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혀를 차며 페이지를 넘겼다.그 뒤로는 황금경의 가짜 금 구분법이나 연금술의 한계, 그리고 주의해야 할 기술이 잔뜩 적혀 있었다.
-그는 식량마저도 만들어낸단 말인가? 천신과 대지모신의 은혜마저도?
특히 어느 순간부터는 황금경이 만들어내는 작물에 집중하고 있었다. 황급히 써댄 경악 아래로는 다소 안정된 필체로 조사된 내용이 서술되었다.
-황금경이 만들어내는 작물은 부자연스러운 것. 그걸 인간이 먹으면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 그 정도는 아직 육체가 덜 성장한 어린아이일수록 크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니, 당연한 일인가. 연금술로 대충 흉내 낸 작물이 건강할 리 없으니.
그 이후에는 신이 난 듯이 이것저것 쓰다가, 점차 글귀가 짧아진다 싶더니 마지막에는 작게 한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
-프랑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황금경의 작물이 발효되거나 변성될수록 그 부작용이 줄어든다고 한다. 굶주림에 정 안 될 것 같다면… 추천하지는 않으나, 최대한 가공해서 섭취하도록 한다.
-호문쿨루스를 주의하라. 이 땅이 산맥 너머 공국과 비슷한 꼴이 되어서는 안 될 터이니.
그리고 식량 가공법과 황금경의 식량을 어떻게 모아서 처분할지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있었다. 황금경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 작물을 한 번에 수확하고 가공하는 존재. 누가 봐도 억압회주의 모델로 보인다.현실과 타협한 것에 기분이 좀 상했는지 뒤로는 작물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대신, 다른 부분에 관심을 돌린 것 같았다.
-연금술은 분명 위험하나, 제대로 사용할 경우에는 효율적이다. 강철을 마음껏 가공하는 힘은 야금에 필요한 시설과 자원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특히 시행착오에 걸리는 시간을 찰나로 줄이는 덕에 현자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현자 프랑은 연금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어차피 세상에 드러난 이상 감출 수 없다. 동의하는 바이나, 힘을 쓰는 데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연금술이라면, 우리의 이상 역시 현실로 바꿀 수도.
성황청이 마신을 배척하기만 하는 건 아니지. 그들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비가역적인 변화를 두려워할 뿐, 마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앞서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마신의 힘을 많이 모았고, 그걸 가장 잘 활용하는 집단이니까.
그렇게 운명의 가호를 받는 이들은 클라우디아를 꾸준히 발전시켰다. 미래를 축복하는 성황청의 가호 아래 클라우디아의 찬란한 도약이 계속되는 와중.
-프랑. 그토록 주의하라 일렀거늘. 너는 어째서.
어두컴컴한 절망이 담긴 한 문장이 보였다. 현자 프랑. 이 노트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었던 인물이며, 클라우디아의 기초를 세운 기술자. 아마도 이 노트의 주인을 보좌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현자일 텐데…. 이런 글이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다행이다. 벼락은 본디 천신의 것. 언젠가 나타날 것이었다면.
-지켜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을 뿐. 나는 우레회주가 되어, 벼락을 수호하겠다.그리고 이 이후, 노트는 두꺼운 설명서로 변해 있었다. 우레방아를 어떻게 써서 도시를 어떻게 움직일 건지 설명하는 지침서였다. 이전과는 달리 앞뒤 사정이 적혀있지 않다. 담담하게 설명만 계속할 뿐.
마치 중간에 화자가 바뀐 것처럼 의도적으로 감정을 죽이고 정보만 채웠다. 곳곳에는 한 번 썼다가 지워진 흔적까지 보인다. 다시 읽으면서 적합하지 않은 내용은 지웠으리라.
쳇. 차라리 인간이었다면 손쉽게 읽어냈을 텐데, 내가 노트의 왕은 아니라서.어쨌든, 하나는 확실해졌다.
