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61화 (361/384)

몸이 뒤로 홱 쓸리는 느낌을 받았다. 흙뱀이 한껏 꼰 몸을 쭉 펴낸 것이다. 땅으로 만들어진 저 육중한 몸이, 도저히 땅이라고 믿기 어려운 속도로 황금궁을 들이박았다.

쿠구구궁. 대지가 운다. 흙먼지가 희뿌옇게 피어오른다. 흩날린 흙먼지는 호문쿨루스들의 날개에도 달라붙어 연소과정을 방해했다. 하늘을 날던 생긴 호문쿨루스들이 일제히 비틀거렸다.

그 속에서 한 가닥, 돌개바람이 흙모래를 잔뜩 머금고 솟아오른다.

바람은 모든 것을 녹여낸다. 향기도, 물도, 하물며 대지조차도. 세상 모든 것을 녹여 싣고 떠나며, 어느 한 곳에 고이지 않는 바람이야말로 진정 존엄하니.

흙과 모래의 소용돌이가 높게 솟아난다.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려는 것 같다. 인간의 감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지 옛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용오름이라 이름 붙였다.

회귀자도 비슷했다.

천지검곤, 뱀오름.

모래 폭풍을 검처럼 쥔 회귀자가 황금궁을 향해 외쳤다.

“이쪽도 준비하고 왔거든! 그렇게 싸우고 싶다면, 나랑 먼저 싸우든가!”

가장 격식 없는 선전포고가 끝나고 회귀자는 모래 폭풍을 휘둘렀다. 세상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뒤이었다.

하지만 예상하긴 힘들 것이다. 저렇게 휘두른 힘이 단순히 이목을 끌기 위한 쇼라는 것을.

물론 흙뱀과 함께하는 저 공격은 분명 위협적이나, 호문쿨루스 상대라면 모를까 황금경에게 닿기는 부족하다. 황금경과 같은 초자연적인 재해에는 규모로 맞부딪히기보단 공략하는 편이 좋다.

회귀자도 그걸 안다. 그렇기에 가진 최대한의 힘으로 공격한 거다.

세계가 맞부딪히는 그 틈으로 우리를 진격시키기 위해서.

“자, 이제 가죠!”

저쪽에서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황금궁까지 무혈입성. 이제부터는 도둑의 시간이다. 회귀자가 만든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갔….

“어리석군.”

나갔을 때, 눈앞에 강철 인간이 서 있었다. 전신을 갑주로 뒤덮은 호문쿨루스가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아, 진짜. 곤란하다니까. 평소라면 독심술로 미리 읽고는 후퇴하든 전진하든 할 수 있는데. 하필 다 호문쿨루스라서 생각이 안 읽혀. 평범한 도둑들은 다 이렇게 불편하게 도둑질하는 거야? 존경스럽다, 진짜.

“황금궁은 황금경의 영지이며, 황금경은 황금궁의 신. 안에 들어온 이물질을 놓칠 리 없잖은가.”

갑주를 입은 그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저 안에 인간의 몸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저 갑주는 움직이고 있는데.

중요한 건 인간의 내면이나 본질 같은 게 아니다. 저 주먹이 나를 깨부술 수 있냐 없냐 여부가 나의 태도를 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 갑주 상대로는 충분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그에 걸맞은 상대를 준비해뒀으니까.

갑주가 입을 열었다.

“더불어, 그토록 거대한 존재감을 갖고 숨어 들어올 수 있을 줄 알았나, 시조?”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않았더니 제멋대로 단정하는구나. 단순히 태양이 싫어 몸을 가렸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고작 너희를 상대로 모습을 숨길 것 같으냐?”

흙뱀의 어두컴컴한 입 속에서 새빨간 빛이 번뜩였다. 본래 어둠은 빛의 부재이나, 시조에 한해서는 힘이 된다. 흙뱀의 입에서 어둠이 독기처럼 흘러나왔다.

점차 공간을 차지하는 어둠. 그 속에서 티르는 마치 소풍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등장했다.

호문쿨루스들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가까이 접근하진 않은 채, 그들의 능력만 앞으로 내세웠다. 티르에게 지배당하는 걸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 와중, 갑옷이 말했다.

“…혼자인가?”

저 말뜻의 진의가 무엇일까? 티르의 전력을 확인하려는 건가, 아니면 아직 보이지 않는 나를 경계하는 건가? 전자라면 괜찮지만, 후자라면 좀 걱정되는데. 가능하면 나를 신경 쓰지 말았으면 해서.

아, 진짜. 황금경. 인간을 만들 거라면 제대로 만들 것이지. 왜 하자가 있어서 나도 생각을 못 읽게 만들었냔 말이야. 불편하잖아!

내가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무렵, 티르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양산을 어깨에 걸쳤다.

“호오. 나를 앞두고도 숫자를 헤아릴 여유가 있느냐?”

