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8화 (8/444)

제8화. 우리의 기연을 찾아서 (1)

태호(太湖).

강호(江湖)의 어원이 되는 동정호(洞庭湖)와 함께 무협지를 펼쳤다하면 어지간하면 한 번은 언급되는 호수이자 파양호와 동정호에 이어 중원 천하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담수호.

“크긴 크네.”

소금기가 없고 지리적으로다가 물이 괴여 있어 호수라 불리고 있다 뿐이지, 육안으론 그야말로 바다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표면적이 서울의 네 배쯤 된다나?

아, 얼마나 큰지 호수 안에 섬도 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칠십 개쯤.

“밝기도 밝고.”

소주(蘇州), 무석(無錫), 상주(常州), 호주(湖州).

여기 애들 말로 어미지향(鱼米之乡), 그러니까 끼니마다 쌀밥에 물고기 반찬 챙겨 먹는다는 굵직굵직한 강남의 도시들에 둘러싸여 있어 남직예의 빛나는 구슬이라 부를 정도로 이름난 명승지라 그런가?

해가 완전히 저문 지금도 호숫가에 세워져 있는 으리으리한 누각들이 뿜어내는 빛이 화려하고, 저마다 등롱을 매달고 태호를 누비는 크고 작은 유람선들이 뿜어내는 빛이 은은하니, 거짓말 좀 보태서 대낮처럼 환한 것 같았다.

“불야성(不夜城)이라는 말을 무협지 속에 들어와서 떠올릴 줄은 몰랐는데.”

그 풍광을 한눈에 담으며 나는 씨익 웃었다.

‘여기에 아직 누구도 찾지 못한 초대 천마의 무덤이 잠들어 있다.’

초대 천마 위철진.

흠. 아니다.

초대 천마라는 단어보다 추존 천마라는 말이 정확하려나?

‘위철진이 천마신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니까.’

작중의 인물들이 초대 천마 초대 천마 거려서 내 사고 속에서도 그 말이 굳어졌는데.

엄밀히 따지면 ‘무림학관 속 검술천재’ 속 천마신교, 그러니까 마교의 창시자는 혁련금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초대 천마는 사실 저 혁련금이라는 사람 쪽이다.

‘위철진은 그 혁련금의 사부 격인 인물로, 후에 천마신교에서 마선으로 추존한 양반.’

그러니까 기준을 빡세게 잡으면 추존 천마라는 말이 맞겠지.

근데 추존이든 초대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위철진이 남긴 무공과 연단의 정수가 이 태호에 잠들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나는 태호변과 좀 떨어진 곳에서 붉은 등을 내걸고 있는 기루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며 가만히 원작을 되새겨 보았다.

* * *

『본래라면 정무학관의 생도들과 소림의 제자들이 치열하게 땀과 합을 나누고 있어야 할 숭산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인들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 소림의 장경각에 침입한 대사건으로 인하여 추존 천마 위철진의 이름이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온 판국이었으니까.

그만한 사건이 터졌는데 팔자 좋게 정무학관과 소림의 부속 무관이 팔자 좋게 정기 교류전을 개최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교류전은 중단되었고, 무림맹주를 비롯한 무림맹의 수뇌부와 소림의 방장, 정무학관의 총장이 소림에 모여 긴급히 향후 대책을 논했는데, 그 논의의 결론은 사건을 덮자는 것이어서 정무학관의 생도회에도 함구령과 함께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권고가 내려왔다.

하나 그런 명령은 으레 젊은 후기지수들의 의기와 호기심을 더욱 부추기곤 하는 법.

“정현 도장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옛 성현들께서는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 이르셨지만, 이 건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라도 더 알아보고 싶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 친우인 용명의 형님 사건도 있었고, 또 정도를 걷는 자가 어찌 마교의 이름을 마주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좋아 나도 끝까지 간다! 여기까지 와서 교수님네들이 접으란다고 접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지!”

“함께해 주시렵니까 팽 소협? 제갈 소저와 은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수님들 모르게 무언가를 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정현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저도 함께하겠어요.”

그렇게 후기지수들의 뜻이 오랜만에 일치단결했고, 그 결과 그네들은 한 줄의 단서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진짜 태호의 무인도를 찾아라.]

꽤나 직관적인 한 줄의 단서.

하지만 이 단서는 직관적이었기에 오히려 수수께끼였다.

“태호는 거대한 호수라 칠십 개가 넘는 섬이 있다던데, 그중에 한 곳에 있다는 건가?”

