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81화 (381/384)

경비병이 나를 발견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창을 겨누었다. 만년필처럼 갈라진 창날 사이로 작은 벼락이 위협적으로 파짓거렸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우레회주 님의 손님이에요. 본 적 있죠? 그분과 함께 여기 왔었는데.”

무시무시한 벼락을 눈앞에 두고도 무시한 채, 얼굴을 보여주며 태연하게 걸어갔다.  어제 우레회주와 함께 이곳에 찾아온 보람이 있다. 경비병은 내 얼굴을 기억하고는 창을 내렸다.

“실례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라니요? 조금 전 듣지 않았나요? 뇌신과의 악연을 끝내겠다고 했잖아요.”

그쪽이 알아야 한다는 듯 반문한다.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한 경비병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무,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레회주께서는 승강기를 통해 이동하셨습니다. 피뢰탑 꼭대기로 향해야 하기에.”

“아, 그래요? 제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꼭대기로 향하려면 계단을 써야 하는 줄 알고.”

클라우디아에 초행인 나는 길을 헷갈렸다. 우레회주와 함께 승강기를 타고 피뢰탑 정상으로 향해야 하건만, 계단으로 걸어가는 줄 알고 입구로 들어왔다. 승강기라는 걸 겪어보지 못한 외지인이 벌이는 흔한 실수였다.경비병은 주어진 정보를 조합하여 나를 이해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러도록 유도한 거지만.

“미안해요. 길이 익숙지 않아서. 계단 위치를 알려주시겠어요?”

“기다리시면 승강기가 다시 내려올 겁니다.”

“계단이면 충분해요. 이미 늦어서 서둘러야 하거든요. 계단이나 승강기와 별로 차이 안 날 거고요.”

물론 거짓말이다. 계단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며, 그걸 걸어 올라가는 건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올라갈 거라면 승강기가 무조건 옳은 선택이다.

나는 올라갈 게 아니라서 그렇지.

“기공의 달인이라면 계단쯤은 문제 될 건 없겠군요. 저곳입니다.”

“고마워요.”

경비병은 별다른 의심도 없이 내게 계단 입구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계단으로 향했다.내 뒤로 충성스러운 경비병이 경례를 올려붙이며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클라우디아의 숙원을!”

“걱정 마세요. 오늘 안에 끝날 테니까요.”

손을 살짝 흔들어준 나는, 태연히 계단 통로로 사라져… 냅다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지하는 말 그대로 땅 아래. 대지의 한 꺼풀 아래에는 빛 아래 당당히 드러나지 못할 것들이 숨죽이고있다. 인간은 햇빛에 닿아선 안 되는 것.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자주 나와서 바람을 쐴 필요가 없는 것을 그 아래 숨겨두곤 한다.

피뢰탑도 마찬가지. 벼락의 힘을 땅으로 흘려보내는 건축물에도 보이고 싶지 않은 게 있다.

지하로 향하는 입구는 두꺼운 철문으로 닫혀 있었다. 혹시나 해서 슬쩍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당연한 일이다. 숨겨둔 것이 갑자기 밖으로 나서거나, 혹은 누군가 찾으러 오면 곤란할 테니.자물쇠는 보이지 않는다. 우레회주나 우레 수호자들만 오갈 수 있는 이 지하실은 벼락의 힘을 흘려보내야만 열리는 구조다. 아무리 내가 대단한 도둑이라고 해도 평범한 인간인 이상 이 문을 열 방법은 없었다….황금경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지.

스페이드 8.

카드를 가져다 댔다. 착, 하고 달라붙는 소리가 들린다.

마신의 고유마도는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단순히 신이라 치부하던 것들. 자연이 마땅히 따르는 위대한 이치. 인간은 그 지식에 다가갔다.나뭇가지를 깎아 창을 만들고 돌을 쪼개 도끼로 만들 듯, 이치를 알게 된 인간은 그 힘을 쪼개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지모신도는 대지술을, 드루이드는 자연의 힘을, 연금술사는 연금술을 도구처럼 썼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일 뿐. 신비 그 자체에 빗대면 너무나도 하찮다. 나무를 아무리 날카롭게 깎는다 한들 나이테에 녹아든 지혜를 알까. 바위를 아무리 잘게 갠다 한들 대지가 벼려낸 보석의 가치를 깨달을까. 진정한 신비는 실리의 뒤에 가려져 있다. 이 우상은, 잊힌 신비를 떠올리기 위한 것.

카드를 슬쩍 옆으로 민다. 그냥 갖다 댔을 뿐이니까, 카드를 치우면 원래 있던 강철 문이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기대하는 상식이다.그런데, 카드를 치우자… 맞닿은 곳에 카드가 한 장 더. 문에 박힌 듯 딱 달라붙어 있다.