다른 수많은 신처럼 뇌신은 천신의 일부가 되었다. 원래는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이제는 천신의 일부다. 신화나 민담으로 치부되었던 옛 신앙처럼 하늘에 녹아들어 천신을 빛내는 몸종으로 쓰일 것이다. 성황청이 벼락을 훔쳐 간 덕분에.
팔락팔락 넘기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장. 별다른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그 노트의 아래쪽에는 이런 글귀가 남아있었다.
-...후계자가 필요하다. 이 모든 비밀을 대대로 수호할, 강력하고 특별한 존재가.
잠시 그 글귀를 곱씹던 그때, 지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벼락으로 철문을 열어젖힌 도시의 수호자는 은은한 노기를 띠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곳에 와도 된다고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죠?”
쳇. 역시 대응이 빠르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몰래 잠입했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밖에서는 지금 뇌신 사냥이 한창이잖아요. 구조적으로 들킬 수가 없는데?”
“벌레가 몸 안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굉장히 간지럽고 거슬리는 기분이 계속 들어서 찾아와봤더니…. 설마, 이 틈에 도둑이 숨어들 줄은.”
아니, 밖에서는 뇌신 사냥이 한창이잖아! 벌레가 몸 안을 좀 기어간다고 다 제쳐놓고 와? 일단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나중에 해결했어야지!
호소해봐야 쓸데없지. 이건 어떤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니까.우레회주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나를 찾아올 수가 없다. 바로 위에서 뇌신과 회귀자의 한판 승부가 펼쳐지는데 어떻게 여기에 신경을 쓸까. 주의를 기울일 여유도 없고. 설마 누군가 그러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레회주는 지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매우 빠르게 찾아왔다.
단순한 우연? 동물적인 직감?
그런 건 형편 좋게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물론이고 상대도 마찬가지. 만일 내가 최강의 손패를 집어서 막 질렀는데 상대가 조커를 딱 내민다면, 그건 평생 다시 없을 불운이 아니라 작업을 당한 거다. 경력자의 말이니까 믿는 게 좋다.이건 직감이 아니라 계시.
신관이 성녀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혹은 통신병이 통신을 받은 것처럼. 누군가 알려줘서 찾아온 거야. 아니면 저 사고의 불연속성이 설명이 안 돼!어쨌든 나는 현행범. 이미 걸린 이상 발뺌할 방법이 없다. 내가 말했다.
“우레회주 님. 제가 알게 된 진실이 하나 있어요.”
우레회주는 단번에 일축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진실에 정당성은 없어요.”
“그래도 진실이죠? 들어는 봐야 하지 않을까요?”
입이라도 털려고 했는데, 살기등등한 우레회주는 내 말을 들어줄 기색이 아니었다. 명백한 적의를 품고 한 걸음씩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도달하기 전, 우레회주는 작은 장애물에 맞닥뜨렸다.
“우, 우레회주 니임….”
쓰러졌던 제리가 우레회주의 옷자락을 잡으며 울먹였다.
“저, 저 사람이 나쁜 말을 해요. 우레회주 님이, 아이들을 아프게 한다고.”
우레회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옷자락을 붙잡은 작은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그녀는 몸을 돌려 제리를 다독였다.
“제리. 그의 말을 듣지 마세요. 우리는 틀리지 않았어요.”
“그렇죠? 저,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거죠?”
“그건….”
“아니죠? 우레회주 님. 당신은 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잖아요?”
제리가 만든 틈을 이용해 가장 날카로운 말로 그녀의 빈틈을 찌른다. 완벽해서 흠집조차 안 날 것 같던 우레회주의 얼굴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열국에서 일어나는 장애는 황금경이 만들어낸 식량이 몸에 섞이기 때문. 신체가 자라며 비틀리거나 망가지게 되죠. 당신도 그것을 알기에 피뢰탑에서 식량을 재배하고 있죠?”
우레회주가 선인이냐, 악인이냐 구분한다면 분명 선인일 것이다. 그녀의 의무감이나 행동은 전부 도시를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악의는 없었겠지. 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도 결국 선의에 의한 거고.
