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직전, 여자아이가 먼저 움직였다. 피뢰탑에서 뻗어나간 수십 가닥 피뢰침. 그 중심부에 손을 올린 아이는 연금술을 사용했다. 우산처럼 갈라졌던 피뢰침이 가지를 접더니 한 가닥으로 집중되었다. 날을 세운 피뢰탑은 마치 뇌신을 겨누는 창처럼 보였다.
번쩍.벼락은 피뢰침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벼락과 한평생 싸워 온 구름 마을의 대(對)뇌신 병기는 충분한 능력을 발휘했다.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인간을 불태워버리는 대신, 피뢰탑을 타고 땅으로 스며들었다. 뇌신의 힘을 받아낸 피뢰탑이 거칠게 진동했다.
“꺄아악!”
그러나 벼락은 여파만으로도 무시무시하다. 피뢰탑을 조종하느라 그 힘을 지근거리에서 받은 아이가 퉁, 하고 튕겨나왔다. 공처럼 데굴데굴 구르는 아이의 몸을, 아지가 잽싸게 달려서 구해냈다.
“멍멍!”
옷과 피부가 그을렸지만,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우레 수련자라는 명칭이 허황된 건 아닌 모양이다. 아이는 아지를 붙잡고 서며 중얼거렸다.
“아, 안 돼! 피뢰탑이…!”
쿠르릉, 쿠릉.벼락의 힘을 받은 우레방아가 더욱 세차게 돈다. 아이가 물러난 탓인지, 혹은 벼락이 한 번 강타한 탓인지 피뢰탑의 침이 살짝 비틀어져 있다. 한 번 더 공격당한다면 피뢰탑이 기능을 멈출지도 모른다.
[***---!!!]
그걸 알았는지, 아니면 그냥 공격을 계속하려는 건지. 뇌신은 한 번 더 노호를 내지르며 구름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벼락을 끄집어내려는 듯이.
“저토록 높이 있는 것을 어찌 사냥한다는 말이냐? 휴. 구름을 타고 올라갈 방법이 있느냐?”
“없어요! 구름은 애초에 타는 게 아니니까요! 기공의 달인이라면 물방울을 딛고 뛸 순 있지만, 그래봤자 몇 걸음에 불과해요!”
“하나, 셰이는 뇌신을 죽인다 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이상한 거예요!”
우레회주는 저걸 패서 쫓아내고, 회귀자는 저걸 죽일 수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거야?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괴물뿐이냐!
“도와주세요! 피뢰침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그때, 여자아이가 피뢰침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칫, 조금 전 벼락에 다 튕겨나간 터라,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나뿐. 어쩔 수 없나.
“가자, 아지야!”
“멍!”
자의로든 타의로든 털을 잔뜩 부풀린 아지는 여자아이를 놔두고는 냅다 뛰어갔다. 피뢰탑의 끝까지 뛰어오른 아지는 비틀린 피뢰침을 이빨로 잡고는 힘을 주었다. 거대한 침이 삐걱거리며 다시 바로 선다.뒤늦게 따라잡은 나는 연금술을 썼다. 열국답게 이 역시도 연금강. 연금술에 특화된, 반응성 좋은 금속이라 내가 손을 댄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형태를 바꾼다.
…아니,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마신을 보았기 때문일까.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연금술이 훨씬 수월해.
어쨌든. 피뢰침을 바로 세운 나는 곧장 손을 뗐다. 우레 수련자들과는 달리 내 육체는 평범 그 자체. 벼락을 지근거리에서 맞으면 날아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다. 빨리 도망가야.
[---!!!]
어라? 늦었나? 어쩔 수 없지.카드 한 장을 꺼냈다. 스페이드 10. 만물을 떠받치는 대지모신의 우상. 지잔과는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전류를 흘려보내는 정도는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벼락이 떨어지기 직전 나는 카드를 손에 쥐고 기도를 올렸다.
“수고했어요.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군요.”
그러나 내 노력은 헛된 것이 되었다.쿵, 하고 우레회주가 피뢰탑 위로 떨어졌다. 우레를 두르고 성큼성큼 걸어온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뇌신을 응시했다.
“공교로운 타이밍에 쳐들어왔어요…. 아니, 어쩌면 이 타이밍을 노린 것일지도. 어쨌든, 맡겨주세요.”
“우레회주 님!”
“우레회주 님이다!”
환호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우레회주는 안심시키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뒤, 우레회주의 머리카락이 솟구쳤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벼락이 깃들고, 그녀의 전신이 번쩍거리며 뇌신에게 대항할 준비를 마쳤다.저 땅끝을 내려다보는 거신과 그것을 올려다보는 거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천둥과 폭풍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우는 가운데, 구름에서 벼락을 빼낸 뇌신이 다시 한번 천벌을 내렸다. 벼락이 다시 떨어진다.
“천둥잡이.”
