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뢰탑 내부에는 늘 우레의 힘이 흐르고 있어요. 누군가의 안내 없이 멋대로 돌아다니다간 백이면 백 감전당하겠죠.”
...다행이네. 원래는 혼자 몰래 숨어들어서 구경하고, 주워갈 게 있으면 챙기려고 했는데.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쓸쓸하게 감전당할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우레회주가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면 시간이 있겠네요. 직접 안내해드리죠.”
“네? 우레회주 님이 직접이요? 그럴 필요까진.”
우레회주는 대답도 하지 않고 성큼 앞서 걸었다. 자신을 따라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서.
쳇. 우레회주가 직접 지켜보고 있으면 뭘 챙겨갈 수 없잖아. 정말 순수하게 구경만 해야 하네. 실패다.
쓰라린 마음을 다독이며 나는 우레회주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피뢰탑. 구름 폭포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흘려보내며, 동시에 그 힘을 이용하는 클라우디아만의 구조물이죠.”
승강기를 직접 움직이며 우레회주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시작했다.
“초창기 클라우디아는 산을 깎아서 농지를 만들었어요. 우레의 힘은 하늘로부터 온 것. 그 은혜를 받은 땅은 비옥해서 무엇을 키우더라도 잘 자랐죠. 하나…. 도시가 점차 커지니까 문제가 발생했어요. 농지를 넓히려면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산에는 호랑이가 기거하니까요.”
윽. 하필 그 짐승이 언급되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구름과 벼락이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이 클라우디아가 특이한 거지, 인간은 원래 산에서 살 수가 없다. 호랑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는데 어떤 짐승이 두 발 뻗고 살 수 있을까. 오랫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친분을 다졌다면 모를까,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려는 순간 바로 먹잇감이 될 거다. 호랑이는 곡식을 먹진 않으니.
“그래서 밭을 넓히는 대신, 위로 쌓아올렸죠.”
우레회주는 승강기를 멈추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피뢰탑 내부의 모습이 한눈에 드러났다.
피뢰탑 내부에는 벽도, 기둥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건 넓게 가득 깔린 흙. 그 위에 농작물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자라고 있다.
구름 폭포에서 맺힌 물이 수로를 타고 흘러 흙을 적신다. 촉촉하게 젖은 흙을 딛고 대지의 은혜가 고개를 든다. 풀과 나무란, 천신과 대지모신이 하나 되어 맺은 결실. 그 은혜를 입에 넣는 인간은 언제나 오늘 일용할 양식에 감사해야 한다…며 성경에서는 말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또한 천신과 대지모신의 은혜라고 할 수 있을까?
흙을 퍼 와서 뿌리만 다 잠길 정도로만 채워 넣었다. 대지모신의 피부 한 겹을 벗겨 드높은 피뢰탑의 층마다 깐다.
하늘은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름과 우레가 땅으로 직접 내려오는 이 클라우디아는 하늘마저도 유리 공 속에 담아서 천장에 매달았다. 벼락의 빛만 뽑아내어 유리 공 속에 가두고 태양 대신 작물을 비추게 했다.
하늘도, 땅도 떼 와서는 층층이 쌓아올린 인공적인 밭. 성경의 저자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기함하려나, 아니면 대견해하려나.
“이게 클라우디아가 번영한 이유에요.”
우레회주는 자긍심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하늘과 땅을 조금씩 뜯어와서 건물 안에 층층이 쌓아 올린 밭. 거기에는 압도적인 위용이나 헤아릴 수 없는 신비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밭을 건물 안으로 가져오는 발상이 새로울 뿐, 흙도 빛도 다 실제로 있는 거니까.
다만, 그 발상에서 지독할 정도의 집념이 느껴진다.오직 실용적인 목적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인간을 위해 그걸 사용하려는 인간의 의지. 그게 피뢰탑 내부의 인공 밭에는 녹아들어 있었다.아마 이것뿐이 아니겠지. 이 인공 밭도 중요하지만 다른 시설에도 손을 뻗었을 거다. 이 클라우디아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말로는 확실하게 짚어낼 수는 없지만, 뭔가 애매한 위화감이 나를 건드리고 있다.
“이걸 우레회주 님이 전부 만드셨다고요?”
“물론, 저 홀로 만든 건 아니지요. 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손은 두 개밖에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야.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모든 일을 혼자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레회주의 생각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그녀의 말은 전부 진실이다.
그렇지만, 내가 읽은 우레회주는 벼락의 소비자라고. 그걸 이용하겠다고 처음 생각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분명 저 발상을 처음 해낸 이가 있을 텐데. 왜 그에 대한 단서는 없지? 우레회주도 모르나?
나는 어디까지나 생각을 읽을 뿐, 그 인간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아는 정보에 한한다. 우레회주도 전대 우레회주에게 키워진 인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모든 걸 다 알진 못할지도.흠. 조금만 더 캐내 볼까.
“제가 잠깐 헷갈려서 그런데, 번개 도둑이 훔친 번개를 초대 우레회주가 하늘에 되돌렸다고 했죠?”
“네.”
