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대재해급 마황 혹은 마신이라 불리었던 것의 사체 위에서 나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후. 나도 곧 죽겠는데?”
깔고 앉은 군주들의 군주라는 놈을 죽이기 위해 내줄 수밖에 없었던 한 수.
그 한 수로 인해 오른 가슴 아래로부터 옆구리까지 깔끔하게 뚫려버렸다.
“큭큭. 아침에 먹은 게 좀 더부룩했는데 시원하게 뚫려서 속이 다 시원하네.”
이런 농지거리를 받아주던 길드원들도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고, 게이트의 문은 내가 직접 닫아 걸었으며, 포션이니 하는 것들은 진즉에 다 썼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곧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 사실을 내가 깨닫자.
내가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원인인 악몽의 군주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쉽지는 않아? 원한다면 내 옆자리를 내어 줄 수도 있어.”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친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려 주었다.
“위악… 아니 수 쓰지 마라 악몽의 군주!”
“내가 무슨 수를 썼다고 그래?”
“우리 계약은 분명 내가 깔고 앉은 이 자식을 없애주는 것까지였어. 영혼을 넘길 생각은 없다.”
“…거 섭섭하네. 처음에는 네 특별한 영혼이 탐이 나서 접근하긴 했지. 하지만 그건 네가 이 일을 진짜로 해낼 줄은 몰라서 그런 거 였고, 군주들의 군주가 이렇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 황위가 내게 돌아온 상황에선 더 이상 네 영혼이 탐이 나진 않아.”
“응. 안 속아.”
“와. 진짜 속고만 살았나. 아니지, 속은 걸로 치면 오히려 네가 나를 속여 먹은 게 훨씬 많잖아?! 너 때문에 실직한 사탄만 몇 명인데?!”
혓바닥이 긴 것 보니 여전히 탐을 내고 있구만 뭘.
“악마 새끼 말을 내가 믿을 줄 알고? 단언컨대 더 이상의 거래는 절대로 없다.”
“아니 진짜로 순수한 우정으로 베풀고 싶은 거라니까?! 그냥 너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것뿐이라고! 악마 혈통이 이렇게 억울한 건 뿔나고 처음이네!!”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
“됐으니까. 왕중의 왕인지 복면가왕인지는 너 혼자 많이 해라.”
“군주들의 군주거든?!”
그러냐?
아무튼 함께해서 좆같았고!
다시는 보지 말자!
나는 이제 인생의 주마등이나 천천히 감상하다 갈라니까 잡음 넣지 말고.
진심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었어.’
딱히 아쉬움은 남지 않는 인생이었다.
부와 명성은 질리도록 누려봤다.
어떤 이의 임기 첫날 최초의 게이트가 열려 하늘에서 이인종과 마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이래.
헌터 혹은 각성자라 불리는 신인류가 등장했고, 그네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열려 각종 마물을 쏟아내는 게이트를 닫아왔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그래도 한번 입을 열어 보자면.
나는 그 헌터 혹은 각성자라 불리는 족속들 중 전 세계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였다.
‘SSS급.’
우리말로 초강대국급 국가 권력급 헌터로 분류되던 게 나였으니까.
‘덕분에 낯 뜨거운 별명도 제법 많이 얻었지.’
사령왕이니, 일인 군단이니, 명왕의 적자니, 네크로폴리스의 참주니 하는 것들.
그러니 아쉬울 게 있을 리가….
‘아. 딱 그거 하나 아쉽기는 하네.’
요즘 재밌게 읽고 있던 무협 소설 끝까지 못 읽은 거?
나는 그렇게 점멸하며 멀어지는 의식을 미련 없이 놓았다.
그런데 이때!
느릿느릿 점멸하던 의식의 빈도가 빨라지더니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뭐야 이거?’
어느 순간!!
코를 찌르는 한약재 냄새와 함께 번쩍! 하고 다시 눈이 뜨였다.
“요, 용운 도련님이 깨어나셨습니다요!”