그 순간, 우레회주가 피뢰침을 움켜잡았다.벼락은 뻗어나가는 성질을 가진다. 고여있지 않고 언제나 흐르며, 늘 자기 몸을 기댈 곳을 찾아다닌다. 그건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라, 벼락은 그 축축하고 복잡한 구조물조차 통로로 삼아서 흐르곤 한다.격류가 강변을 뒤엎듯, 벼락이 흐른 인간의 육신은 처참하게 망가지고 말지만. 열국 출신의 우레회주는 다르다.
벼락이 세상을 찢어발기고, 내친김에 우레회주의 육신에도 맴돈다. 땅에 발이 닿지 않은 우레회주의 몸. 거기를 통과하는 대신, 소용돌이치며 계속해서 흐름을 만들어낸다.몸 안이 진탕되어야 마땅하나… 오히려 그걸 힘으로 삼았다.
“뇌신이여. 도대체 언제까지 돌려드려야 만족하겠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우레회주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뇌신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뇌전을 담은 전신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그녀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천둥소리가 울린다. 번쩍이며 흩날리는 샛노란 머리카락은 마치 번개 줄기가 형상화된 것 같다. 번뜩거리는 안광은 이제 벼락조차도 눈에 담는다.
“원하신다면, 다시 한번.”
우레회주는 회전하는 우레방아를 양손으로 잡고는, 전신에 가득 퍼진 힘을 끌어내어 외쳤다.
“돌려드리겠어요!”
빙글빙글 돌던 우레방아가 천천히 멈췄다. 단 한 명의 인간이 휘두르는 힘으로 인해.
우레방아는 구름 폭포를 따라 땅으로 흐르는 벼락을 동력으로 삼는다. 물 대신 번개의 흐름이 우레방아를 돌리는 것이다.달리 말하면, 그 우레방아를 거꾸로 돌린다면. 클라우디아 전역에 흩어졌던 벼락의 힘을 모아 거꾸로 올려보낼 수 있다.
‘벼락을 되돌린다’는 건 그런 의미.
구르르릉. 우레회주는 온힘을 끌어내 우레방아와 공명했다. 본신의 힘과 벼락의 힘을 역이용해, 지름이 100m도 넘는 거대한 철제 바퀴를 거꾸로 돌린다.오직 벼락을 몸에 품을 수 있는 우레회주만이 가능한 묘기. 그리고 클라우디아 한정으로 우레회주가 최강인 이유.
거꾸로 굴러가는 우레방아에서 뇌운과 벼락이 솟는다. 땅에서, 하늘로. 순리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인간의 속죄가 구름의 폭포를 거슬러 다시 뇌신에게로 향한다. 공격인지, 아니면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벼락이 하늘로 되돌아간다.
먼 옛날, 초대 우레회주가 했던 일이 보다 큰 규모로 재현된다….
“아, 잠깐만.”
그때, 천앵을 타고 회귀자가 구름 폭포 한가운데 발을 디디고 섰다.천앵과 지잔은 하늘과 땅. 벼락은 그 사이를 오가는 천신의 의지….
달리 말해, 두 검이 있다면 회귀자 역시 벼락의 힘을 깃들일 수 있다.
솟구치던 벼락의 일부가 하늘 대신 천앵으로 향한다. 회귀자는 뇌신에게 되돌려주려던 벼락의 일부를 훔쳐 두 유품 사이에 저장했다.
너무나 당당한 강도질에 세계가 침묵한 사이. 나는 회귀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번개 도둑이야! 아니, 강도야!”
눈앞에서 벼락을 도둑맞은 뇌신의 심정은 어떨까. 잘 모르겠지만, 우레회주가 느끼는 감정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우레회주가 벼락 강도를 보고 느낀 감정은 분노도, 배신감도 아니었다. 당혹감이었다. 도둑질도 저리 당당하면 어이가 없어지는 법. 한 수 배웠다, 회귀자.
구름 폭포를 타고 역류한 벼락이 뇌신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벼락의 나뭇가지에 난도질당한 뇌신의 신형이 잠깐 흐려졌다. 마치 이대로 물러나는 듯. 우레회주는 뇌신을 지켜보며 말했다.
“평소라면, 뇌신은 되돌린 번개를 받고는 물러났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의 뇌신은 형체가 잠깐 흐려지기만 했을 뿐 소멸하진 않았다. 색이 한결 연해진 뇌신은 잠시 이쪽을 바라보다가 구름 폭포 아래로 꺼지듯 사라졌다.
“그쪽이 방해한 바람에 머지않아 다시 돌아오겠네요. 멋대로 무슨 짓을 한 건지. 변명할 말은 있으시겠죠?”
“변명까진 아니고.”
회귀자는 우레바퀴 위에서 가뿐히 뛰어 내려와서 말했다.
“뇌신을 죽이려면 일단 여기로 불러야 하잖아? 다 보내면 당분간 안 올 테니까, 시간 낭비를 줄이고 싶어서.”
“자신이 넘치는군요.”
“할 수 있으니까.”
‘이전 회차에 해보기도 했고.’
