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어르신 저랑 일 하나 합시다 (1)
“예상대로군.”
진법 안으로 진입하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였다.
그리고 곧 차가운 기운과 뜨거운 기운이 나를 감싸는가 싶더니, 이어서 오색구름이 나를 샅샅이 훑어대기 시작했다.
“요놈들이 이른바 음양과 오행의 기운이라는 녀석들이겠지?”
무협지에 진법이라는 녀석이 나왔다 하면 그 진법의 근간은 백이면 백 이 음양과 오행이라는 녀석들인데.
이 녀석들을 중심으로 팔괘니 칠십이괘니 하는 원리들이 접목되면 복잡하고도 오묘한 미궁이 펼쳐지게 되는데, 이곳에 깔려 있는 진법은 특히나 지독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유형의 진법인 데다 사실상 파훼법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보통의 진법이라면 핵을 파괴하거나 진법 속에서 흐르고 있는 순리를 크게 어지럽히면 파훼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묘실에 깔려 있는 진법은 그 핵이 위철진의 사념 그 자체였기에, 사실상 파훼법 또한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바람에 원작 속 주인공인 정현과 우리 용명이 녀석이 쎄가 빠지게 고생을 하지.”
아니 근데 나도 모르는 새 용명이 쪽에는 우리 소리가 붙었네?
“짜식이 참 마음 씀씀이가 따듯하기는 했어.”
지낸 날로 치면 언가에서 보낸 나날이 며칠 되지도 않지만, 아주 약간은 그리운 마음이 든다.
“가족이란 걸 처음 가져봐서 그런가?”
뭐, 아무튼.
이곳에 깔린 진법은 사실 참으로 지독한 진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점심이죠.”
예상대로 내 정신 면역은 이곳에서도 통했고, 그 결과 내가 이처럼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진법의 묘리는 자신들의 통제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지 못했다.
음양의 기운이니, 오행을 담당하는 구름이니 하는 것들에게 감정이 있을 리 없는데도 당황한 것처럼 보일 정도.
그 모습이 퍽 우스워서 나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말을 뱉어냈다.
“니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그만 간지럽히고 니들 만들어 주신 아버님 모시고 와라.”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천마입니더!
내가 던진 그 한마디가 영향을 끼친 것일까?
일순 사위가 급격하게 어그러지더니 삽시간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
우선적으로 멀리서부터 어둠이 서서히 걷혀나갔고, 그렇게 어둠이 걷힌 자리엔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산세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시각각 바뀌는 풍광을 넉을 놓고 바라보기도 잠시.
어느 순간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눈 덮인 산들이 병풍처럼 수 놓인 어느 산봉우리의 중턱 즈음에 자리한 연무장 위에 서 있게 됐는데.
원작 소설을 읽으며 글로 접해본 풍광을 직접 보는 감탄하고 있는 이 순간.
“하. 아버님을 모시고 오라고?! 요즘 것들은 강호에 나올 때 버르장머리를 갖추지 못한 채 나오는 모양이로구나? 오냐 나왔느니라! 내가 이 진법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 풍광의 한가운데에서 뒷짐을 지고 선 백발의 사내, 한 자루 검으로 천하 무림을 벌벌 떨게 만들고 그로 말미암아 강호인들의 뇌리에 마(魔)라는 개념을 아로새긴 위철진.
생전에는 검마라 불리우며 만인의 경계를 샀고, 추후에는 마선으로 추존되어 마인들의 정신적 뿌리가 된 사내가 나를 향해 역정을 내고 있었다.
* * *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은 노괴의 역정.
어쭙잖은 심지를 가진 범부였다면 오금이 저려 꼼짝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웃음이 나왔다.
“하하.”
“웃어?”
한층 삐뚜름해진 위철진의 눈썹.
하지만 나로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작이 좋아.’
원작의 주인공인 정현은 진법을 정공법으로 돌파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채 위철진을 마주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저 양반의 환심을 살 수 있었고 무공의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럼 나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정신 면역 특성 때문에 진법을 너무도 쉬이 깨버렸다.