그렇게 나는 내가 읽던 소설 속 무림세가인 진주언가의 개망나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문제없다.
나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제1화. 언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1)
“요, 용운 도련님이 깨어나셨습니다요!”
꾸벅꾸벅 졸다, 최초로 나를 발견한 종놈이 내가 깨어났다며 빼액 소리를 지른 것을 시작으로, 난리 난리 쌩난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걸 알았으면 어서 움직여야지 뭘 그러고 섰느냐?! 빨리 가서 가주님과 이화 부인을 뫼셔오너라! 그 돌팔이 의원 놈한테도 기별을 넣고!!”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소년티를 막 벗은 듯한 녀석이 무복을 입은 채로 뛰어 들어와 호들갑을 떠나 싶더니.
“오늘이 고비였는데! 맥이 돌아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백건(白巾)을 쓴 의원이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와 내 맥을 짚었다.
“기적입니다! 기적! 관세음보살이나 약사여래 둘 중에 한 분은 분명히 언가를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이니 어쩌니 하며, 소독이나 제대로 하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러운 침(針)들을 내 몸 여기저기에 꽂아 사람을 헬레이저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끝이면 난리가 벌어졌다는 말도 안 했지….
이어서 곧바로 다음 타자가 나타났다.
“…용운아.”
다음 타자는 예스럽지만 단아한 비단 궁장을 걸친 중년 부인이었다.
그녀는 흙 묻은 버선발로 달려와, 자신을 어미라 지칭하며 사슴 같은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봤다.
‘음.’
진짜 고우시다.
진짜 미인이긴 하시다.
어디 보자, 내가 근래 들어 즐겨 읽던 무협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삼단 같은 머릿결에 대비되는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와 그에 걸맞은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계신다고나 할까?
“…이 어미가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지 아느냐? 언가와 이가의 조상님들이 도우심이다. 도우심이야.”
근데 왜 내 앞에서 자꾸 어미 어미 하시고 계신 거지?
‘나는 조실부모한 고아 출신인데….’
그때였다.
딱 이십 년만 시간을 거슬러 드리면 족히 천하제일미, 그러니까 월클 논쟁에 끼일 만큼 아름다우신 부인께서 왜 내 앞에서 손수건에 눈물을 찍고 계시나 고민하고 있는 이때.
어떤 생각이 번뜩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있어봐.’
무협 소설?
‘그러고 보니, 아까 뛰쳐나갔던 젊은 하인 녀석이 용운 도련님이 어쩌고 했지?’
그 소리에 버선발로 달려온 저 귀부인은 언가의 조상님들이 도왔다 어쨌다 같은 소리를 했다.
언씨는 흔한 성씨가 아니다.
용운이란 이름도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이름이 아니다.
그 둘을 조합해서 나오는 성명은 언용운.
‘…내가 아는 언용운은 얼마 전까지 읽던 소설에 나왔던 찌질한 병신 새끼 하나뿐인데?’
이 순간.
벙벙한 상황으로 인하여 잠시 정지했던 사고가 회전하며 생각의 퍼즐들이 하나둘 짝을 맞추기 시작했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니, 지금 이 상황에도 무언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짐작되는 원인 중에 ‘무협 소설’, ‘언용운’, 그리고 ‘나’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빙의.’
그러고 보니 죽기 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읽고 있던 소설 끝까지 못 읽은 게 아쉽다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긴 했던 것 같다.
악몽의 군주.
아니 이제 마황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그 아름다운 새끼가 그 소리를 듣고 시키지도 않은 뻘짓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이런 씹.’
덕분에 쌍욕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떠오른 된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켁.”
목구멍이 꽉 막혀 있어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거니와.
아비이자 언가의 가주로 짐작되는 중년인이 불호령을 내리며 들이닥쳤으니까.
“용운이 네 이놈!!!!”
그렇게 들이닥친 이 몸의 아비로 짐작되는 양반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하늘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죽었어야지! 그대로 죽었어야지!! 네가 무슨 낯으로 살아 눈을 뜬단 말이냐?! 감 총관! 감 총관 게 있는가?!”
