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함은 황금경이 만든 저거너트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황금경에게 대적하게요? 들이박기라도 하게요?”
“…응.”
아주 마음에 드는 작전인데.
멍청하지 않으면 짐승이 아니지. 좋아, 죽지 않는 선에서만 도와줄까.
페루는 구해주지 못한 이들을 떠올리며 자책했지만, 제대로 따지면 그녀가 구한 목숨이 훨씬 더 많다. 그녀가 도시를 해방하지 않았다면, 황금경의 관심을 끌지 않았다면 탈출한 승냥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강철 파편에 휩쓸리긴 했으나 운 좋게 황금경 반대편으로 도망친 이들도 있었고, 현명하게도 지붕이 있는 탈것을 선택한 이들은 상당수 목숨을 구하고 황금경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이쪽이다! 모두, 간격을 두고 이쪽으로 편대를 이뤄!”
억압회주 헥토는 살아남은 승냥이들을 모으고 있었다.
전쟁이 결정되어도 그의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황금경이 하사한 기계로 곡식을 수확하려는 도중,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차리고는 부하들을 모았다.
황금경의 곡식을 자주 접하는 억압회주의 부하들은 황금경에게 저항력이 없다. 억압회주의 빠른 대처가 아니었더라면 절반 이상 영문도 모른 채 흡수당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헥토가 안도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생겨나는 대로가 어디론가로 향한다. 헥토가 그 방향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저 방향은, 클라우디아…!”
유난히 가혹하게 변한 황금경이 도시를 지나쳐 클라우디아로 향하고 있다. 저게 우연이라고 해도 문제지만, 의도한 거라면 더욱 끔찍한 일이다. 황금경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뜻이니까.
미리 클라우디아에 발 빠른 부하를 보내놨지만… 황금경 역시 그에 못지않게 빠르다. 소식이 도착할 때쯤이면 황금경도 클라우디아 지척일 것이다. 과연 탈것도 충분치 않은 클라우디아가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까.
“제기랄! 진작 한 명 보내놨어야 했는데! 사고를 수습하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어!”
이전처럼 평화로운 삶은 더 없을 것이다. 승냥이들은 열국을 떠도는 재앙신을 피하기 위해 더욱 혹독한 유목생활을 감내해야 하리라.
그것도 클라우디아를 지켰을 때 이야기지만.
“저 길이 클라우디아까지 이어지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헥토 씨!”
탈출한 승냥이들 틈에 숨어들었던 나는 그의 지척까지 다가와 손을 흔들며 외쳤다. 헥토는 나를 알아보고는 어안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군국의!”
“네! 군국의 평화 사절입니다!”
혼란스러워하기도 잠시, 헥토는 내 웃는 얼굴을 향해 왈칵 화를 냈다.
“너희들이 황금경을 저렇게 만들었나!”
“황금경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난 저희가 무슨 수로요? 오히려 황금경이 저희에게 뭔 짓을 했죠!”
내 단 한 마디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도 단순히 원흉을 찾고 싶어서 내뱉었을 뿐 딱히 깊게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내가 건드려서 폭주한 게 맞긴 하지만. 그건 비밀이고.
“당신도 직접 봐서 알잖아요? 황금경께서 금국의 적에게 선전포고했다는 사실을. 그런데 어쩌나. 열국도 거기에 포함되었나 봐요! 하하! 평화를 거절하더니 꼴 좋다!”
“놀리러 왔나?”
“아니요? 이건 부수적인 목표고, 진짜 목표는 따로 있어요!”
“바쁘다. 쓸데없는 말은 나중에…!”
“당신은 저희를 사실상 배신했지만, 그래도 저희는 여전히 평화 사절!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황금경을 막아드릴게요!”
감동한 헥토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지 급박한 건 알겠는데 그런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지 마. 부담스럽다고.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어쨌든 시간이 부족하니, 나는 현재 상황을 간추려서 설명했다.
“잔녹회주가 가고 있어요. 그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황금경에게 도달할 거예요. 그런데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대요.”
승부는 간단해졌다.
페루가 황금경에게 닿아, 저 황금 종을 녹슬게 만들면 승리. 그렇지 못하면 패배.
이기면 황금경을 잃고, 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해밖에 없지만 세상일이 은근히 그렇지. 제로섬 게임도 배부른 소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
“페루가 황금경에게 닿을 수 있도록, 무엇이든 해봐요. 시선을 끌든, 압력을 가하든.”
억압회주가 몇 초나 벌진 모르겠지만, 그조차도 소중하니까 말이지.