하여 진법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위철진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그렇다면 호기심이라도 이끌어내야 했는데, 역정이라는 것은 추후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호기심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웃기기도 하고.’
위철진이라는 위인이 버르장머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재밌지 않은가?
거듭 말하지만 무림인에게 적용되는 마(魔)라는 개념은 저 양반에게서 비롯되었고, 마교라는 것도 위철진의 사후에 그의 무공을 이은 제자 혁련금에 의해 태동되었다.
한데 재밌는 건 최초의 위철진은 정파인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이다.
‘시전하는 검식은 정갈했고, 사용하는 내력은 정순했으며, 그가 강호에 출두하여 가장 처음 한 일은 장강 이남에서 기승을 부르던 수로채들을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후에 소림도 똑같이 들쑤셔 주었고, 기타 여러 문파들도 비슷하게 두들겨 주셨다.
그에 정사를 막론한 무림의 명숙들이 항의를 해오자 그네들 또한 골고루 두들겨 주었고.
이해할 수 없는 강함과 예측할 수 없는 행보에 강호인들은 마라는 개념을 떠올리기에 이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버르장머리 같은 걸 논하셔선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세계관의 고금을 통틀어 가장 마음 가는 대로 살았던 양반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물론 저 어르신한테 이것저것 얻어내야 하는 내가 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할 수는 없다.
나는 한층 더 삐뚜름해진 위철진의 눈썹을 응시하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불쾌하셨다면 송구합니다. 흠모해 마지않던 검마 어르신을 실제로 마주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갑자기 입에 기름칠이라도 하였느냐? 남의 진법을 어지럽힐 때는 언제고 잘도 어르신 소리를 하는구나?”
내 말에 코웃음을 치는 위철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말을 이었다.
“그거야 어르신을 빨리 뵙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사실 어르신께서도 고루하게 예의나 범절을 따지는 사람보다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아닙니까?”
내가 틀렸을 리가 없다.
원작에서의 위철진이 그러했으니까,
본인부터가 말을 빙빙 돌려 하지 않았고, 따지고 보면 무의 끝에 닿기 위한 방식이 전혀 다른 정현에게 자신의 심득을 나누어 주기도 했으니까.
“허. 네놈은 꼭 나를 잘 아는 듯이 말을 하는구나?”
“잘 알지요.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자부합니다.”
위철진과 동시대를 보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지금 누가 있어 원작을 읽은 나보다 위철진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위철진은 이런 내 사정을 모른다.
하여 그는 바로 나를 향해 ‘꾸짖을 갈!’ 소리를 내질러 왔다.
“갈! 말도 안 되는 소리!!”
무협지를 읽으며 숱하게 접해본 ‘갈’의 현장.
글로 접할 때는 ‘갈이 뭐냐 갈이.’ 같은 생각을 했었지만, 실제로 당해보니 제법 박력이 전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 박력에 굴하지 않고 위철진을 향해 침착하게 되물음을 던졌다.
“왜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시는지요?”
“내가 이곳에 머문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바깥세상의 시간으론 어디 보자….”
“백 년 좀 넘으셨습니다.”
“…그래. 그만한 세월이 흘렀으면, 제 조상도 알아보기가 힘들거늘, 네놈이 어찌 감히 나를 안다 하느냐?”
“그러니까요.”
“뭐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보라는 듯한 위철진의 눈빛.
나는 가볍게 호흡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검마 어르신의 말대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를 보통 삼십 년으로 잡으니, 세대가 벌써 셋이나 지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제 백여 년 전 검마 어르신께서 정파의 거목들과 벌인 곤륜논검에 대해 기억도 하지 못하거니와….”
그리고 아주 잠시 뜸을 들였다.
“……?”
“…….”
그러자 저쪽에서 반응이 바로 왔다.
“왜, 말을 하다 마는 것이냐?”
“다음에 나올 말이 어르신께 조금 불쾌하게 들릴 말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적절한 말을 고민하느라 잠시 말을 고르는 중입니다.”