철컥. 철컥. 먼 곳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수십, 수백의 발소리가 겹친 것이었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가 진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딜 봐도 군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발소리가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이윽고 발소리가 티르가 있는 장소까지 닿았을 때. 흙뱀의 아가리 속에서 강철 갑옷을 입은 흑기사들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열, 스물, 서른…. 그리고 계속.

어둠으로 형체만 불러온 흑기사들이 아니다. 저들은 갑옷을 입고 있다. 그것도 황금경이 직접 만들어낸 지고의 갑옷을.

도구는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다. 황금경은 열국을 위해 준비했으나 노획하면 우리의 것. 오면서 주인 없는 갑옷을 전부 모아 티르에게 건넸다.

황금경이 만든 갑옷을 입고 티르의 권능으로 움직이는 흑기사들. 태생이 흙잡졸이라 그다지 강하지는 않겠지만…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면 잡졸도 태산이다. 결국 장비빨인 것이다.

“나는 홀로 군단이니. 가능하다면 헤아려 보아라. 중간에 더 늘어날지도 모르니, 집중해야 할 것이다.”

“피의 낙인인가!”

피로 낙인을 새겨 지배력을 행사하는 힘. 흡혈귀의 지배력이다. 세상과 자신의 경계가 옅은 흡혈귀는 자신을 나누어 지배할 수 있다. 소싯적 티르는 이 힘으로 수만에 달하는 권속을 이끌었다.

지금은 한참 부족하지만.

‘과거 같았다면 일만도 넘는 군단을 부렸겠으나… 지금은 혈마법의 힘을 빌려서도 백 남짓이 전부로구나. 권능이 확연히 약해졌어. 하나….’

“빈틈!”

갑주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주먹을 쏘아냈다. 무술보다는 발사와 비슷하다. 어깨와 주먹이 동시에 티르의 얼굴로 향한다.

티르는 반응이 좋은 편이 아니다. 회귀자처럼 천반경을 가지지도 않았고, 불사의 몸을 갖다 보니 생물체가 반드시 가져야 할 위기의식도 부족하다. 갑주의 공격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얼굴을 맞기 직전이었다.

맞아도 별로 상관없었겠지만 하필 머리라 거부감이 있었다. 뒤늦게 반응한 티르가 다급히 갑옷을 낚아챘다.

콰드득, 하고 팔이 뜯겨나갔다.

티르는 몸무게에 비해 힘이 과하다. 그래서 속도를 주체할 수가 없다. 팔이 흐릿해진 순간 굉음이 들리며 갑옷의 팔 한 짝은 뿌리 째 뽑혔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건 티르의 육신도 마찬가지라, 한순간 티르의 팔이 빠져 덜렁거렸으나… 그건 말 그대로 찰나. 재생하면 그만이다. 서로 피해를 입는 공격도 티르에게는 무의미.

“…있는 힘을 아낄 이유는 없지. 우격다짐을 좀 해야 쓰겠구나.”

티르는 그대로 갑주를 꿰뚫어버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상관없다. 어둠으로 안쪽을 채운 채로, 다른 호문쿨루스의 피로 낙인을 그리자… 갑주는 티르의 충실한 권속이 되었으니.

호문쿨루스가 일제히 권능을 쏟아냈다. 흑기사들이 돌격했다. 미리 보는 전쟁이 이곳, 황금궁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이조차도 미끼.

‘다녀오거라, 휴.’

티르는 존재감을 더욱 내보이며 호문쿨루스의 주목을 끌었다. 내 기척을 뒤덮기 위해.

그리고 티르가 싸우는 그보다 1m 아래에서, 나는 땅굴을 통해 나아가고 있었다.

고정관념이란 무서운 것이다. 뱀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생물이기에, 흙뱀이 뱀의 형태를 본떴다고 해서 역시 세세한 부분이 뱀과 같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그런데 권능으로 만든 흙뱀이 꼭 뱀과 똑같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애초에 뱀은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 사실부터 명심해두라고.

사실 회귀자가 만든 흙뱀은 땅에 반쯤 잠겨 움직이는 것이었다. 땅 위에는 회귀자와 티르가, 아래에는 나와 페루가 숨었다.

마술이란 의식의 빈틈을 찌르는 것. 진실을 알고 보면 속임수일 뿐이지만, 모르는 인간에게는 마법보다도 신비한 기술. 나는 그 기술을 황금궁에 몰래 들어오는 데 사용했다.

땅굴은 팔 때와 나갈 때가 문제긴 한데, 나에게는 그걸 타개할 수단이 있거든.

스페이드 10을 머리 위에 대며 부드럽게 밀었다.

“대지술.”

대지는 뚜껑이라도 된 것처럼 쉽게 열렸다. 내 머리 위 땅을 융기시킨 나는 그 위로 재빨리 올라섰다.

