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감정을 느낀 힐데가 눈을 끔뻑였다.
“저기, 셰이? 그게 될 것 같아요?”
“불가능하진 않아. 그 황금경이 진짜인지는 몰라도, 황금궁의 매개가 되는 핵은 반드시 존재해. 그렇지 않다면 황금궁이 일정한 범위를 유지한 채로 열국을 움직일 리 없어.”
“그걸 부수겠다고요?”
“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그럴 능력은 보여야 해. 그래야 진지하게 우리 앞에 임할 테니까.”
회귀자의 눈은 진심이었다. 힐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한 얼굴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상하네요~? 사명을 지키려는 사도인데 제 목숨을 안 돌봐? ‘제’ 예상이 틀렸을까요? 황금경은 마신. 황금궁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은… 예지로도 보이지 않을 텐데?’
죽어도 회귀하거든.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전력으로 들이박을 수 있대. 회귀자는 그게 맞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귀자 이야기. 나는 그럴 수 없지. 아무리 세상이 돌아가도 명백히 죽을 곳에 머리를 들이박진 못해. 황금경과 싸운다고 해도 나는 참가할 수 없어.
혹여나 오해할지도 모르니 미리 말해두자.
“저기, 셰이 씨. 여기까지 와서 발을 빼는 모양새가 되긴 싫지만, 이건 말해야겠네요. 저는 황금경과 안 싸워도 되죠?”
“어?”
‘왜? 그래도 동료… 아. 그러네. 도움이 안 되겠구나. 오히려 구하려면 따로 손을 써야 해서 데려가는 게 손해야.’
그렇지. 내가 있어봐야 너희 발목만 잡지 뭐 하겠어…. 그런데 남의 생각으로 인정받으니까 좀 불쾌하네?
빼꼼 삐져나오는 실망감을 이성으로 억누른 회귀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이야. 기대도 안 했어.”
“오해하지 마세요. 제 목숨이 아까워서는 맞아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잡기술에 의존하는 저는 황금경에게 아무런 피해도 못 줄 거예요.”
“알아. 어차피 후방에 한 명 필요해. 잔녹회주와 아지를 데리고 잠깐 물러나 있어.”
정확한 판단이다. 만일 황금경이 아니었다면 나는 태연히 뒤에서 옥수수를 뜯으며 싸움을 관람했을 것이다. 한 손으로는 아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지만, 나 역시 이 기회를 놓치긴 어렵다.
회귀자가 아니라면 누가 황금경의 목 앞에 칼을 들이밀 생각을 할까? 강한 힘과 지위를 가질수록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상대는 호승심을 느끼기도 어려운, 마치 자연 현상과 비슷한 존재인 황금경. 이런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감내할 미친 인간은 회귀자 정도다.
나 혼자라면 절대 황금경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그래서 시도하지 않을 거다. 할 수 없고, 하면 죽을 테니까.
그렇지만 회귀자가 틈을 만들어준다면…. 가능성이 생긴다. 황금경의 본질에 다가가, 왕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알 가능성이.
“그렇지만, 자살특공이 아니라면 약간 거들어드릴 수는 있을지도.”
의외였는지 회귀자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아니, 내가 큰맘 먹고 도와준다니까 대답이 없네. 도와주면서 머리를 숙일 순 없지.
“도와준다니까요? 대답.”
“대답은 뭘, 네가 어떻게 돕게?”
“혹시 기억하세요? 무저갱 지하에서, 제가 지잔을 잡아들었던 일.”
“기억은 하는데…. 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는 유품에게 제대로 인정받진 못해요. 그걸 얻어도 세상을 뒤바꿀 힘은 없어요. 하지만, 오직 훔쳐내는 것뿐이라면 가능해요.”
나는 인간의 왕. 인간의 기술도, 인간의 지식도, 인간의 무기도. 하다못해 인간의 믿음까지. 그게 인간이 가진 거라면 무엇이든 다룬다.
비록 힘을 잃어서 그 모든 걸 빼앗겼지만, 그에 다가갈 가능성 자체는 빼앗지 못했다. 기력이 부족할 뿐. 힘이 달릴 뿐. 나를 얽매는 여러 조건에 의해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나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 그 규모는 원본보다 훨씬 작겠지만.
마신이라도 마찬가지. 그게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나 역시….
“셰이 씨가 시선을 끌어준다면. 몰래 숨어 들어가 황금궁의 중심을 훔쳐볼게요. 그것까진 가능할지도.”
“황금궁의 중심이 뭔지 알아?”
“대충 예상이 가요. 제 추측일 뿐이지만, 만일 황금궁의 핵이 있다면 그것밖에 없어요.”
어린 황금경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황금종. 놋쇠 종을 연금술로 변환한, 세상에 연금술이 발견된 이후 첫 번째로 변한 황금.
마신의 유품은 그 황금종이 분명하다. 처음은 그 다음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일. 따라서 첫 번째에는 전체를 대표하는 가치가 있으니까.