“이러니까 진짜 마술사가 된 기분이네.”

누가 보지도 않는데 마술을 쓸 이유는 없다. 이건 속임수가 아니라, 카드와 맞닿은 부분이 진짜 카드로 변한 것.옛 연금술사들의 허황된 믿음은 진실이었다. 만물의 근원은 하나이며, 그렇기에 존재의 장벽을 뛰어넘는다면 다른 물질로 변할 수 있다. 무엇이든 금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잡철이 될 수도 있다.…아쉽게도, 금보다는 철로 변하는 게 더 쉬운 모양이지만.

“짜잔…. 에고, 힘 빠지네. 보는 사람 없이 하는 마술은 이토록 허무하구나.”

나는 한탄하며 벽에 달라붙은 카드를 치웠다. 그 뒤편에는 똑같은 스페이드 8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슬쩍 벗겨내니 한 장의 카드가 더 있다.후두두둑. 얇은 철로 만들어진 카드가 비처럼 떨어지고, 더 없을 때까지 카드를 치운 뒤 내 손가락은 허공을 긁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문의 두께만큼의 카드가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왠지 능력이 점점 도둑질에 특화되는 것 같단 말이야. 편해서 좋지만.”

손을 집어넣어 잠금쇠를 풀고 철문을 민다. 영영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저항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문은 간단하게 열렸다.

“똑똑똑. 들어갑니다~.”

철문을 지나자 나타난 건 짧고 어두운 복도. 건너편에는 아까보다는 쉽게 열릴 것 같은 문이 보인다. 이대로 그냥 지나가기 전, 혹시 모르니 만들어진 카드를 던져보았다.

파짓, 하고 전류가 튄다. 카드는 제자리에서 한 번 튕겼다가, 굴러가는 대신 복도에 찰싹 달라붙었다.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역시 벼락이 흐르고 있나 보네. 방심할 수가 없어.”

차라리 사람이라면 독심술로 미리 읽고 대응할 텐데. 나는 투덜거리며 스페이드 10을 꺼냈다. 그걸 의복 패킷처럼 생체 단말에 끼워 넣고 걸음을 내디뎠다.약간 찌릿한 느낌은 있지만 금방 가신다. 대지의 앞에서 벼락과도 같은 찰나의 번뜩임은 사그라지니. 전류가 아키 아바타를 따라 내 스페이드 10으로 빨려 들어가며 소멸했다.

복도를 돌파한 나는 두 번째 문을 밀었다. 두꺼운 강철로 된 첫 번째보다는 확연히 가벼웠다. 문을 열자, 클라우디아가 숨기고 싶어 했던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없이 많은 침대가 줄을 맞추어 늘어서 있다. 칸막이로 나뉜 데다, 일반적인 크기의 침대보다 훨씬 작아서 복작복작한 느낌을 준다. 침대 위에는 어울리지 않게 몇몇 장치가 매달려 있어 갑갑하기까지 하다.그에 더불어 들려오는 울음소리. 귀에 거슬릴 수밖에 없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든다.

잡음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명확한 언어를 가지지 못한, 짐승의 것보다 원초적인 아이의 생각들이 내 독심술로 밀려든다. 고통인지, 결핍인지, 아니면 그냥 불만인지 모를 혼탁한 생각. 읽을 수는 있되 알 수는 없다. 본인 자신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기에. 아직 학습하지 않아서.이거, 쉽지 않네. 유아퇴행이라도 할 것 같은데.

“어, 어? 여기 들어오시면 안 돼요!”

‘지금은 다른 우레 수련자들이 다 밖에 나가 있는데…!’

그때였다. 저번에 피뢰탑 꼭대기에서 보았던 아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우레 수련자라고 했나. 아직 수호자조차 되지 못한 어린아이였으나, 그나마 이곳에서는 가장 연장자였다.

“안녕. 제리라고 했지?”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벼락의 힘을 다루지 못하면 접근하지 못하는데!”

“그래? 뭔가 간지럽더니 그게 벼락의 힘이었나 보구나.”

“히, 힘으로 뚫고 오신 거예요? 그, 그러면 침입자?”

제리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팔을 치켜들었다. 미약하게나마 우레의 힘이 맴돈다.내가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어도 건장한 성인 남성이다. 어린아이 팔을 꺾는 건 어린아이의 팔을 꺾는 것만큼 쉽다. 물론, 평범한 인간인 만큼 어린아이에게까지 힘을 쓰진 않겠지만.