황금궁의 풍경은 격변해 있었다. 아까 방문했던 황금궁은 널따란 옥수수밭 한가운데 서 있는 마을회관이라는 목가적인 광경이었으나, 지금은 천막을 치고 울타리를 세운 전투 막사 같은 분위기였다.

낫을 든 농부 대신 무기를 든 경비병이 돌아다닌다. 아직 날이 밝은데도 화톳불을 피우고, 울타리를 짝지어 지키고 있다. 커다란 천막에서는 수용인원보다 명백히 많아 보이는 병사들이 줄줄이 걸어 나오고 있다. 잘 관리된 장비가 서늘한 빛을 낸다.

갑옷. 창. 방패. 그리고 군인. 교과서에 나올 법한 광경이다. 아마 황금경이 상상한 전쟁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겠지.

좋은 의미로는 정석적이고, 나쁜 의미로는 너무 틀에 박혔다. 아무리 무한한 자원을 가졌다고 해도 유연함이 부족하면 공략당하기 마련인데.

그러나 군국과 전쟁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인간은 학습하는 생물이니까.

호문쿨루스라서 학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어쨌든. 저기를 뚫고 나가야 하는데.”

가능하려나. 독심술이 있어도 어려워 보이는데 하필 저 병사들 생각도 안 읽힌다. 티르에 비하면 잡졸들이지만 독심술을 제외한 내 전력은 저들과 비슷한 수준. 하물며 갑옷을 깨부술 힘도 없다.

회귀자와 티르가 시선을 끌어도 이정도인가. 칫. 어쩌지.

“…불가능해.”

“어라. 페루? 따라오셨네요?”

뒤를 돌아보니 내가 만든 구멍으로 페루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오네? 고유마도 발사대라서 안전하게 안에 있는 것도 좋은데.

“도와주러 왔어요?”

“…방해하러 왔어.”

“이왕 방해해주실 거라면 고유마도라도 써 주시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소리만 지른다면, 저들이 너를 알아챌 거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어라? 그러게?

티르랑 회귀자가 시선을 끌고 있으면 텅텅 빌 줄 알았다. 무주공산에 깃발 하나 콱 박아넣고 승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설마 여력이 있을 줄은 몰랐지.

아닌가? 텅텅 빈 건데 내가 너무 약해서 빈 통도 못 뚫는 건가?

“미안한데, 별로 협박이 안 돼요. 어차피 들키지 않고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후퇴한다면, 입 다물게.”

“그건 나중에. 최후의 방법을 쓰고 나서요.”

난공불락의 성을 공격하는 건 멍청한 행동이지. 이럴 때는 목마에 숨어서 안에 들어가야 한다. 결심을 끝마친 나는 벌떡 일어섰다.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의 창끝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거참 반응도 빨라. 나는 저항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양손을 치켜들었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저는 저쪽의 요구사항을 가져온 전령….”

“적. 죽인다.”

“기다리라니까! 손 든 사람 죽이는 건 반칙이야! 항복했잖아!”

목마는 무슨. 바로 칼을 들이민다. 냅다 뒤로 물러났지만 병사들은 똑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나를 점차 압박해왔다.

“적. 죽인다.”

“적. 죽인다.”

“적. 죽인다.”

눈동자에는 일말의 이성도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단조롭다. 혹시 이 병사들은 회주를 본뜬 게 아닌 평범한 인간의 호문쿨루스인가?

쳇. 회귀자와 티르에게 전력이 집중된 건 맞나 보네. 회주가 없는 걸 보니 말이야. 문제는 내가 평범한 호문쿨루스도 뚫지 못한다는 거지만!

점차 다가오는 창날. 피할 곳은 없다. 이미 뒤쪽에도 천막이 솟아나고, 거기서 병사들이 기어 나오고 있다. 무슨 천막이 인간 공장이냐고. 천막에 인간이 가는 거지, 왜 인간이 천막에서 나오는데.

독심술도 통하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 당장 몇 명을 해치워도 이어 몰려오는 물량에 짓눌릴 게 뻔하다.

그렇지만, 이때를 위해 준비했지. 최강의 목마를.

나는 내 마지막 카드를 목 높여 불렀다.

“엘릭! 나와요! 정식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외침도 무색하게, 내 목소리는 금방 병사들 갑옷 부딪히는 가운데 묻혀 사라졌다. 퇴로라고는 땅속에 난 구멍밖에 없는 상황.

‘…나올 리가. 이쯤 단념한다면, 구해주지 못할 것도 없는데….’

유일한 관객이 안쓰러움을 느끼던 그때였다.

“-멈춰라.”

단 한마디, 나지막한 명령. 그 목소리에 닿은 병사들이 멈추었다. 내가 외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

말 그대로 석상처럼 멈춘 병사들. 그 가운데, ‘엘릭’이 병사들을 헤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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