“소매치기 한 번 해보죠.”
승냥이들에게 대목이 찾아왔다.
황금경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나 아무거나 만들진 않는다. 그의 연금술은 오로지 금국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열국 전체에 늘어진 작품들은 모두 금국과 함께 묻힌 부장품에 불과하니. 그 무덤을 뒤지며 살아가는 승냥이들은 부스러기나마 감사히 주워 먹곤 한다.
그때 황금경이 전쟁을 준비했다.
전쟁이 돈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지만, 돈이 없으면 전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무기, 군량, 전투마나 짐수레 등. 온갖 것이 돈이다. 황금경이 평소에 만드는 물건 역시 가치 있었으나 전쟁 특수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처음에 전쟁을 대비하라는 말에 겁을 집어먹었던 승냥이들도 눈앞에 쏟아진 돈을 보고는 눈이 돌아갔다.
“전쟁할 만한데?”
“캬. 이게 뭐야? 하나만 훔쳐서 다른 나라에 팔아도 10년은 흥청망청 쓸 수 있겠어!”
“팔아? 하하! 요즘은 떠돌이가 파는 것도 제값 다 주고 산대? 칼에 찔려 뒤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열폭회주가 전쟁을 바랐던 이유가 있다. 전쟁은 열국을 부유하게 만든다. 전쟁에서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황금경이 무기를 만들어내기에.
돈은 강물과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 둘 다 거대한 흐름을 타고 온갖 부유물들을 몰고 다닌다. 황금경이 만든 장비는 그 자체로 재산. 그에 혹한 승냥이들은 모여들고, 떠나려던 승냥이들은 계속 머무른다. 소식은 떠돌이들을 타고 흘러가서 열국 전역에 퍼질 것이고, 승냥이들은 자연스레 무리를 지어 군단을 이룰 것이다.
열국의 군단. 그 위대한 여정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
“야, 야! 저기!”
“왜 그리 호들갑이야… 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듯, 거대한 뱀이 땅 위를 미끄러졌다.
땅을 재료로 연금한 듯한 커다란 뱀이었다. 몸통 지름만 3m가 넘고 길이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흙이 비늘처럼 갈라져 있고, 옥수수가 수염처럼 나 있다. 흙뱀은 대지를 뒤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명백히 이치를 벗어나는 괴물이다. 저 남쪽 대수림에는 집채만 한 뱀이 있다곤 하지만, 최소한 그건 피와 살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에 비해 저건 인위적이다.
“괴물 뱀이다! 도망쳐!”
“누군가 만든 뱀이야! 도대체 누가!”
냅다 도망치려는 승냥이들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잠깐. 땅으로 만들어진 뱀? 저것, 황금경께서 만드신 작품 아닌가?”
“저런 괴물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황금경 말고는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 편인 거지? 혹시 조종자가 있나?”
타당한 가설이었다. 나라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승냥이들은 겁도 없이 흙뱀 주위를 맴돌았다. 흙뱀이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그들은 흙뱀이 아군이라 확신하고는 관심을 거두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확신을 틀렸다. 이 흙뱀은 연금술이 아니라 대지술로 만들어졌으니까.
회귀자는 흙뱀 정수리에 지잔을 꽂아 넣은 채로 생각했다.
‘맞아. 나, 이번 회차에서는 지잔의 인정을 받았지. 꼭 칼처럼 쥐고 휘두를 필욘 없어. 이전 회차의 지선처럼 대지술을 응용해서 싸워도 돼.’
물론 지선만은 못할 것이다. 회귀자는 대지술을 따로 익히지도 않았고, 지층과 토류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이 흙뱀은 이전 회차 지선의 모습을 떠올리고 흉내만 낸 것일 뿐 지선만큼의 힘을 발휘하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름 3m의 흙이 가진 질량만큼은 진짜다. 어딘가에 갖다 박더라도 기대하는 효과는 낼 수 있다.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당당하게 가면 도리어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그냥 가라니. 어떤 사기를 쳐왔길래 저리 강심장이야? 목숨이 여러 개라도 돼?’
무슨. 목숨이 하나니까 최선의 수를 선택한 거지. 반푼이 흙뱀으로 만나는 인간마다 싸우면서 가면 퍽이나 잘 되겠다. 황금경의 권능인 척 태연하게 가는 게 낫지.
물론 이 흙뱀이 공격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상대는 황금경측이니까 그때 전투 준비하면 된다. 얼마나 편해.
이게 왕도지. 괜히 머리 쓴답시고 사도를 취하는 게 이상한 거야. 황금경에게 가는 게 목적이라면 일단 가고 보자고.
내가 스스로 자화자찬할 때였다.
“…나는, 왜 데려온 거야?”
페루가 내 쪽을 향해 물었다.
지금 우리 가운데 페루의 위치는 애매했다. 인질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다. 딱히 구속하지도 않았고, 별로 경계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조금 기대받는다고나 할까.