‘고기 방패가 되라는 말이군. 잔녹이라. 분명 그 아이는 황금경께 대적할 수 있겠지. 하나, 나나 다른 회주는 황금경께 대적할 수 없어. 연금술은 그분의 것이니까.’
헥토는 고민했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목숨에도 감가상각은 있어서, 오래 사용한 노인은 자기 목숨을 비교적 싼 값에 내놓곤 한다.
아무리 애국심과 거리가 먼 열국인이라고 해도, 지낸 세월만큼 애착이 커지는 법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열국인이었고, 늙은 지금까지 열국에서 살아온 헥토에겐 이미 자신과 나라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비하면 쪼그라든 생명은 너무나도 가볍다.
무거운 마음과 가벼운 생명.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끝마친 헥토는 결심하곤 말했다.
“잔녹회주는 어디 있나?”
“저기요.”
나는 손가락으로 저편에 난 동산을 가리켰다. 헥토는 그 방향을 주시하다가, 이내 미간을 좁히고는 두리번거렸다.
“…언덕 뒤에 숨어있나? 황금경이 근처를 지나면 기습하려고?”
‘기습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황금경께서 그쪽으로 다가갈까?’
동산이라. 억압회주에게도 그렇게 보인다면 작전 성공이겠지.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조금만 지켜보세요. 그럼 알 테니까요.”
헥토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동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초 지나고 나서야 내가 왜 동산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흙동산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황금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으니까.
땅은 한 덩이로 보이지만 사실 얇게 층을 쌓아 만들어진 직조물이다. 대지모신은 수만 년에 걸쳐서 신체(神體)를 가릴 옷을 한 땀 한 땀 지어냈으니.
회귀자는 지잔의 권능을 써 그 옷을 한 꺼풀 벗기고, 그 아래에 황금함을 숨겼다.
‘끄으으으응! 아무리 지잔이라도…! 땅을 들어올리는 건, 좀, 힘드네…!’
지잔으로 땅을 한 겹 들춘다. 그 아래 생긴 공간으로 황금함이 질주한다. 황금함은 치환이동으로 땅을 통과하며 이동하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물론, 땅을 들어올리는 회귀자는 상당한 집중력과 기력을 소모하고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회귀자 걱정이겠지.
황금경의 경로를 향해 동산이 들썩이며 움직인다. 뻗어나가는 대로를 마치 거대한 두더지가 땅속에서 습격을 감행하려는 것 같다. 두 궤적이 교차하는 그 순간이 헥토가 나서야 할 타이밍.
‘속도는 거의 비슷해. 저 거리면 언제 도착하지? 내가 출발한다면…!’
계산을 끝마친 헥토가 다급히 외쳤다.
“출발한다! 나팔을 들어라!”
그의 곁에 있던 부하가 커다란 나팔을 들어 올렸다. 헥토는 고유마도로 나팔에 압력을 가했다. 공기가 복잡한 내부 구조를 타고 흐르다, 관을 지나며 뱃고동 같은 소리를 냈다.
빠아아앙. 나팔이 길게 울렸다. 신호를 들은 회주의 부하들이 자기 탈것에 올라타면서도 의아해했다.
“출발한다고? 어디로?”
“회주님?! 어디 가십니까?”
모르는 척 되물으면서도 사실 모두가 예상하고 있다. 단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확인하려고 할 뿐.
헥토는 그의 저거너트에 시동을 걸며, 그보다 우렁차게 외쳤다.
“시간 끌러! 황금경의 시선을 끌 것이다!”
“네?”
“멍청하게 되묻지 마라! 너희들 설득할 시간 없어! 너희! 배기통을 장착해라!”
억압회주의 고유마도는 금속에 압력을 가하는 힘. 헥토는 주로 피스톤을 써 고유마도를 힘으로 바꾼다.
그의 저거너트, 강철 심장 역시 마찬가지다. 수천 개의 피스톤과 실린더로 만들어진 강철 심장이 거칠게 진동했다.
“공짜로 목숨을 걸라고 하지 않겠다. 그건 우리 방식이 아니니까!”
특이하게도 헥토의 저거너트는 오직 엔진뿐이다. 거기에 무언가를 매달지, 어떤 용도로 바꿀지는 순수하게 헥토의 재량에 달려있다. 강철 심장은 팔이 몇 개인지, 다리 대신 바퀴가 달렸는지, 낫으로 풀을 벨지 톱으로 나무를 자를지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힘을 제공할 뿐.
지금까지 헥토는 황금경이 고안한 옥수수 수확기를 매달고 있었으나, 지금 ‘옥수수를 수확하기 위한 부품’을 전부 떼어냈다. 덜컹거리며 떨어진 심장부로 그의 측근들이 각자 맡은 위치에 부품을 가져다 댔다. 보다 커다란 바퀴, 스프링 달린 연결부, 그리고 수십 개의 배기통까지.