“흥, 네놈이 말했듯이 나는 고루한 예의니 범절이니 하는 것은 질색이다.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지껄여 보거라.”
“예. 그럼.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사실 곤륜논검에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그저 전인(前人)들이 남긴 몇 줄의 글줄로, 정파에선 사대천(四大天)이 이겼다 하고, 마교에선 검마 어르신이 이겼다고 할 뿐이거든요.”
“하! 그놈들이 이겼다고 떠들고 다닌다고?”
음.
사실 나도 무림 생활을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실제로 확인을 해보지는 않았지.
근데 그러고 다니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가선 당시 정파의 네 하늘이라 불리던 사람 중 신기군사(神棋軍師)를 제외한 나머지 삼대천이 삼 대 일로 검마에게 덤볐다가 양패구상을 당했으니, 사실상 정파 무림이 패배했다는 게 진실인데.’
상식적으로 각각 무극검제(無極劍帝), 매화검제(梅花劍帝), 단천도제(斷川刀帝)라 부르며 떠받드는 분들의 영전에 후인들이 다구리를 놨다가 사실상 패했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겠지.
‘남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게 하지도 않았을 거고.’
어쨌거나 곤륜논검 이후로 지금까지 쭉 정도 무림맹의 천하가 이어져 왔으니까.
뭐, 아무튼.
내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위철진의 질문이 연이어 이어졌다.
“그리고 마교는 또 무엇이냐? 그놈들은 뭔데 감히 내가 이겼다고 말하고 다니느냐?!”
아무튼 물어보시는 것에 대한 답은 드려야겠지.
“아, 마교를 말씀드릴 것 같으면 어르신의 후인을 자처하는 무리라고 보면 될 겁니다. 어르신의 제자 되시는 분이 창시한 집단이거든요.”
“제자? 나는 그런 것을 키운 기억이 없는데?”
“……?”
“?”
“???”
“?”
어.
이런 설정이 있었나?
위철진 에피소드가 철저하게 무림학관의 검술천재의 주인공인 정현의 시점으로 전개되었기에 세세한 사정까지는 나오지 않았는데, 검마 위철진이 천마신교의 창시자인 혁련금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음. 혁련 금이라는 이름을 기억지 못하십니까?”
“아! 아아! 련금이?!”
…려, 련금이?
혁련이 성 아냐?
“고놈이 빠릿빠릿하게 청소랑 밥도 잘하고 눈치도 빨라서 부리기가 참 좋았는데, 무슨 절맥인지 뭔지 기혈이 막힌 채 태어나서 골골거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내 심법을 조금 알려주긴 했지. 그놈이 개파를 했다고?”
“자기들끼리는 천마신교라 부르는 일종의 종교니까 정확히는 창시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의미는 맞습니다.”
“천마신교라. 하면 련금이 녀석이 스스로를 천마라 칭했다는 건데, 하하하. 그놈 그거 출세했구만.”
“하. 하하하.”
위철진 심중의 초대 천마 취급이 상당히 안습해서 내가 마교도가 아닌데도 가슴 한편이 짠해 왔다.
하지만 가슴이 짠해 오는 것과는 별개로 잘 찾아왔다는 확신이 다시 한번 들었다.
‘고작 심법을 얻어 배운 정도로 도동이나 시종 즈음에 불과했던 혁련금이 무림을 삼분할 세력을 만들 수 있는 강함을 얻었다는 거잖아?!’
물론, 혁련금 본인의 무재와 오성이 받쳐 주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내가 보기엔 언용운이의 몸뚱이도 그에 못지않아.’
원주인이 엉망진창으로 굴려서 그렇지 운동 조금 했다고 눈에 띄게 붙는 근육도 그렇고, 내가 심법에 문외한이라 내력을 사령왕이라 불리던 시절처럼 운용하는데도 감응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계획대로 저 어르신이 내 스승이 되어주기만 한다면 이곳을 찾으며 짐작한 기연의 가치가 최소한 열 배 아니 백배 천배 커지리라.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르신 저랑 일 하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