항하지 못해요!”
호문쿨루스에게는 자기 의지가 없어. 마치 자기가 직접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 육신은 전부 황금경이 만들어준 것.
즉, 저 호문쿨루스들은 도구다. 황금경도, 티르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어. 누가 쓰냐에 따라 기능은 달라지겠지만!
…인간의 육신이 이토록 만들기 쉬운 것인가, 이 점은 제쳐두고 말이야.
오랜만이다. 생각을 읽지 않고 내 스스로 답을 찾은 건. 내 머리도 아직 쓸만하구나!
“좋아요! 이 틈에 도망가죠!”
“도망?”
“네! 티르의 힘이면 대치 상태는 만들 수 있겠지만 황금경과 소모전을 해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요!”
저쪽은 매우 신기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황금경의 지배 아래 있는 호문쿨루스는 뒤늦게 강철을 연금해가며 공격하고, 티르의 지배 아래 있는 호문쿨루스는 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며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회주의 힘까지 고려하면 황금경 측이 종합적으로 위지만 신체능력만큼은 티르의 호문쿨루스가 앞선다. 흙잡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재질의 호문쿨루스는 아무거나 무기 삼아 주워 들고는 날뛰었다.
갑작스러운 배신과 난투극에 황금경도 버벅거렸다. 그나마 페루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헥토는 어찌 된 상황인지 단번에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