“그런데, 아시잖아요. 섞이는 게 문제면 안 섞으면 된다는 걸.”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선의를 갖고 있으면서도, 노트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따르다 보니 무언가가 크게 뒤틀렸다.
“누군가 굳이 열국의 신혼부부와 아이들을 한데 불러모아 식량을 제공하는 바람에, 열국에는 장애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말이죠.”다른 이들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한 명, 클라우디아의 우레회주만은 그 사실을 안다. 그녀가 수혜자이며, 동시에 원흉이기 때문이다.
둘이 섞이면 장애가 생긴다. 그렇다면 시간이 자연스럽게 섞이지 않는 둘로 분리되기 마련이다. 그게 마땅한 이치다.
그러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둘을 섞은 탓에, 열국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정말 당신이 원하던 결과였나요? 열국에 맴도는 저주를 계속 후대에게 안겨주는 것?”
“닥치세요.”
“그렇진 않죠? 만일 그랬다면, 굳이 이 아이들을 당신이 돌볼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아이들의 우는 소리가 점차 크게 울려퍼진다. 열국 전역에 만연한 재액의 그림자. 그걸 방치한 동시에 보호한 우레회주는 원수를 보듯 나를 노려보고 있다. 원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하나 건넸다.
“착각하지 마세요. 저는 딱히 당신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우레회주 님 마음에 물어보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 노트에 적힌 내용이 마음에 드나요?”
“우리는 틀리지 않았어요. 이 노트는 클라우디아의 질서를 만든 초대 우레회주의 것. 그들의 노력 덕에 클라우디아는 번영을 누렸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이 노트가 만든 질서 속에서 열국의 비극이 계속 생겨났는데도?”
“그건 황금경이 존재해서 생긴 문제죠. 전대 우레회주의 책임도, 클라우디아의 책임도 아니에요. ”
“뭐, 그렇다고 쳐요. 유치하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임 전가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솔직히 황금경이 존재한 탓에 모든 문제가 생긴 게 맞고. 그런데 왜 당신은 아직도 떳떳하지 못하죠? 고통에 울부짖는 아이들을 지하에 꽁꽁 숨겨둔 이유는 뭐죠?”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럴 이유는 없다. 열국에서 태어난 아이 중 3분의 1은 죽고, 3분의 1은 장애아로 태어나고, 나머지 3분의 1만 겉보기에 멀쩡하게 태어난다는 건 주지의 사실. 열국에서 아이를 가진다는 건 매우 위험한 도박에 참가한다는 의미와 같다.
그런 산모와 아이들이 몰려드는 클라우디아에는 장애 때문에 죽거나 고통받는 아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들을 도맡아 보살피는 우레회주를 응원하고 찬양하겠지. 너나 할 것 없이.
“그냥 우레회주 님이 외면하고 싶어서 아니에요? 그래서야 당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단 한 명. 진실에 맞닿은 우레회주는 그런 열국을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지하에 묻어버리고 싶을 거다. 전혀 떳떳하지 못하니까.우레회주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존경하는 우레회주가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보다 못했는지, 제리가 벌떡 일어나 앙칼지게 외쳤다.
“우레회주 님께 나쁜 말 하지 마요! 우레회주 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우레회주 님?”
우레회주는 말없이 제리의 손을 놓았다. 한때 우레회주와 비슷했으나,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달라진 우레 수련자. 우레회주는 어린아이를 보며 짧은 상념에 잠겼다.
‘저는 선택받은 존재. 지금까지 노트에 적힌 대로, 클라우디아를 지키기 위해서 제 능력을 발휘했어요. 하지만, 분명… 클라우디아에는 아이들의 고통이 있는 것도 사실. 그의 말대로,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죠.’
…라는 생각이 분명히 있다. 나는 독심술로 그 생각을 읽었다.인간으로서의 우레회주는 고통받는 아이들을 동정했고 그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오만하나 분명 선한 이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세상은 마음대로 살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우레회주의 마음 속 한구석에서 다른 생각이 범람했다.