“예. 가주님.”
“차고 있는 검을 이리 내거라!!”
그리고 따라 선 시위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칼을 뽑아 그야말로 나를 양단해 버리겠다는 듯이 치켜들었다.
“내 저 망종을 직접 처단하여 조상님께 사죄를 구할 것이다!!”
그에 어미 되시는 분께서 양팔을 벌리고 막아서셨다.
“상공! 죽을 고비에서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아이에게 어찌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이까?!”
“부인은 비키시오!!”
“비키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아비규환으로 치달아 도저히 물을 베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부부 싸움을 응시하며. ‘엿 됐구나’를 중얼거렸다.
* * *
그렇게 내가 언용운의 몸에서 눈을 뜬 지 딱 두 달이 지났다.
그간 나는 내가 처한 상황에 관한 대략적인 조사를 끝냈다.
‘나는 무림학관의 검술천재 속으로 들어왔다.’
무림학관의 검술천재.
어린 시절부터 헌터 생활을 하며 감정이 메말라 어지간한 미디어엔 입꼬리조차 미동하지 않게 된 내가, 매일매일 기다리며 본 소설.
무협지 꽤나 읽은 강호 무림의 고인물 독자들은 이 소설을 더러 ‘이런 건 무협이 아니야!!’ 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재밌었어.’
나도 무협지 꽤나 읽은 고인물인데.
냉정하게 말해서 호불호가 좀 갈릴 라이트한 무협이었고, 그런 주제에 주인공은 또 이른바 대협형 주인공이라 용서를 너무 많이 해줘서 답답한 에피소드도 자주 등장했었다.
‘하지만 라이트한 무협이라서 나올 수 있는 웃음과 대협에게 느낄 수 있는 웅장함이 있었지.’
그래서 ‘이런 건 무협이 아니야!’ 소리를 하는 양반들에게 ‘무림학관의 검술천재는 정통 무협이다!’ 대댓글을 쳐가면서 열심히 봤었다.
‘거기다 나는 게이트 고아로 살다 어린 나이에 헌터로 각성했던 케이스라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아보지 못해서 더 재밌었어.’
청소년기의 기억이라곤 Ai와 더미 로봇에게 훈련받은 기억밖에 없었던 나인지라, 주인공들의 학관 생활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덕분에 정말로 재밌게 읽고 있었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못다 한 꿈이나 못 먹은 음식이 아니라 못 읽은 다음 화가 궁금할 만큼.
하지만 그 생각이 이렇게 소설 속에 들어와 직접 그 끝을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악마 새끼.’
하.
그래 백번 양보해 조금은 그런 마음도 있었다 치자고.
그래.
그러니까 소설 속에 들어온 것은 좋다 이거야.
‘그런데 하필이면 왜 언용운 이 새끼냐고.’
내가 몸을 차지한 언용운을 한마디 말로 요약하면.
“그… 아주 유우명한…. 씨, 씹새끼?!”
그때였다.
그렇게 언용운의 업보를 떠올리고 있는 이때.
“도련님 식사 가져왔습니다요.”
전속 시종인 왕삼이 녀석이 점심을 가지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어. 들어와.”
메뉴는 따끈따끈한 오리고기.
“꼭꼭 씹어 드셔야 합니다요.”
나는 왕삼 녀석에게 알았으니 나가보라 훠이훠이 손을 내저은 뒤, 오리고기를 입 안에 넣으며 계속해 생각을 이었다.
‘스물.’
현대인의 눈으로 따지고 보면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언용운이 살아온 세상과 녀석이 물고 태어난 수저의 색을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협지 기준 스물이면 범부, 그러니까 평범한 농부 같은 사람은 어지간하면 일가를 이루지.’
번듯한 집에서 태어난 자들은 선비로서 관에 투신할 마음을 먹고, 무에 뜻을 두어 강호에 나가겠다 뜻을 세운다.
