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내! 돌려내라고!”
여인의 외침은 아무 의미 없는 원망이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아무리 악쓰고 울부짖어도 돌이킬 수 없으니.
그러나.
한 기억이 데모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쳤다.
‘네가 쓴 금으로 돌려내 보거라.’
황금경의 두 번째 과제. 연금술을 만들었던 그 시련.
무언가를 만드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사모하는 왕의 한마디는 그의 가슴 속 깊숙이 새겨져 있다. 다 죽어가는 그의 몸에 마지막 활력이 깃들었다. 흐릿해가는 정신 속에서 데모는 해야 할 일을 되뇌었다.
…돌려내자. 금국을. 우리의 왕을 위해서.
어려울 것 없다. 이미 한 번 해본 일이다.
연금술은 처음부터 돌려내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니까.
다만, 과연 그가 돌이킬 수 있을까? 이 지옥을 원래 아름답고 부유했던 금국으로 돌려낼 수 있을까? 위대한 왕 아래 모두가 합심해서 움직이는 장인과 기술의 나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지금 그는 이렇게 묶여, 죽기 직전까지 고통받고 있는데.
데모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다.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남은 시간을 모두 써도, 죽을 힘을 다해서 짜내도 기껏 만들 수 있는 건 하나.
그렇다면. 하나밖에 만들 수 없다면. 이 나라를 원래대로 되돌릴 ‘무언가’를 연금하면 되지 않는가.
데모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죽음이 눈앞까지 임박한 현재, 남은 시간은 촉박하다. 데모는 무릎을 꿇은 채 심상을 그렸다.
만물은 작은 블록으로 되어 있다. 황금이든, 강철이든, 혹은 모래 부스러기든. 그 블록의 종류는 모두 똑같다. 단지, 어떻게 쌓냐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그렇게 다르게 쌓이고, 쌓이고, 쌓인 결과. 세상은 다양한 물건으로 가득 찬다. 어느 하나 같은 게 없어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모두 시작은 똑같다.
저 집도, 땅도, 외로이 선 나무도, 그 아래 흐르는 개울물도. 그걸 마시는 들짐승도.
하물며 사람조차도.
그게 어떤 형체가 될지는 데모도 모른다. 하나 그것은 영원히 금국을 떠돌며 이 저주받은 땅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리라. 다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자신의 왕에게 진상하리라.
왕의 신하인, 황금경이 되어.
심상이 괴물처럼 부풀어 오른다. 만물을 바꾸는 힘이 이젠 주인을 향해 그 권능을 뻗는다. 죽어가는 주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고유마도. 엘릭시르(Elixir).
정신을 차려보니 작은 공방에 있었다.
한때 금국의 왕 엘릭은 제자를 여럿 두었다. 그녀는 궁궐 안에 공간을 두고 제자들을 보살폈다. 작은 공방이 딸린 방에서 제자들은 제 능력을 갈고닦았다.
여러모로 황금경에게 추억이 가득한 방이다. 무엇보다, 금편 한 닢으로 가득 채웠던 방이 바로 이곳이니까.
그 한가운데, 황금 종 앞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약간 나이 든 황금경이다. 그는 죽었을 때와 똑같이 목에 칼을 차고 족쇄를 매달고 있다. 이게 심상 속 공간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는 죽어서도… 자기가 죄인이라 여기는 모양이다.
“…누구십니까.”
황금경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앞에 앉았다.
“평범한 도둑놈입니다. 유품을 훔치러 왔는데요. 뭐 여기는 시련이나 시험 없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저에게는 아무런 미련이 없으니까요.”
말하는 와중에도 황금경은 여전히 황금 종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강철 종을 그대로 황금으로 바꾼 것. 그의 가장 찬란했던 기억을 상징하는 물건.
순수했던 그와 그녀를 이어주었던 첫 번째 진상품.
미련이 뚝뚝 떨어지면서 없다니. 참,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정말 없다면 사념이 남았을 리 없죠. 한 번 털어놓는 게 어때요?”
“설명을 잘못했군요. 제 미련은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설사 폐하와 닮은 가짜를 데려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폐하는 돌아오시지 못하니까요.”
라고 하면서 잘 털어놓고 있다. 하긴, 사념이 누군가 알아달라 있는 건데 말하지 않을 리 없지.
시간이 걸릴 뿐, 여기까지 도달했다면 어쨌든 전부 읽게 된다. 나는 차분히 심상을 곱씹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돌아오지 못하는 걸 아는데, 왜 이 궁궐을 지키고 있는 거죠? 주인 없는 궁궐을 지킬 이유가 있나요?”
“제 죄를 전부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
“그렇습니다. 죄. 찬란한 나라를 전란으로 이끌고, 황금의 빈곤을 만들어 만인을 고통받게 한 죄.”
황금경은 참회하듯 말을 고했다.
