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73화 (373/384)

“…내 힘이 아니야. 힘은 유품의 것.”

“황금경의 힘을 쓴다는 거네요? 그러면 황금경이잖아?”

“…이 힘으론, 부서진 것밖에 못 고쳐. 황금경이 아니라 내가 쓰니까.”

도구에 무한한 힘이 남아있다고 해도 그걸 쓰는 주체에게는 한계가 있다. 데모와 엘릭의 사념이 남아있던 황금경과 비교하면 페루에겐 손색이 있다. 나처럼 말이지.실제로 황금경도. 세상 모든 걸 만들 수 있었어도 상상력의 한계로 인해서 도시 미관을 잘 꾸밀 순 없었지. 세상 누구나 부족한 부분은 있는 법.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하긴 한데요~. 음, 이걸 어쩌나.”

힐데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꼭 명확한 증거가 없더라도, 페루가 황금경에게 접근한 뒤 황금궁이 무너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딱히 의심할 이유는 없다. 황금경의 힘을 쓴다면 더더욱.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광경을 직접 본 힐데나 믿을 수 있는 거지, 나라 차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페루. 한 나라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대표를 자처하는 개인보다는 그 사람을 대표로 인정하고 따르는 다수가 더 중요해요. 군국에 왕은 없어도 모두가 총사령부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요. 페루가 아무리 황금회주라고 일컬어도 누가 믿겠어요?”

“…억압회주가 있어.”

“그 사람 죽었어요. ‘제’가 두 눈으로 지켜봤는데, 시선을 끈답시고 황금경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죠.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뜻밖의 소식에 페루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감정에 호응하듯 황금 종도 찌르르르-하고 울었다. 한참을 어물거리던 페루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헥토 님이.”

“거룩한 희생이었어요. 덕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일단 목표는 달성했으니까요! 그래서, 이젠 어쩌죠?”

힐데가 페루를 몰아붙이는 게 단순히 그녀가 심술궂어서는 아니다.힐데는 여전히 군국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군국에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도록 행동한다. 지금 힐데는 휴전 협정을 하면서 가능한 많은 것을 뽑아내야 하는 입장. 페루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우위에 서려는 거다.

“자칭 황금회주. 어쩌면, 황금경을 직접 소멸시켰을지도 모르는! 당신을 누가 따를까요? 따른다고 해도 과연 믿을 수 있을지!”

…물론, 그렇다고 심술궂지 않다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힐데가 페루를 여러모로 몰아붙이고 있던 도중, 마침 뒤쪽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헥토를 따라왔던 승냥이들이 뒤늦게 찾아와서는 기웃거리고 있었다.그중 한 명, 다른 승냥이에 비하면 훨씬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명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다가왔다.

“잔녹회주 님. 억압회주 님의 비서인 데카입니다.”

도시에서 몇 번 보았던 헥토의 부하였다. 얼굴을 알아본 페루는 침통하게 대답했다.

“…억압회주는, 그.”

“압니다. 저도 직접 보았으니까요.”

데카라 불린 이는 존경하는 회주를 향해 추모를 보내듯 짧게 눈을 감고는 이어 말했다.

“회주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싶지만, 저 승냥이들 때문에 그럴 여유조차 없습니다. 헥토 님이 돌아가신 순간, 비겁하게도 바로 저에게 와서는 그분의 재산을 내놓으라고 따지더군요.”

거리는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충분히 커서 뒤따라 온 승냥이들도 다 들을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에 승냥이들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억압회주는 그를 따라오면 우리에게 재산을 나눠주겠다고 했소!”

“그 말 듣고 따라왔으니 당연히 우리 몫이 있어야지!”

승냥이들의 아우성을 충분히 끌어낸 데카는 보란 듯이 소리쳤다.

“보셨습니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주제에, 황금경을 막으려는 여러분을 돕지도 않은 주제에! 단순히 헥토 님의 뒤를 따라갔던 것만으로도 몫을 요구합니다! 이게 무슨 노릇입니까? 심지어! 회주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쳤다고 거기까지 가? 가면 죽잖아!”

“뒤질 걸 알고도 벽에 머리를 박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온갖 야유와 욕지거리가 데카에게 쏟아졌다.

사실만 따지면 승냥이의 말이 옳지만, 헥토가 죽은 지금 와서 몫을 외치는 승냥이들은 인면수심의 악마처럼 보였다. 데카는 승냥이들의 외침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고는 페루에게 성토했다.

“잔녹회주 님. 황금경을 막으려고 나선 분은 잔녹회주 님입니다. 회주님께서 우리를 구했고, 억압회주 님의 뜻을 이뤄냈습니다. 만일 억압회주 님의 재산과 상회를 분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잔녹회주 님 뿐입니다.”

“…나는.”

“잔녹회주 님. 비록 억압회주 님이 돌아가셨다지만, 우리 드럼상회는 열국의 식량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공중분해되었다간 열국은 굶주릴 겁니다.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으음.”