‘근데 언용운이 이 새끼는 진주언가의 장남이라는 새끼가….’
진주언가.
언가권이라는 권법과 시체를 조종할 수 있는 강시술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도법(刀法)으로 이름난 팽가(彭家)와 함께 하북 땅을 양분하던 무림의 명가.
‘이, 소설의 설정상 육십 년 전에 벌어진 정마대전 때 큰 피해를 입어 세가 크게 기울긴 했다.’
육십 년 전에 정파와 마교가 천하의 패권을 두고 대차게 한판 붙은 그 사건.
그 사건의 여파로 언가는 직계와 방계의 많은 가솔들이 목숨을 잃었고, 언가의 자랑이자 양대 기둥 중 하나였던 강시술의 맥이 끊겼다.
“쫍쫍. 그치만 부자는 망해도 최소한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으니까.”
언가가 바로 그 삼대는 가는 부자였다.
강시종의 맥이 끊겼다 하나, 언가권 하나만으로도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당장에 오대세가 자리에선 밀려났다 하나, 진주언가는 여전히 강호의 세가들을 일렬로 세우면 그래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가문이었다.
‘육십 년 전의 희생으로 무림맹과 다른 세가들의 원조도 받을 수 있었다지?’
그러니까 정리하면.
언용운은 그런 언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장남으로 태어나 ‘응애! 나 아기 용운!’을 외친 순간 벌모세수를 받은 무림 금수저였다,
“짭짭. 그런 새끼가 스무 살에 쌓아 놓은 건?”
고작 메추리알만 한 내력.
그리고 주색잡기를 통해 진주 일대와 하북의 명소들마다 자리한 기루들에 쌓아 놓은 외상 장부.
“남들은 간신히 홈 플레이트나 일루에서 시작하는 인생을 삼루에서 시작한 새끼가 이따위로 산 것도 사실 한심하긴 한데….”
언용운의 바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 정도였다면 보통의 망나니에 그쳤겠지.’
언용운의 바닥에는 지하실이 달려 있었다.
‘도박.’
언용운의 망나니짓에 학을 뗀 언정웅이 지원을 끊고 심신 수련에 전념할 것을 명하자, 언용운은 도박판에 뛰어든다.
처음의 밑천은 어미의 패물을 몰래 훔쳐 판 돈이었다.
물론, 호구답게 시원하게 다 날렸다.
그 시점부터 언용운은 도박판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날린 돈을 되찾아야 했을 테니까.’
안 봐도 비디오다. ‘따서 갚으면 돼.’, 혹은 ‘따서 만회해야 해.’를 중얼거리며 또 도박판을 찾았을 것이다.
물론, 개털을 받아주는 도박판은 없으니 새 밑천을 구해야 했다.
그리하여 녀석은 판돈을 크게 마련하기 위해 마침내 가문의 비전을 팔아먹는다.
제시집요(製尸輯要)
언가제혼술(彦家制魂術) 상권(上卷).
언용운이 놈 딴에는 필요 없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언가의 강시종은 지난 정마대전에서 실질적으로 그 맥이 끊겨 버렸으니까.’
맥을 이어오던 혈통이 끊기고, 강시를 운용하는 모든 비술이 담긴 제혼술의 하권은 이미 육십 년 전에 소실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언가제혼술 상권은 그저 내공을 상단전과 하단전에 나눠 쌓는 법을 담고 있을 뿐인, 내공을 비효율적으로 나누는 이상한 심법을 담고 있는 서적이었고.
제시집요는 그저 시체가 오래가도록 염하는 각종 방법일 뿐이었다.
사실 이는 비단 언용운만의 생각이 아니라, 대다수 언가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당금의 진주언가는 강시종의 복원 같은 요원한 꿈은 미뤄두고 언가권을 통해 천하제일 권사를 배출하는 걸 일대 목표로 삼고 있었다니까.’