“알잖아. 나는 우레회주의 손님이야. 길을 잃어서.”

“길을 잃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오셨나요…?”

“길을 제대로 찾았으면 제대로 찾아갔지. 헤맸으니까 여기에 온 거야.”

“그러네…?”

그걸 속네. 어쨌든, 제리가 의심을 조금 푼 틈을 타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피뢰탑 안쪽 아니니? 저 위에서는 뇌신을 사냥한다고 하는데, 대피하지 않아도 되니?”

“괜찮아요. 피뢰탑 안에 있으면 안전하니까요.”

“아, 그래서 이 아이들이 집에 안 있고 여기 있는 거구나? 벼락이 쳐도 안전하려고?”

“이 아이들은….”

말해도 될지 하면 안 될지, 제리는 주저했다. 기밀까지는 아니었지만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이야기도 아니었던 탓이다. 잠깐 고민하던 제리는 괜히 오해받는 것보다 알려주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는 입을 열었다.

“버림받은 아이들이에요.”

“누구에게? 우레회주?”

“그, 그럴 리가요! 우레회주 님은 이 아이들을 거둬주신 분이거든요!”

파악했다. 모범생인 타입이구나. 이럴 때는 직접 묻는 것보다는 일부러 헛다리를 짚어서 제 입으로 말하도록 하는 게 낫겠다.생각을 읽는 게 가장 편하긴 하지만. 지금은 좀 정신이 사나워서.

“우레회주 님은 열국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이 클라우디아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세요! 다만, 나쁜 승냥이들은 그 규칙을 악용해서, 아이만 만들어서 대뜸 내밀고는 클라우디아 거주권을 얻어요. 마치 그게 물건인 것처럼!”

“아하. 아이를 가지면 클라우디아에 머물 권한이 생기니까?”

“네. 그 다음, 아이는 나 몰라라 하고 사는 경우가 많아요. 심심찮게 내다버리기도 하고요.”

여기까지 말했으면 더 유도할 필요도 없다. 제 감정이 도화선이 되어 더욱 감정이 고조된다. 제리는 이제 시키지도 않았는데 술술 불었다.

“…특히,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면 더욱이요.”

그렇군. 이 울음의 기저에 깔린 감정은 고통이었나. 왠지 머리가 어지럽더니만. 열국은 아이를 셋 낳으면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장애를 가지고, 마지막 하나만이 최소한 겉은 멀쩡하게 태어난다. 황금경이 만든 작물이 다른 ‘정상적인’ 작물과 같이 몸을 이루면 균형이 어긋나기 때문이다.지금 이곳에 모인 갓난아기들은 전부 장애를 입은 이들. 부모가 장애를 알고 버렸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맡겼는지는 모르지만.

“이 아이들은 우리가 먹이고 보살펴요…. 장애를 극복하고 무사히 자라난 아이들은 우레 수련자가 되어요. 장애를 극복하면 우레의 힘에도 어느 정도 저항력이 생기거든요.”

황금경의 작물로 몸을 채울수록 벼락이 잘 통하게 되니까 말이지. 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는 건, 꽤 많은 아이들이 죽는다는 거구나.”

“…어쩔 수, 없어요. 가혹하니까요. 신이 이 아이들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길 바랄 수밖에….”

제리는 눈을 감고는 양손을 모았다. 어제 천신이 나쁘다고 말한 것을 잊은 듯이.어쩔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인간은 그저 바라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신앙은 이런 곳에서 싹을 틔운다. 나의 바람이 이대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기에. 어딘가에서 그 결과로 이어졌으면 하기에.신앙은 필연적으로 비극에 뿌리내린다. 인간을 위하는 마음이 현실에 부딪혀 부스러진 잔해 속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틀렸어.”

“네?”

…그러나 가끔, 혹은 꽤 빈번하게. 신앙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비극을 만들어낸다.인간이 만들어냈을 신앙이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신은 이 아이들을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지 않아. 결코.”

“네, 네?”

“이미 여기부터가 이 아이들에게 좋은 곳이 아닌데도 이곳으로 불렀잖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실컷 고통스럽게 죽인 다음에 뭘 해주기를 바라니?”

인간은 지배당할 수 있다. 본디 인간도 짐승이라, 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목에 족쇄를 차고 가축이 될 거다.그러나 그 대상이 신앙일 수는 없다. 신앙은 도구이며, 도구가 인간을 쥐고 휘두를 수 없듯이.

“제리. 이 아이들은 어디에서 왔니?”

“어, 어디냐니요…. 열국에서….”

“왜 고통받고 있니?”

“황금경의 작물 때문에, 장애가 생겨서.”