“태호 안에 섬이 아무리 많아도 위철진의 무덤은 마인들이 백 년도 넘게 찾아 헤매고 있는 곳인데 태호의 섬들은 이미 옛날 옛적에 모두 다 뒤져봤지 않을까요?”』

“한문(漢文)이라는 게 주석을 구체적으로 달아놓지 않으면 해석이 엉망으로 되는 경우가 자주 있지.”

원작 속의 마교도 위철진의 무덤을 가리키는 그 짧은 단서를 풀어내지 못해서 백여 년간 청해호, 동정호 북해 등등 중원 인근의 크다 싶은 호수 안에 존재하는 섬들을 다 훑었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해서 진짜 태호라는 말이 실은 중원과 조선 사이에 마치 호수처럼 끼어 있는 바다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란 생각으로 황해까지 뒤져본 것으로 나온다.

‘그러고도 못 찾아서 무림의 온갖 비서와 역사를 기록한 장서들을 보유하고 있는 소림의 장경각을 턴 게 위철진의 무덤을 찾는 에피소드의 시작이었고.’

하지만 원작 속의 주인공 세대엔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나 소무후(小武侯)라 불려온 제갈가의 적녀(嫡女)와 남직예의 사정에 정통한 천금매소 은하연이 있었기에, 그 한 줄의 수수께끼는 풀려지고야 만다.

‘진짜라는 말이 수식하는 단어가 태호가 아니라 무인도였지.’

[태호의 진짜 무인도를 찾아라.]

여기서 ‘진짜’ 무인도는 일종의 은유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태호의 빈민가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늙고 병든 은퇴 기녀들이 살아가는 퇴기촌이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내가 그렇게 원작을 되짚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때.

호화루(湖花樓)란 현판이 달린 기루의 문전에서 화려한 나삼(羅衫)을 걸치고 걸어나온 기녀가 내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공자님! 소녀는 춘앵이라 하옵니다! 저희 기루에서 묵어가세요! 본루는 요리면 요리, 꽃이면 꽃, 악공이면 악공, 고객님이 찾으시는 것은 무엇이든 대령해 드리옵고, 달나라든 별나라든 어디든지 데려다 드린답니다!”

원작 소설에는 정현과 기타 등등이 퇴기촌으로 향했다고만 돼 있지 그곳의 정확한 좌표가 세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 퇴기촌에 가서도 위철진이 잠든 곳을 알고 있는 노파를 따로 찾아야 했다.

하여, 퇴기촌에 가려면 기녀 출신 현지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 만났다.

나는 내 소매를 끄는 기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낸 뒤 입을 열었다.

“어디든 데려다주겠다는 그 말 반드시 지키시오.”

* * *

어디든 데려다주겠다는 말이 실재하는 장소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아니었는지, 내 소매를 잡아끌던 기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들어찬다.

“예?”

하지만 본래 무협지 세상 속의 기녀나 점소이 같은 직군들은 유도리가 상당히 많은 직군이다.

‘하오문이란 정보 조직의 말단 역할도 수행하는 사람들이니까.’

그 말인즉.

적당한 이유와 적절한 금액만 지불하면 그들의 사전에 불가는 없다는 말씀.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은자가 든 주머니를 달그락거리며 미리 준비해온 사정을 입에 담았다.

“가야 할 곳이 있는데, 타지에서 와서 그곳이 다 그곳 같아 보이오.”

“태호가 좀 그런 구석이 있죠.”

“해서 소저를 안내역으로 좀 쓰고 싶은데, 거두절미하고 얼마면 되겠소?”

그러자 기녀의 시선이 일순 내 허리춤의 은자 주머니로 향하며 입이 열렸다.

“흐음. 글쎄요? 어디를 가시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리 먼 곳은 아니오. 여기서 일각쯤 되는 거리라고 알고 있소.”

“가는데 일각이면 오며 가며 한 식경 정도겠네요? 이상한 곳이나 제게 허튼수작을 부리고 계시는 것은 아니죠?”

“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소저는 돌아가면 그만 아닌가?”

그렇게 형식적인 탐색전이 끝나자, 저쪽에서 훅하고 선제시가 들어왔다.

“그건 그렇네요? 그럼 저도 거두절미하고 값을 부를게요. 은자 열 냥. 열 냥만 주면 어디든 데려다드릴게요.”

열 냥?

열 냐아아앙?

아니 이 누님이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아시나?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타지에서 왔지만, 강남 물가는 이미 빠삭하니 호구 취급 마시오. 열 냥은 너무 많소. 넉 냥으로 합시다.”

“길 안내를 하는 동안 본루의 제일화인 제가 호객을 못 하잖아요. 조금 깎아 드린대도 여덟 냥은 받아야 해요.”