“그러면 이 피뢰탑을 만든 사람은 누구죠? 번개 도둑인가요, 아니면 초대 우레회주인가요?”
“초대 우레회주 님이에요.”
우레회주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히려 묻는 내가 무안해질 정도다.
그래. 피뢰탑은 아무리 봐도 시설물이지. 도둑이 이걸 만들 수 있을 리 없어. 분명 누군가 세웠겠지. 하지만, 순수하게 기능적인 면을 살펴보면. 피뢰탑은 아무리 봐도 벼락을 훔치는 도구잖아? 지금 밭을 가꾸기 위해 쓰고 있는 벼락은 훔친 게 아니라고? 그러면, 벼락을 만들어내고 있단 뜻이야?
“초대 우레회주 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었겠군요. 도둑이 훔친 벼락을 이토록 잘 활용하시다니.”
“대단하신 분이었죠. 저만큼이나. 한데, 그걸 묻는 의중이 뭐죠?”
너무 캐물었나? 약간 나를 경계하고 있다. 타국에서 온 낯선 이가 갑자기 번개 도둑과 초대 우레회주에 대해 묻고 있으니 의심스러울 만하지.이럴 때 의심받는 게 억울하다고 어필하는 건 하수다. 외지인인 나는 수상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럴 때는 오히려 속내를 살짝 드러내야 한다.
“하하, 그냥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이런 기술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제 직업상 이런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면 호기심이 생겨서.”
다행스럽게도 우레회주는 내 속내를 짐작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군국에서 왔다고 했었죠. 역시, 무언가를 캐내려고 하는군요. 대충 그러리라 예상하고 이곳에 데려온 거지만요.’
“안다 해도 쓸모 없어요. 구름과 벼락이 흘러내리는 클라우디아에서만 가능한 기적이니까요. 만일 아무 땅이나 가능했다면 군국으로 달아난 막시밀리앵이 진작 이루었겠죠.”
“아아. 막시밀리앵 씨.”
그 사람, 반쯤 죽이고 쫓아냈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어떻게 할까.
독심술을 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그에 맞춰서 행동하던가, 아니면 아예 빈틈을 찌르던가. 전자는 그들의 인식 속에 나를 배경으로 집어넣어서 의식하지 않게 하는 거고, 후자는 자꾸만 눈에 띄어서 상대방의 관심을 끄는 거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오만한 우레회주라면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아무래도… 약간 질척이는 게 좋겠지.
“우레회주 님. 셰이 씨가 뇌신을 죽인다면 클라우디아는 매우 평화로워지겠죠? 공격적인 번개도 몰아치지 않을 테니 다른 일 하기도 편할 거고. 도시는 위험을 딛고 일어나 더욱 번성하겠죠. 그러니까….”
“대가로 클라우디아의 지혜를 요구하고 싶다고요?”
우레회주는 뻔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끙, 덜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서로 돕는 관계가 된 김에 초대 우레회주의 유산, 그런 걸 살짝만 보여주셔도.”
“문제없죠.”
“정말요?”
“저는 했던 말을 번복하지 않아요. 정말 뇌신을 죽인다면… 뇌신의 사도가 클라우디아에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해준다면. 제 몸과 마음을 다해 보상할 용의가 있어요.”
오해받을 말은 하지 말라고. 아무리 진심이라도.
그래도 덕분에 회귀자가 왜 우레회주를 좋아했는지 알았다. 뇌신을 없앤다는 퀘스트를 깬다면 앞으로 전폭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구나. 회귀자가 좋아할 만한 단순명료함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뇌신을 죽인 이에게 주어야 할 보상. 당신에게 줄 이유는 없어요.”
“셰이 씨는 우리 동료인데요.”
“그렇다면, 나중에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세요. 만일 그가 뇌신을 정말 죽이고, 그 보상을 원하고, 여러분께 나누기로 결정했다면 말이지만.”
한마디로 말해 아무런 나에게 직접 줄 일은 없다는 소리. 나는 아쉬운 척 혀를 차며 대답했다.
“우레회주 님의 뜻은 알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여쭙죠.”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이군요. 한 번 더 설명할 만한 인내심은 없어서요.”
“칫.”
약간 자존심 상한 듯한 기색을 보이자 우레회주는 도리어 안심했다.
‘초대 우레회주 님의 유산….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도리어 안심이 되네요. 밝힐 일은, 영영 없겠지만.’
나도 안심했다. 내 예상대로 나를 무시해줬으니까.덕분에 그게 어디 있는지도 알았고.
초대 우레회주가 남긴 유산은 이 피뢰탑의 아래쪽에 묻혀있다. 현 우레회주조차도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그의 유산이.
뇌신이 불완전연소하여 물러갔지만 클라우디아의 인간들은 태평하기만 했다. 이곳은 우레회주가 다스리는 구름의 도시. 벼락을 상대하기 위한 비장의 수단이 이중 삼중으로 준비되어 있다. 약간의 트러블이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거기다 생물은 자주 보고 겪는 것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익숙함이 무해함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위험하다면 익숙해질 틈도 없이 죽을 테니까.