하지만 정상인이라면 실전된 하권(下卷)을 언젠가 복원해 내겠다는 생각을 하지 가보나 다름없는 비전을 엿 바꿔먹을 생각은 감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언용운은 개망나니답게 그딴 생각을 해냈고, 또 실천에 옮겼다.
…부지런한 등신 새끼 같으니.
“…와 근데. 이 집 오리 잘하네.”
살이 아주 쫀득쫀득하고 잡내가 하나도 안 나는 것 같다.
아닌가?
그냥 내가 무림 체질인 건가?”
아무튼.
언용운은 그렇게 가문의 비급을 담보로 잡아 도박판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또 꼴았다.
하지만 이번에 잃은 것은 너무도 컸다.
‘개망나니 언용운이도 엿 됐음을 깨닫고. 물리적으로 비전을 돌려받으려는 시도할 만큼.’
하지만, 작정하고 설계를 들어온 놈들이 호위 무사를 허투루 데려왔을 리가 있나.
고작 일류 언저리에 불과한 언가 놈의 내공과 언가권의 성취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언용운은 진주언가의 이름을 진흙에 처박고, 비전을 잃었으며, 본인은 죽도록 처맞아 생사를 헤매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빙의되기 전까지 언용운의 구구절절한 행적.’
이후에는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동생과 가문에 억하심정을 가지고 흑화한다.
‘아니, 근데 이 새끼한테 흑화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나? 원래부터 싹이 노랗고 속은 시커먼 놈이었는데?’
뭐, 아무튼.
시간상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이 년 후쯤, 원작 소설 이 권의 대미를 장식하는 악역으로 언용운은 작중에 등장한다.
‘마교와 손을 잡은 마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동생인 언용명의 손에 죽는다.
‘깝깝하네.’
뭐, 미래의 일이야 내가 언용운의 몸을 차지하며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라 쳐도.
이미 이 몸의 원주인 새끼가 쌓아 놓은 업보 스택이 어마어마했다.
‘어쩐지, 운신이 가능해졌을 때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어머니 되시는 이화 부인 말고는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싶더라….’
아침마다 달리기도 해보고. 세가의 무사들이 훈련하는 곳에 가서 따라도 해보고.
진짜 별짓 다 했는데도 반응들이 시큰둥하더라니, 지난 행적을 조사해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내가 언가의 가주인 언정웅이었으면 진즉에 근골 끊고 단전 폐한 다음 이름 모를 굴 하나 찾아서 처박았다 진짜.’
그런고로 내가 익히 읽어온 이른바 ‘망나니물’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내가 처한 상황이 좀 많이 달랐다.
다른 망나니들은 대충 연무장에서 살을 빼려는 시도만 해도 주위의 시선이 바뀌던데, 내 경우엔 그런 식으로 인식을 바꾸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 아싸리 그냥 내쫓기면 어떨까?”
나는 가만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법보다 칼과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이 시대에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자가 가문에서 내쫓긴다는 것은 보통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보통이 아니잖아.’
가문에서 내쫓기는 거?
생각해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좋아.”
진주언가에 묶여 있으면 묶여 있는 대로 얻어 낼 게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쫓겨난다면?
원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어떤 기연’을 선점하기에 편할 것이다.
물론, 가문의 비호가 사라진다면 하북 일대의 빚쟁이들과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래저래 원한을 산 사람들이 불을 발견한 나방처럼 죽자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또한 두렵지는 않았다.
“내 한 몸 지킬 재주는 있으니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뼈만 남은 오리고기.
나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오리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마지막으로 쫍쫍 빨아냈다.
그리고 내가 언가에서 쫓겨나는 순간부터 꼬여들 날파리들을 떠올리며.
수북이 모인 오리 뼈 위에 손을 올렸다.
“일어나라.”
그러자, 접시 위에 고이 추려놓았던 오리의 뼈가 내 해골지배술에 반응해 달그닥거리며 뼈를 맞추기 시작하더니.
삐각-
삐가각-
이내 곧 조립을 끝낸 오리 해골이 살점 하나 남지 않은 날개를 퍼덕이며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