“나는 꼭 소저가 아니라도 되는데? 제삼화든 제사화든 아싸리 루에서 일하는 자를 붙여주어도 되고. 그러니까 넉 냥.”

“제가 낚은 손님을 걔들한테 왜 양보하나요? 여섯 냥. 아, 이 이상은 절대로 안 돼요!”

“그건 소저의 사정이지, 여기 널린 게 태호 사람인데, 소저가 싫다면 다른 사람을 찾겠소. 그러니까 넉 냥!”

“다, 다섯 냥?!”

“넉. 냥.”

“…으으. 좋아요 넉 냥!”

“오케이! 쎼쎼!! 넉 냥!!!”

“오개이?”

“그런 말이 있소. 색목인들이 쓰는 좋다는 말이요.”

“쳇. 알았어요 오개이 하자구요. 그래서 어디를 가고 싶으신데요? 여기서 일각 정도 걸리는 곳 중에 명승지는 태호밖에 없는데? 근데 공자님은 그쪽 방향에서 온 거 아닌가요?”

“맞소. 내가 데려달라 할 곳은 태호가 아니라 퇴기촌이오.”

그때였다.

내 입에서 나온 퇴기촌 소리에 기녀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거긴 왜요?”

뭐, 저런 반응이 무리는 아니었다.

퇴기촌이란 기녀들에게도 아픈 손가락 혹은 직면하고 싶지 않은 저쪽 업계의 그림자 같은 것일 테니.

‘답을 잘해야 한다.’

대답을 잘못하면 체결해 놓은 넉 냥짜리 구두 협약이 파기될 조짐이 보인다.

그치만 저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고 예상해 뒀기에, 나는 무리 없이 바로 답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이래 봬도 살던 동네에서 알아주는 풍류공자였소.”

“그래 보이셔요.”

“?”

“기녀들이 오라비 오라비 하며 따를 것 같이 생기셔서는, 이런 으슬으슬한 옷차림에도 현혹되지 않으시고 넉 냥 넉 냥 거리시는 게, 풍류에 이골이 나신 것으로 보이셔요.”

“…놈팡이 같다는 욕이요? 잘생겼다는 칭찬이오?”

“그건 알아서 판단하시고. 그래서요? 공자님이 풍류공자이신 거랑 퇴기촌에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으신데요?”

나는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머릿속에 미리 짜놓은 설정을 입에 올렸다.

“아. 내가 친하게 지냈던 기녀가 한 명 있는데, 그녀의 어미가 태호의 퇴기촌에 있다 하였소, 모셔 오는 것을 도와줄까 했더니, 장강과 황하를 넘을 몸은 아니실 거라는 것이 아니겠소?”

“…퇴기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죠.”

그리고 은하연에게 받은 뒤에 조금 덜어 가슴팍에 지니고 있던 앵속 그러니까 건조한 양귀비꽃의 과각을 빻은 것을 내보였다.

“하여, 고통을 덜어 드린다는 약재라도 좀 전해드릴까 해서 찾은 것이오.”

그러자 저쪽에서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오늘 일진 진짜 이상하네.’ 소리가 나왔다.

하여 내가 ‘협상 결렬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때.

자칭 호화루 제일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기녀라는 분 참 좋은 친구를 뒀네요. 부럽네.”

“안내해 주겠다는 거요?”

“예. 뭐. 알겠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여기 넉 냥이오.”

“돈은 됐어요. 거기 있는 언니들 중 누구도 저희들에겐 남이 아닌데, 그런 이유로 오신 거라면 제가 돈을 받을 수가 없죠.”

오.

돈이 굳었다.

물론 인연이 있다는 기녀는 가상의 인물이라 속이 아주 살짝 뜨끔하긴 했지만.

이 몸의 원주인 놈이 하북에 쌓아놓은 외상 장부들만 해도 얼만데, 친한 기녀 하나 없으려고? 그러니 영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이다.

거기다 퇴기촌의 기녀들에게 약재를 주려고 온 것만큼은 사실이니, 나는 은자 넉 냥이 굳은 상황을 축하하며 떳떳하게 어떤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운이 좋군.’

그런데 이때.

춘앵이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왔다.

“저기 공자님?”

“?”

“뭉뚱그려 퇴기촌이라 부르긴 합니다만. 거기 사는 사람이 족히 수백은 넘거든요?”

“한데?”

“공자님께선 그중에서 인연을 맺은 기녀의 어머니를 찾을 뾰족한 수가 있으신가 해서요.”

그야 당연히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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