“누구의 부름을 받고 왔니?”

“우레회주 님이….”

뒤늦게 유도당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제리가 말을 하다 말고 빽 소리를 질렀다.

“지, 지금 우레회주 님을 모함하려는 거죠! 그죠!”

“아니야. 그녀도 깨닫지 못했을걸. 의도하지 않은 채로, 혹은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로 이 체제를 유지하고 있겠지.”

내가 생각을 읽었으니 알아. 우레회주 자신은 선의…라고 할까, 의무감으로만 행동하고 있어. 그 의무감은 제리처럼 이곳에서 자라며 학습된 거고. 황금경이 직접 연금한 농작물을 먹고 몸을 이루면, 신체는 강건해지나 외부의 간섭에 약해진다. 흡사 호문쿨루스처럼. 기공을 익히거나 고유마도를 깨닫지 못하면 황금경에게 스쳐도 재료가 되어버린다.클라우디아에서 만들어진 농작물을 먹는다면 다른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황금경에 가까워지면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질주하는 황금경은 누구에게나 위험한 존재이므로.

그러나 만일, 둘 다 버젓이 존재한다면. 둘이 서로 섞일 만큼 균형을 이루어 열국을 떠돌면. 열국의 비극은 어느 한쪽이 끝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정교하게 조작된 인과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 이 모든 게 그 일부겠지.”

“아, 아으….”

제리는 귀를 막고 신음하고 있다. 내 말을 듣지 않은 걸로 하고 싶은 것처럼. 그러나 제리가 잠깐 관리를 소홀히 한 사이, 불편을 느낀 갓난아기들이 더욱 크게 울부짖는다. 울음소리는 다른 아기들에게도 전염병처럼 퍼진다. 대를 이어나가는 생물에게, 다음 세대의 울음소리는 이전 세대를 부르는 힘이 있다. 거슬릴 수밖에 없는 불협화음이 모두를 잡아 이끈다.  세상에 지옥이 어디 있어. 여기가 바로 지옥이지.

“자, 그러면 여기 어디였는데.”

보통 같으면 여기서 걸음을 멈출 거다. 열국의 태생적인 비극에 한탄하며 눈물 짓겠지.

하지만 나는 비명 지르는 갓난아이들 사이로 걸어가 반대편 벽에 도달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레회주의 기억에서 이 너머에 있는 비밀 장소를 읽었으니.

스페이드 8을 뽑아 벽 사이에 난 홈을 긁었다. 잠깐 빛살이 번뜩이더니 벽이 수백 장의 카드로 바뀌어 흩날렸다. 무수한 카드가 놀란 나비처럼 핑그르르 날갯짓하며 땅으로 떨어지고, 흩어진 벽 틈으로 빈 공간이 드러났다.

우레회주의 기억에서 읽었던 초대 우레회주의 비밀장소다.

카드로 변한 벽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좁고 어두컴컴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 우레회주의 비밀공간에는 작은 책장과 그에 연결된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책장에는 온갖 서적이 빼곡이 꽃혀 있었는데, 손때가 탄 모습이 자주 꺼내서 읽어본 듯하다. 책상 위에는 노트 한 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벼락등불 하나가 노트를 비추고 있었다.우레회주의 비밀을 품은 노트. 이미 우레회주의 생각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내용을 파악한 상태였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우레회주가 읽은 노트’만 읽었을 뿐이다. 인간은 자기 지식을 기반으로 정보를 가공해서 받아들이니, 진실을 알고 싶다면 노트를 직접 볼 필요가 있었다.

과연 초대 우레회주는 어떤 비밀을 갖고 있었는지. 내 예상이 맞다면….나는 노트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은, 앞으로 계속될 내일을 보장한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네. 이걸로 확실해졌다.초대 우레회주. 클라우디아를 만든 곳은 성황청이다.

-황금경은 조물주가 만든 세상을 주물렀다. 그 저주받을 마신 때문에 세상에 견고함이 사라졌다. 하나는 다른 무언가로 변할 수 있으며, 모두를 묶어주던 강철의 약속이 휴짓조각이 되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불가하다. 그 마신이 만드는 비가역적인 변화는 인간을 다른 무언가로 만들 것이다.

-하나, 현 황금경은 무시무시해도 이지를 잃은 괴물. 이 언덕에 서서 그를 지켜보며, 그가 만드는 변화를 막아낸다면. 여전히 우리는 영속할 수 있으리라.

-잃어버린 질서를 되찾을 것이다.

영속이니, 질서니. 누가 봐도 성황청이잖아. 이 근처에 신학을 배울 곳이 없다 보니 우레회주는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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