소식이 빠른 몇몇은 소식을 알음알음 퍼뜨렸다.
“들었나? 수호자들 사이에서 흐르는 소문인데, 우레회주께서 뇌신 토벌 작전을 벌이려고 하신다네.”
“얼마 전에 우레회주 님이 직접 출격하시지 않았나? 뭐가 쳐들어온다면서.”
“잘은 모르지만, 뇌신 토벌과 관련된 일이었나 보네. 성공하면 뇌신이 소멸한다는데.”
“그래? 좋은 일이긴 한데, 살짝 아쉽구먼. 정들었었는데.”
“이 사람아. 정은 무슨! 뇌신의 벼락에 맞아서 죽은 사람이 몇인데!”
“그들은 피뢰탑 바깥에서 알짱거리다 죽은 거고.”
“쯔읏. 경을 칠 소리를.”
“뭐, 우레회주 님께서 잘 해주시겠지! 설마 별일 있겠어!”
누군가 유출한 게 아니다. 시민들이 당황할까 봐, 수련자에게 전해 은근히 소문을 흘린 거다. 미리 알면 심리적인 타격이 덜하니까.
우레회주에 대한 믿음이 너무 투철해서 크게 쓸모있진 않았지만, 우레회주가 도시를 다루는 방식이 나름 체계적인 걸.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태평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는 회귀자와 아지가 남아있었다. 회귀자는 구름을 잔뜩 머금고 새하얘진 천앵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바닥에 놓인 지잔에서 잔벼락이 일었다. 아지의 털이 곤두서기도 했다.
“어, 왔어? 어서 와.”
회귀자가 나한테 인사를? 여유가 넘치나 보네. 나는 은근히 들뜬 회귀자에게 물었다.
“셰이 씨. 기분 좋아 보입니다?”
“뭐, 제법?”
내 질문에도 까칠하게 대답하지 않다니. 진짜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황금경도 사라지고, 우레회주도 만났어. 일만 다 끝나면 전쟁도 멈추겠지. 일이 다 잘 풀리고 있어. 분명 다 새로운데, 신기하게도 중간중간 이상한 길로 빠지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일이 없어.”
‘보통 이쯤 루트에서 벗어나게 되면 한 번쯤 억지로 일이 틀어지던데 말이야!’
내 노력은 전혀 몰라주는군. 당신이 놓친 사소한 부분을 다 내가 몰래 틀어막아서 잘 되고 있는 거라고.뭐, 나도 회귀자 덕을 좀 봐서 할 말은 없지만.
“뇌신만 무찌르면 이제 이쪽 문제는 거의 다 해결이야! 공국 쪽을 해결해줄 티르칸쟈카도 있겠다, 군국도 조용하겠다! 문제가 생길 게 없어!”
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갑자기 불안해지는 걸까. 내 걱정도 무색하게 회귀자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웃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나.
“헤헷. 이걸로 갱신이야. 희망이 보여!”
“셰이 씨.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제가 수많은 도박판을 전전하면서 깨달은 건데, 가장 자신감이 충만하고 무엇이든 잘 될 것 같은 때가 가장 크게 잃을 때더라고요.”
“그걸 알면서 도박을 해?”
“제가 호구의 자신감을 채워 넣는 쪽 사람이었으니까요. 잔뜩 바람을 넣어서 부풀렸다가 전재산을 걸었을 때 쾅, 하고 잃게 하는 역할이었죠. 속된 말로 바람잡이.”
“…사기도박 했다는 말을 참 당당하게 하네.”
“사기 아니라니까요? 도박 자체는 속임수를 쓰지 않은 정정당당한 도박이었다고요.”
정정당당하게 독심술만 썼을 뿐. 평범한 사기도박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보다, 뇌신은 언제 죽이실 거예요?”
“바닷바람은 낮에 불어와. 구름폭포의 구름도 마찬가지야. 내일 낮에 바닷바람이 불어오면, 잠시 물러갔던 뇌신도 다시 돌아올 거야. 확실한 시각은 우레회주가 알려주겠지.”
“뇌신이 사라지는 초대형 이벤트인데, 클라우디아도 좀 소란스러워지겠죠?”
“그러겠지. 혹여나 있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내일은 클라우디아 전역에 비상령이 내려질 거야. 우레회주는 자기 부하들과 수련자들을 모아서 뇌신의 잔재를 처리할 거고.”
“잘 아시네요.”
“우레회주에게 들었거든.”
바보야. 너 이번 회차에서는 안 들었어. 뭐다 하면 일단 지르고 보네.어쨌든.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지. 나는 진짜 용건을 꺼냈다.
“제가 꼭 구경 갈 필요는 없죠?”
“어? 구경?”
“네. 아시다시피, 저는 벼락을 무서워해서. 아무리 셰이 씨가 잘 처리해주신다고 해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네요.”
“금방 끝나는데. 별로 위협이 되진 않을 거야.”
내가 보지 않겠다고 말하자 은근히 아쉬워하고 있다. 그렇게 자기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나?
“제가 지켜본다고 해서 도움이 되진 않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