데카는 진심으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듯이 보여서 페루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고민하는 듯한 페루에게 데카는 은근히 한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잔녹회주 님도 세력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드럼 상회는 잔녹회주 님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드럼상회의 회주가 되라고, 넌지시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속마음이 궁금해서 생각을 읽어봤다.

‘여기서 고분고분 상회를 해체하고 재산을 나눴다간 뭣도 안 돼! 우리는 열국을 꾸려가고 있어. 헥토 님이 죽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드럼상회여야 해! 우리 아니면 열국을 굴러가게 할 수 없어!’

데카는 분명 진심이었다. 약간 꺼드럭대려는 마음과 다른 승냥이와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페루를 새로운 회주로 앉혀서라도 이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진짜다.페루는 벌써 고민이 많아 보였다. 열국의 왕이 되자마자 한쪽은 휴전 협정 하라며 압박하는데 다른 한 쪽은 유산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죽을 지경이겠지. 거기다 몸 상태는 최악인데 말이야.

페루는 힘겹게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네? 그걸 왜 저에게.”

“…달리, 물을 사람이 없어.”

주위를 두리번거린 페루가 침울하게 대답했다.그건 그렇네. 힐데는 군국 편이고. 회귀자는 무력 담당이고. 그나마 도움이 될 헥토는 죽어버렸으니까.

“저도 딱히 대답할 게 없는데요.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다른 이라면.”

“일단 자세한 사안부터 알아봐야겠네요. 억압회주의 재산은 어디에 있죠? 아무리 저거너트가 있다고 한들 그걸 다 들고 다니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재산 규모가 크면, 그 재산은 클라우디아에 맡기게 돼. 유일한 도시이기도 하고… 우레회주에겐 신용이 있으니까.”

“그러면 결정되었네요.”

어차피 이런 길바닥에서는 뭣도 못 해. 그러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잖아.

“클라우디아로 가죠. 거기서 우레회주를 만나면 대부분의 문제를 떠맡길 수 있겠네요.”

원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능력 있는 사람에게 떠맡기면 그만이다. 통나무를 어떻게 혼자 들겠어? 나눠 들어야지.

내 제안에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잠깐. 재산이라니? 진짜로 억압회주 님의 재산을 나눠주실 생각입니까?”

“에이. 뭣도 모르는 사람 찜 쪄 먹을 기회였는데~. 아버님은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황금경만큼은 아니지만, 보다 큰 세력과 권력을 데카와 힐데는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승냥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페루도 납득했다. 티르조차도 그 선택을 반겼다.

“구름 마을이라… 얼마나 달라졌는지, 가서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지.”

‘여차하면 휴에게 그 너머의 안개 공국을 한 번 보여줄 수 있겠구나.’

곰곰이 생각하던 회귀자도 찬성하고 나섰다.

“좋아. 결정했어. 다음 목적지는 클라우디아야. 어차피 한 번은 들려야 했으니.”

‘천앵이 있고 지잔도 있어. 둘 다 가진 채로 클라우디아에 가면 이 안에 뇌신을 깃들일 수 있어. 천앵과 지잔이 있어도 벅차졌는데, 뇌신을 깃들이면 좀 나아질 거야.’

…가진 생각은 좀 달랐지만. 뇌신은 또 뭐야. 그걸 어떻게 깃들이는데?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야?누구는 마신 셋을 깃들여도 한층 더 잡다한 인간에 불과한데!

“…클라우디아로 가자. 볼일이 있으면 거기서.”

어쨌든 결론이 났다. 페루는 황금함에 타려고 했다. 그때 데카가 흥분한 채로 앞을 가로막았다. 회귀자가 서슬 퍼런 기색으로 노려보지 않았다면 페루의 몸에 손을 댔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들을 데려가실 생각입니까? 상회의 돈을 다 뜯어먹으려고 할 겁니다!”

“…그게 계약이라면.”

“저들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포함해서, 클라우디아에서 해결하려고.”

“분명한 일을 어떻게!”

페루가 혼자였다면 곤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페루의 곁에는 무언가 잘라내는 전문인 회귀자가 있다. 데카가 집요하게 굴자, 회귀자는 짜증을 팍팍 내며 그의 말을 끊었다.

“시끄러워. 지금 우린 시간이 없거든? 방해할 생각이라면 여기 남아서 뭐라도 챙기고 떠나든가.”

아무리 그래도 생존 본능은 아직 남아있었다. 데카는 입을 꾹 다물고는 뒤를 돌았다.

‘말도 안 돼. 이러려고 황금경 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뒤를 닦아준 게 아니라고! 우리 상회가 이렇게 사라지게 둘 수는 없어!’

아무래도, 클라우디아에서 볼일이 다 끝나기 전에는 여러 할 일이 남아있을 것 같네.멀어지는 그의 마음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함의 뱃고동이 울리고, 클라우디아로 향하는 무리가 일제히 출발했다.