완성된 저거너트는 투박하고 우악스러운 차체를 자랑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거친 소리가 배기통에서 들려왔다.
“대신 대가를 주마! 내 돈으로 너희 목숨을 사겠다!”
구르릉. 강철 심장은 혈류 대신 기류를 뿜어낸다. 뜨거운 바람이 그의 저거너트를 휘감으며 동력으로 변한다. 배기구에서 이글거리는 열풍이 몰아친다.
“나를 뒤따라온 이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모은 재산 전부를 동등하게 나눠주마! 이는 억압회주로서 하는 말이다!”
헥토는 그 말만 남기고는 강철 심장의 고삐를 풀었다. 저거너트가 포효하고 바퀴가 땅을 찢어발기듯이 긁는다. 뒤로 폭풍을 만들어낸 저거너트는 바람과 하나가 되어 튀어나갔다.
승냥이들이 술렁거린다. 그들 대부분 억압회주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이다.
억압회주는 황금경의 최측근. 오랜 시간 식량을 가공해 팔며 돈을 벌었다. 헥토의 재산은 감히 짐작할 수가 없어, 부하를 천 명 가까이 두고도 남아돈다.
“정말일까?”
“설마. 어딘가의 뜨내기도 아니고, 회주님이 약속을 어기는 걸 본 적은 없어.”
목숨은 아깝다. 그러나 평생을 일해도 벌지 못하는 돈이 걸려있다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평생의 시간을 떵떵거리면서 살 테니까.
“에잇, 몰라! 죽으란 법도 없잖아!”
“한탕이다! 한탕만 제대로 하면 이 빌어먹을 나라를 뜰 거야!”
“바보냐? 돈 많은데 나라를 왜 떠? 클라우디아 가서 떵떵거리면서 살면 되지!”
잃을 게 목숨뿐인 승냥이들이 호기롭게 외치며 자기 탈것에 올라탔다. 짐노새인지 짐말인지 모를 짐승에게 채찍을 넣고, 삐걱거리는 엔진에 불을 붙인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억압회주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가자! 한 번 뒤지지 두 번 뒤지냐!”
“아까도 어떻게든 살았잖아? 한 번만 더하면 돼!”
스스로를 고양시키기 위해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뱉으며, 열국의 승냥이들이 일제히 헥토를 뒤따랐다.
수백 개의 탈것이 메마른 광야를 질주한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소음과 먼지를 몰고 질주하는 그들의 목표는 황금궁.
몇 번의 변모를 거친 황금궁의 모습은 이제 보다 궁궐에 가까워져 있었다. 두꺼운 성벽으로 자신을 둘러싼 요새가 텅 빈 땅에 서 있다. 높은 성벽에는 작은 틈 하나 보이지 않고, 뾰족한 첨탑 위에는 강철 날개를 매단 새가 날아다닌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요새가… 움직이고 있다. 믿기진 않지만, 몸 가벼운 승냥이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는 속도였다.
“더! 더욱 밟아라!”
헥토가 더욱 출력을 올리며 닦달했다.
목표는 교란인데 이대로는 다가가는 것조차도 어렵다. 조금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뒤따라오는 승냥이들을 본 억압회주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의 부하마저도 따돌리며 앞서나간 그는 저거너트를 조작해서 대포를 꺼냈다.
“황금경이시여! 진정으로 열국을 버리시겠다면!”
화약 대신 고유마도를 쓰는 헥토는 포신이 길수록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탓에 억압회주의 대포는 크기도 저거너트 급이었다. 10m는 넘어 보이는 포신이 감히 황금경을 겨눈다.
“제 시체를 밟고 가십시오!!”
퉁. 폭발보다는 북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헥토의 포탄은 정확히 황금궁을 향해 날아갔으나, 직격하지는 않았다. 황금궁에 닿은 순간, 포탄은 마치 물에 잠기듯 흡수되었으니까.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그는 충분히 시선을 끌었다는 점이다.
화답하듯 황금궁의 창문을 부수며 무언가가 불쑥 솟아났다. 마치 격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듯, 헥토의 것보다 몇십 배나 더 크고 긴 대포였다.
저딴 게 실존할 리 없다. 저 길이면 제 무게에 못 휘어지는 게 순리다. 그러나 황금경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대포마저도 연금해낸다.
그렇다면 쏘아낼 수도 있겠지. 헥토가 급히 명령했다.
“모두, 회피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