홍수가 난 것처럼 쏟아지는 생각에는 인간적인 고뇌는 없다. 클라우디아의 지도자이자, 열국의 수호자. 그리고 성황청의 계시를 받는 자. 해야 할 일은 수도 없고, 짊어진 의무는 너무나도 크다. 그녀의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클라우디아가 요동친다. 일개 인간으로서는 버티지 못할 책임은 그녀를 철인으로 만들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질서를 유지해야 해요, 만일 그게 고통이라면, 그건 이 땅에서 태어난 이가 감내해야 할 원죄.”
고뇌를 벗어던진 우레회주는 굳건한 태도로 말했다.
“궤변. 여기까지 쳐들어와서 말하는 게 고작 그따위 궤변이라면 실망스럽군요.”
마음을 빤히 읽고 있던 나는 귀를 의심했다.조금 전까진 인간적인 고뇌를 품고 있던 우레회주다. 그러나 무언가 벼락처럼 번뜩이더니, 모든 고뇌를 인식 저편에 집어던지고는 우레회주로 변모했다.마치 우레회주는 인간이 아니라는 듯이.
“육신을 다른 인간이 만든 무언가로 대체하는 것. 그건 2종 금기, 접목의 대죄. 불경한 마법사들조차도 주의하는 호문쿨루스의 딜레마인데, 그걸 방관하라고요? 열국의 모든 인간을 황금경의 손아귀 아래 떨어뜨리라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존엄성을 버리게 두라고?”
그녀의 머리가 들썩거린다. 전신에 가득 뻗어나간 우레의 힘이 다시금 한데로 모인다. 그런데, 모이는 방향이 조금 이상하다.우레회주의 머리 위로 떠오른 샛노란 고리가 떠오른다. 천사…의 것이라 하기에는 불안정해 보이는 전류의 고리가 기분 나쁜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의 격을 낮출 바에야, 평생 고통을 안고서 살아가는 편이 나아요.”
힘과 오만함을 모두 가진 그 모습은 천사나 다름없다. 억지로 다른 점을 찾자면, 천사의 형상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우레를 매개로 본인의 육신을 천사처럼 쓰고 있다는 것.여기서 제일 인간같지도 않은 게 인간의 존엄을 논하다니, 아이러니네. 아무리 봐도 네가 제일 이상하잖아!
“정작 당신은 전신이 황금경의 작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자기는 그 힘을 마음껏 이용하면서 다른 이들은 해선 안 된다니. 사다리 걷어차기잖아!”
“그렇기에 저는 특별해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저의 육체와 권능을 동경하는 대신 탐낼 테니까. 모두 앞다투어 황금경의 배설물로 육신을 채우려고 들 테니까. 모든 인간이 저와 같은 힘을 얻는다면 세상의 질서는 장난감처럼 무너질 테니까!”
우레회주의 머리카락이 전류의 고리를 휘감듯이 떠오른다. 그건 천벌을 다루는 천사 같기도, 혹은 머리 위의 고리에 지배당하는 꼭두각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올라가다가 만 머리카락은 옆으로 펼쳐져 날개처럼 위아래로 흔들렸다.벼락의 빛을 담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우레회주는, 새로이 계시를 받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정녕 인간이 그 존엄을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나요, 인간의 왕?”
진짜, 이제는 개나 소는 물론이고 굴러가던 돌멩이도 나를 알아보고 안부를 묻겠구나. 아예 소문을 내지 그러냐.
바로 옆에 안개 공국이 있기 때문에 클라우디아에는 그럴싸한 신전이 없다. 우레회주는 살면서 신전을 본 적도 없으며 신학이 학문으로 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계시를 받은 지금, 우레회주는 누구보다도 독실한 신자였으며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동지였다.운명의 선택을 받고, 그 기회와 힘으로 우레회주가 된 그녀는.
“성검대였군요, 우레회주. 쳇, 괜한 질문을 했네.”