데카가 잘한 일이 있다면 페루의 말인 아우레아를 데려온 일이었다. 정확히는 페루가 두고 온 아우레아가 제멋대로 데카를 따라 달려온 거지만 어쨌든. 애마를 타고 황금함에 올라탄 페루는 간신히 시동까지 건 뒤 풀썩 쓰러졌다. 아우레아는 주인을 걱정하듯 울며 페루의 곁을 지켰다.

침대에 쓰러져서 신음하는 페루를 보고 힐데가 한마디 했다.

“클라우디아에 도달하기 전에 죽을 것 같네요. 미리 각서를 받아놔야 하지 않을까요~?”

악의 없는 척 심한 말을 하네. 회귀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불길한 말 하지 마! 그리 쉽게 죽진 않아.”

“아뇨~. '제'가 나름 치유술에 일가견이 있어서 아는데, 페루의 몸은 상당히 위험한 상태 같은데요? 이건 신성력으로도 치유할 수 없어요~.”

신성력이라는 말에 티르가 작게 반응했지만, 힐데는 흡혈귀 앞에서 신성력을 쓸 줄 안다고 밝히는 바보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처럼 은근히 말을 흘렸다.

“지금 페루는 멀쩡해 보이지만 기운이 엉켜 있죠? 호문쿨루스로 몸을 채워 넣어서 그래요. 다른 힘으로 신체를 대신하는 접목은 2종 금기. 한 번이라도 했다간 신성력으로 몸을 되돌릴 수 없게 되죠.”

신성력에 의한 치유는 복원. 그러나 페루처럼 몸 일부가 힘으로 대체된 경우에는 복원이 불가능하다. 한때 성기사였던 힐데는 그 사실을 간파하고는 사실상의 시한부 선언을 했다.그러나 회귀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잔녹회주를 치료해줄 사람이 있을 거거든.”

“치료요? 성녀라도 있나요? 아니, 금기를 저지르면 성녀라도 못 고치는 걸요?”

“성녀가 아니야. 의선이야.”

“의…선?”

힐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선과 요선.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심술에 능통한 나 역시도 두 명의 신선밖에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한 나라의 정보부를 맡았던 힐데도 다를 게 없었다.

그보다 의선이라니. 성녀와 신성력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사람을 치료하는 신선이라고? 뭔가 이상하잖아.

“이상하네요~? 제가 아는 신선 중에 의선은 없는걸요? 헷갈릴 만큼 많지도 않을 텐데?”

“그러겠지.”

‘그녀가 의선이라고 불리는 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니까. 그녀에게 명성을 안겨준 이레전쟁이 없으면 그리 불리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나는 알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사람이 다쳤다면 종류를 불문하고 치료해줄 거야.’

생각해보면 무저갱에서 뭔가 약을 만들 때도 의선을 언급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신선이라니. 회귀자만 알고 있단 말이지? 역시 회귀가 좋긴 좋구나. 남들 모르는 정보도 알고.독심술로 읽고 다니는 나와는 달리, 힐데는 회귀자의 정보에 의구심을 가졌다. 힐데가 푸념하듯이, 그렇지만 내심 회귀자를 날카롭게 분석하며 물었다.

“도대체 한 나라 정보국장이었던 ‘저’조차도 모르는 정보를 어찌 아는 건지~. 너무 의심스럽네요. 셰이, 당신 도대체 뭐예요?”

“마음대로 생각해.”

“네에~. 그럴게요. ‘제’ 마음대로 생각하죠~.”

어린아이처럼 샐쭉거리는 힐데를 무시한 채 회귀자는 흘긋 티르를 보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티르칸쟈카인데… 뭐, 딱히 문젠 없겠지. 의선은 흡혈귀지만 티르칸쟈카와는 달리 혼자 움직이니까.’

뭐? 의선의 정체가 흡혈귀였다고? 아니, 사람 피 빨아먹는 흡혈귀가 사람을 치료하고 다닌다고? 그게 말이 돼?…안 될 건 없나? 짐승을 잡아먹는 인간에게도 수의사란 직업이 존재하니까. 의선이라 불릴 정도로 거창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늘어지게 하품하던 아지가 꼬리로 바닥을 때리며 칭얼거렸다.

“멍멍. 심심해. 멍멍.”

“평소처럼 말이나 괴롭히며 놀아.”

“멍. 나, 눈치 있어. 안 괴롭혀.”

“그런 애가 지금 심심하다는 이야기를 해?”

눈치는 어디다 팔아넘긴 거냐. 이래서 짐승들이란.그렇지만 아지에게 사람이 마구잡이로 죽어 나가는 여행은 좀 가혹하긴 했다. 약간의 분위기 전환도 필요하겠지. 이리 지낼 기회도 얼마 없고.다음 보름이 찾아오면… 아지는 싫어도 늑대의 왕과 싸우게 될 테니까. 뭐, 이 전력이라면 늑대의 왕이라도 문제없겠지만. 여차하면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도 되고, 여차하면 흡혈귀도 있다고.

“잠깐 갑판으로 나가자. 나도 환기 좀 하고 싶으니까.”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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