“금국은 낙원이었습니다. 위대한 엘릭 왕의 치세 아래, 뛰어난 장인들이 나라 곳곳에서 활약하는 강철의 나라. 그 활기차고 밝은 나라를 구렁텅이로 빠뜨린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황금을 찍어내서요?”
“…그렇습니다. 황금이 가치 있는 것은, 단순히 황금이 귀하기 때문. 그러나 저는 단순한 진리조차 모르고 황금을 만들었습니다. 계속, 계속. 제 손으로도 모자라, 다른 연금술사까지 길러내면서까지.”
황금경 한 명이었다면 사태가 이리 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금경은 진심으로 황금이 나라를 부유하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토록 귀중한 지식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그조차 엘릭을 따라한 것이겠지만, 개인에게 국한된 왕의 권능과는 달리 연금술은 마신이라. 황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황금경은 초췌한 얼굴로 황금 종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는 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대죄인. 이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저는 금국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들어야 합니다. 돌려내야 합니다. 그게 비록 비망록에 불과할지라도.”
그래서 황금경은 자기 손에 닿는 범위에 금국을 만들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가장 찬란한 순간의 금국을 재현했다.
웅장한 성. 융성한 도시. 비옥한 밭까지. 금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해도, 황금궁 안에는 언제나 금국이 있었다. 비록, 단 한 명이 만든 나라라 온갖 하자가 있었을지언정.
그랬군. 황금경. 네 소망은 금국을 다시 만드는 거였구나. 다 좋아, 다 좋은데….
흠. 고작 그 정도인가? 이게 네 최선이야?
일단 본론을 꺼내기 전에, 대화를 조금 살갑게 해보자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당신 탓은 아니에요. 황금이 많아지면 도리어 가난해질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위로 따윈 집어치우십시오. 몰랐다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원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위로? 무슨 소리를. 나는 블러핑을 칠지언정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진 않아.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라고.
“제가 허튼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려요? 아니요. 전혀.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어요.”
진심이라고. 이쪽이 훨씬 더 나아. 괜히 고민하다가 허무하게 목숨을 빼앗긴 어느 무저갱의 대종사보다는 황금경이 몇 백, 아니, 몇 천 배는 낫지.
왜냐면, 했으니까. 주저하다가 선택권을 빼앗기고 미련만 남은 그 마신과는 다르니까. 결국 인간의 업적으로 이뤄냈으니까!
“당신이 황금을 찍어낸 덕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늘어났으니까요!”
내 말이 그토록 이외였을까. 황금경은 종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연금술을 만든 마신.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거인. 그는 인간이나, 이 세상을 비가역적으로 바꾸어 놓은 마신이다.
그렇지만 마신에 이르더라도, 아무리 큰 업적을 남겼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아무리 황금경이라고 해도.
바깥에서 보았던 어릴 적의 얼굴. 거기에 이십여 년의 세월을 끼얹고 물심양면 끔찍한 고통을 가하면 이 얼굴이 나타나지 않을까. 지치고 괴로워하는 청년의 얼굴은 마신이라 하기엔 너무 평범했다.
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몰랐어요. 당신이 그 미친 짓을 해내기 전까진, 황금이 그토록 쓸모없다는 건 세상 그 누구도 몰랐다고요! 고작 1년만에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보다 더 많은 황금이 생산되었을 때, 나라와 경제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더욱! 심지어 미래를 보는 성황청의 예언자들조차도 말이죠! 그들도 '볼'줄만 알지, '알'진 못했으니까!”
예언조차도 인지를 필요로 한다. 보아도 알지 못하면, 그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지 못하면 알 길이 없다. 성녀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마신은, 성황청의 성녀조차 간파할 수 없다. 기껏해야 후속조치를 하는 게 전부였다.
만인의 죄를 거두어가는 성황청도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무지는 죄가 아닙니다.”
황금경은 말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내 말을 위로라고 여기고는 사양하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렇게 친절한 줄 아나 보지.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아요? 아니, 달라요! 그 행위가 죄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 일단 존재해야 해요! 당신은 죄가 될지도 모르는 행위를 찾아낸 거라고요! 무언가를 하기 전엔 그게 있는지조차 몰라. 알기 위해선 일단 찾아야 해. 무지의 장막을 걷고 일단 찾아내야 해. 먼 옛날 원시의 인간들처럼, 황금이 무엇인지 알려면 일단 황금을 캐내야 한다고요!”
“그 결과 수많은 인간이 죽고,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고, 나라가 비탄에 빠져도 말입니까.”
“킥! 당신이 연금술을 찾아내서 나라가 망했다고요?”
마신이라도 거만한 건 어쩔 수 없나. 아니, 오히려 마신이니까 저리 거만한가?