회귀자의 사교성은 대단히 뛰어나서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도 목숨을 건 대결을 할 수 있다. 하물며 눈앞에서 강도짓을 했다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확신에 차 있군요. 그 역시, 저희처럼 선택받은 인간인 모양이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우레회주는 당당한 회귀자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도시가 모아둔 힘의 반절이나 떼어 먹혔는데도 호구처럼 웃고만 있었다.세상에 회귀자와 상성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니, 놀랄 일이 남아있네.
우레회주는 피뢰탑을 지켰던 아이들을 향해 자상하게 말했다.
“제리. 티비. 알카. 수고했어요. 피뢰탑을 복원해야 하니 수리소에 연락해주세요.”
“네, 넵!”
아이들은 황송하다는 듯이 우레회주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승강기를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우레회주는 아이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한 번 소모한 탓에 우레방아에 남은 벼락이 얼마 없어요. 당신이 뇌신을 죽이지 않으면 클라우디아는 커다란 피해를 입겠죠. 당신이 벼락을 훔친 순간부터,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당신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뇌신을 죽인다면 클라우디아는 영원히 평화로울 거잖아? 할 만한 도박 아니야?”
회귀자의 뻔뻔한 대답에 우레회주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신을 죽이려면 저 같은 인간조차 도박을 감행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후훗, 오랜만에 피가 끓는군요.”
중얼거린 우레회주는 피뢰탑을 세게 밟았다. 머리끝까지 뻗어있던 우레의 힘이 그녀의 발을 타고 피뢰탑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긴 머리카락을 흔들어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온 우레회주는 차갑게 눈을 가라앉히면서 회귀자를 가리켰다.
“도박이라면 받아들이죠. 제가 질 리는 없으니까요. 다만, 그쪽도 동등한 리스크를 져야겠어요.”
“리스크라면?”
“뇌신을 죽이기 전까진 모든 논의를 멈추도록 하죠. 휴전이든 뭐든, 전부 포함해서.”
어라라. 잠깐만.물론 번개 강도를 죽이겠다고 당장 달려들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아무리 해봤다고 한들 뇌신을 죽이는 게 그리 쉬울 리 없잖아. 그런데 모든 논의를 멈추겠다면 좀 곤란하지 않나….내 걱정도 무색하게, 회귀자는 흔쾌히 대답했다.
“기대해.”
“기대하면 안 되죠!”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힐데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뭔가요, 도대체! 셰이, 당신은 전쟁을 멈출 생각은 있는 건가요?”
회귀자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야. 내가 뇌신만 막으면 우레회주는 뭐든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테니까. 협상도 더 잘 풀어가겠지.”
“그게 뭐가 협상인가요! 정에 기대어 해주겠지~, 라고 기대하는 건 협상이 아니에요! 아첨이죠! 왜 바라지도 않은 선물을 바리바리 싸 주려고 해요? 우레회주와 연애라도 하는 거예요?”
“뭐어?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없죠! 남자를 좋아하는 주제에!”
뜬금없는 지적에 회귀자는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그건 별로 상관없잖아. 단지, 우레회주의 비원을 이뤄주면 앞으로 더 쉽게 도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셰이, 당신 정치라고는 하나도 모르죠? 우레회주도 한 도시의 책임자라고요? 약간 빚을 졌다고 무조건 도와주겠다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먼저 도움을 줘요?”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미리 조건을 걸고, 더 많은 걸 주겠다는 약조를 받은 다음 베풀 듯이 뇌신을 없애줬어야죠! 호의에만 기대다 원하는 걸 못 받아낼 수도 있잖아요!”
군국의 입장에서는 힐데의 말이 옳다. 어디까지나 군국의 입장에선.그러나 회귀자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뇌신은 군국이 아니라 ‘내’가 없애는 거야. 너희가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권리 없어. 내가 주겠다면 주는 거니까.”
지금까진 열국과의 휴전 협정을 위해서 같이 지냈다. 그러나 회귀자는 본질적으로 어떤 나라의 편도 아니며, 군국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보다도 더욱 그렇다. 만일 군국과 어떤 나라가 싸운다면 흔쾌히 반대쪽 편을 들 것이다.…그리고 그걸 알아차린 힐데의 얼굴이 부드럽게 굳었다. 지금껏 조금이나마 드러냈던 본심을 다시 가면 안으로 숨긴 채, ‘힐데’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며 말했다.
“흐음~. 아무래도 군국은 셰이의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미운털이 박혀버린 모양이네요~.”
“당연하지. 애초에 우린 적이었어. 군국은 나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잖아.”
“알아요~. 그동안의 정이 있으니 혹시나, 했어요. ‘제’ 오해였던 모양이지만요~.”
힐데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디론가로 향했다.
“힐데? 어디 가요?”
“셰이에겐 기댈 게 없어 보여서, 군국답게 음침하게 정보수집이나 하려고요~.”
미련 없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멀어지는 힐데를 보고는 회귀자는 의아해했다. 회귀자는 힐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야, 쟤? 삐진 거야?”
“네. 아마도요.”
“쳇, 속 좁긴.”
“댁은 생각이 짧잖아요.”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셰이 씨. 방금 저건 뭐예요? 진짜로 뇌신인가요?”
미심쩍게 나를 바라보던 회귀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