성황청의 직속무력부대, 성검대는 운명이 선택한다.누구도 그들에게 성검대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들도 성검대가 되고 싶다고 지원하지도 않는다. 그냥, 다른 인간 사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이 깨닫는다.그들은 성검대이며, 운명의 선택을 받았다고. 그들을 이해하고 긍정할 유일한 것은 천신이노라고.
우연히 얻은 힘도, 믿고 따르던 가르침도, 애써 지키던 가치도, 절실히 바라던 것도. 그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는 계시를 따른다.
“누구보다도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할 인간의 왕이 그것을 저버리다니. 당신은 역시 사라졌어야 했어.”
진짜 막말하네. 누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고 사라지고 싶어서 사라졌냐? 나는 발끈해서 대답했다.
“이게 당신들이 다 이상한 이름을 갖다 붙여서 그러는 건데, 인간의 왕이라고 왕이 아니거든요? 백성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나하나 명령하는 왕은 인간들이 만든 개념이라고요.”
너희들이 멋대로 기대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애초에 나는 짐승의 왕. 인간이 짐승이던 시절, 그들 모두를 대변하는 존재…였다.따지고 보면 나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에게 영향을 받는다. 말만 왕이지 오히려 궂은 일만 하는, 태어났을 때부터 무보수 노동이 약속된 바지대표라고 할까. 그에 비해서 너희들 왕은 참 좋겠어. 자기 멋대로 인간을 바꾸니 말이야.
뭐,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왕을 몰아낸 거겠지만.
“인간은 무릇 이래야 한다, 마땅히 존엄을 지켜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무릇 그런 인간이 도대체 어디 있죠? 제가 아는 인간은 아닌 것 같던데. 존엄이라는 건 또 뭔데 지켜줘야 하죠? 비상식량이라도 되나요? 그러면 좀 나눠줬으면 하네요. 꽁꽁 숨겨놓지 말고요.”
거짓 한 점 섞지 않은 내 순수한 본심이었으나, 이걸 비아냥으로 들은 우레회주는 똑같이 비꼬아서 응수했다.
“인간이 어찌 되든, 얼마나 비참하게 전락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흥, 야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군요.”
“인간이 어찌 되든, 얼마나 비참하게 전락하든. 그 역시 인간 아니겠나요. 당신처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요.”
“그러다가 도시가 멸망하면? 도덕이 사라지면? 질서가 무너지면? 인간을 지켜주는 그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거기 남아있는 인간은 무엇이 되죠?”
우레회주가 팔을 확 흩뿌렸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벼락을 깃들인 손가락이 근처 아이들을 향한다. 그녀는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며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황금경! 그 저주받을 마신이 금국이라는 질서를 무너뜨렸기에, 이 땅에는 수많은 비극이 뿌리내렸어요! 감당할 수 없는 힘은 받아들이는 게 아니야. 세상을 부술 힘이라면, 그건 겉으로 드러나지 말고 영영 사라져야 해! 수많은 죽음, 혼란과 공포, 전쟁과 비극을 일으킬 바에야! 차라리 사토 속에 묻어두고는 아예 잊어버리는 편이 나아!”
그게 질서를 지키는 방식. 힘겹게 쌓아 올린 뒤, 부서뜨릴 만한 걸 전부 없애는 것. 성황청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황금경도 인간이었어요. 평범한, 한 명의 인간.”
물론, 내게 있어서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방식이지만 말이지.
“세상에 변화를 이끈다고 해서, 너무 강력하다고 해서. 마신이라고 마치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로 만들고, 낙인을 찍고, 터부로 삼아 생각하는 것조차 막아버릴 거라면….”
부정, 금기, 터부. 실제로 존재했으나, 이제는 감히 떠올리지도 못하게 막아낸 것들. 마신이라 이름 붙이는 건, 모두 그걸 위해서….라고 해도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긴 해요. 여러분도 인간이니까요. 저는 여러분의 소망도 소중히 여겨요!”
우레회주의 표정에 약간의 기대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