본인 자신도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작게 운을 띄웠다.
“저기, 악의는 없으니까 듣고 불쾌해지지 말아주세요.”
“…이미 최악. 더 불쾌해질 수 없어.”
“그러면 다행이네요! 거리낌없이 말할게요!”
'…왠지 짜증나려고 해.'
더 불쾌해질 수 없다며. 하긴, 감정은 입 밖에 낸 순간 믿을 수 없어지지, 암.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페루는 황금경의 편이겠지만 우리에게 이득이에요. 어차피 페루는 우리에게 힘을 못 쓰잖아요? 페루가 능력을 쓰면, 연금술로 만들어진 황금궁이 붕괴될 테니까.”
엘릭은 페루보고 힘을 써선 안 된다고 했다. 생각을 못 읽더라도 이유는 뻔하다. 페루의 능력 때문이다. 연금술을 부정하는 그 힘은 황금경의 완전한 카운터.
뭐, 땅마저도 연금 재료로 삼는 황금경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건 매우 까다로운 상대인 건 분명하다.
“하물며 저쪽도 그걸 알아요. 그러니까 페루가 휘말릴 정도로 커다란 힘은 쓰지 못하겠죠.”
“…내 목숨 따윈, 신경 안 써.”
“아니요. 신경 써야 할 건 페루의 목숨이 아니라 능력이에요. 혹여나 휘말리게 했다가 페루가 능력을 쓰면 진짜 곤란해질 테니까요.”
페루는 죽을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능력을 안 쓰려고 하겠지만, 황금경이 그걸 알까? 두려움이란 미지에서 나온다. 페루의 마음속을 알지 못하는 황금궁은 페루를 매우 경계할 것이다.
뭐, 사실 경계하지 않아도 좋다. 멋대로 공격했다가 페루의 생존본능이 멋대로 반응하는 게 최상의 경우. 그러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페루는 결과적으로 우리 아군이 될 것이다.
“캬. 페루의 마음이야 어쨌든 우리 편! 아주 든든해요! 페루를 처음에 발견하고 포섭한 내가 자랑스러워!”
“…했던 말, 취소할게. 더 불쾌해질 수 있구나.”
당연하지. 언제나 밑바닥에는 더욱 밑바닥이 있다. 그게 나를 향한 호감도라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진짜 이유를 밝힐 수는 없으니까.
페루는 고유마도 발사대다. 내가 페루의 고유마도를 쓰기 위해선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
황금경의 핵심까지 도달하려면, 최후의 순간 마지막 저항을 돌파할 필요가 있다. 아마 그 저항도 연금술로 이루어진 것이겠지. 페루의 고유마도는 내 비장의 카드가 되어줄 것이다.
좋아. 완벽한 계획이다. 내가 속으로 킬킬거리기도 잠시.
쿠구궁. 뱀이 크게 흔들렸다. 뱀 입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우리는 그 충격에 데굴데굴 굴렀다. 안쪽에 박힌 옥수수를 손잡이 삼아 버틴 나는 숨을 죽이고 바깥을 향해 주의를 기울였다.
흙뱀의 주위로 날개를 매단 호문쿨루스들이 모여들고 있다. 황금경의 저거너트이자 열폭회주의 고유마도로 추진력을 제공하는 장비, 용매다. 불꽃을 휘감고 날아온 열폭회주가 회귀자에게 말을 걸었다.
“목숨을 건졌다면 그대로 도망칠 것이지. 죽고 싶어 제 발로 찾아왔나?”
한 번 죽은 이를 앞두고도 회귀자는 담담했다.
“내가 할 말이야. 좋게 말로 하려고 했더니 다짜고짜 공격해? 누구는 힘이 없어서 못 싸우는 줄 알고?”
열폭회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상하군. 마치 싸우고 싶다는 말로 해석되는군.”
“호문쿨루스라서 말도 못 알아먹어? 그걸 해석해야 알아?”
날카롭게 외친 회귀자는 정수리에 꽂힌 지잔을 잡고 앞으로 밀었다.
모두가 굳건하다 믿는 대지는 사실 움직이며, 그 흐름을 거시적으로 보면 액체를 닮았다. 그 권능을 실현한 대지술은 흙과 바위를 제 뜻대로 움직인다. 대단하지만… 애매하다.
연금술과는 달리, 대지술을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쓸 방법은 구덩이를 파는 정도이며 그건 굳이 대지술을 활용하지 않더라도 해낼 수 있다. 삽과 대지술 중에 더 쉽게 마련할 수 있는 준비물은 누가 봐도 전자인 탓이다.
분명히 신비하고 실용적이나 그리 귀하지는 않은 능력인 탓에, 대지술은 지모신교 사람들이 아니면 잘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다.
대지술이 인간을 해치는데도 충분히 유용하다는 사실은, 지모신교의 침묵 속에서 비밀로 지켜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