차라리 진짜였다면 말이라도 안 해.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당신, 진짜 오만하군요! 인간의 왕도 당신만큼 오만하지는 않아요! 마신이라 그래요? 금국에서 일어난 모든 죄악을 마시고 죄악의 왕이라도 되게요? 아니. 이미 되려고 했죠? 그러니까 황금경이라는 이름을 달고 열국을 배회하는 거지!”
모든 게 자기 책임? 인간의 왕에 출마라도 할 거야? 금을 만든 건 그가 맞지만, 금국에서 일어난 모든 죄악을 다 책임지겠다니. 그게 맞냐 틀리냐를 떠나 가능한가?
한참 끅끅거리며 웃던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였다. 황금경을 배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어 말하기 위해서.
“어떤 죄요? 당신이 황금 공방을 만들겠답시고 밭을 갚아 엎었나요? 그러다 먹을 게 없어지자 황금 공방을 만들자고 제안한 동료를 살해했나요? 굶주림에 버티다 못해 피붙이를 잡아먹었나요? 황금의 저주가 알려지자,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대신 냅다 현물을 독점하고 꽁꽁 숨겨서 자기 이득만 극대화시켰나요? 혼란이 생긴 틈에 권력을 차지하려고 철로 무기를 만들고 정변을 일으켰나요? 광기에 찬 백성을 선동해서, 연금술사들을 죽여 되돌릴 기회조차 박탈했나요?”
그의 심상 속에 있는 것만 읽어도 이러니, 실제 금국에서는 더 끔찍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났겠지. 진정 인세의 지옥이 탄생했을 것이다.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다른 나라가 침략해서도 아니고, 끔찍한 재난이 찾아온 것도 아니고. 황금의 저주로 나라가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기울었을 줄은.
그런데.
“그 모든 게 당신 탓이라고요? 당신, 마신이다 뭐다 치켜세워주니까 진짜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줄 알아요? 생과 사를 조율하고, 인간마저도 자기 뜻대로 조율하는 절대자라도 된 것 같아요?”
나타난 모든 죄악이, 황금경의 죄악일 수는 없다.
“인간의 왕으로서 말씀드리죠. 당신은 필요 없어요. 그것도 인간이에요.”
상대가 누구든 나에게는 생각이 읽히는 똑같은 인간일 뿐이며, 그래서 나는 평범하다.
아니,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있어 평범하다.
“하필 금국이 장사치들 많은 나라라 잇속에 밝고 머리가 잘 굴러가서 말이죠. 그때그때 자기 이득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결과죠. 황금의 축복이 찾아왔을 때는 그에 한껏 편승했다가, 저주로 바뀌는 순간 다 저버리고. 그것도 금국 모두의 결정이죠. 무지의 죄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있어요.”
아, 혹시 오해할까 봐 나는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저는 성황청이 만든 죄라는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요! 짐승에게 죄는 너무 사치잖아요?”
인간은 짐승이고 나는 그들의 왕. 그래서 누구든, 무엇을 하든 전부 긍정한다. 바람이 어떻든 간에.
이제야 좀 '나'를 이해한 건지, 황금경은 내 말에 느리게 반응했다.
“…그.”
“착각하지는 마세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당신에게 무시당한 수만 명의 인간을 위해서야. 당신은 금국의 인간들을 제 의지조차 갖지 못한 허수아비로 봤죠. 운명이니 뭐든, 큰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고 죽어갈 이들로. 큭. 그러니까 당신이 만든 세상이 이 모양이지.”
나는 피식거리며 양팔을 펼쳤다. 지금은 심상 공간이라서 보이진 않지만, 이 밖은 분명 황금궁일 것이다. 그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금국의 모습.
논밭마다 곡식이 한가득 영글고, 웅장한 도시는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성벽은 마치 세상을 단절할 듯하다.
그렇지만.
그 안에, 사람은 없다.
거기서 보이지.
“딱 보여요. 당신이 만든 금국. 호문쿨루스밖에 없잖아요. 그마저도 당신이랑 말이 좀 통하고 비슷한 심상을 가진 회주들의 호문쿨루스만 이성의 한 조각이 있고, 나머지는 주어진 명령밖에 못 하는 허수아비. 그러니까 도리어 웃기는 거지. 모든 금국민을 자기 의지도 없는 허수아비로 보면서! 뭔 금국이 소중하다, 뭐다!”
“…아니야!”
“증명해봐!”
내가 버럭 외치자, 황금경은 조금 주눅이 든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남았는지 손을 뻗어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 모습은… 엘릭의 것이었다. 특히 섬세하게 묘사되고, 몸매며 얼굴의 아름다움이 부각된 그의 상상 속 엘릭.
나는 코웃음을 쳤다.
“양심이 있어요? 저게 어딜 봐서 사람이에요? 당신이 잘 때 껴안고 자는 베개잖아요.”
“그, 그런 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