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어르신 저랑 일 하나 합시다 (2)
“그래서 말인데, 어르신 저랑 일 하나 합시다.”
“그래서 말인데는 뭐가 그래서 말인데란 말이냐? 말하는 본새를 보니 그 일 하나 하자는 말은 결국 무공 한 자락 가르쳐 달라는 말 같은데?”
“아닌데요?”
사람을 뭐로 보시고.
고작 한 자락이라뇨.
“저는 고작 한 자락 무공에 만족할 그릇 작은 녀석이 아닙니다.”
“……?”
“저는 어르신의 파천칠검 전부를 원합니다.”
파천칠검(破天七劍).
하늘도 깰 수 있다는 광오한 자신감이 이름에서부터 묻어나는 검마 위철진의 비전.
남자가 위철진의 무덤을 찾았으면 그쯤은 탐을 내야지!
“하하하.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보는구나. 제놈 스스로 그릇을 운운하는 것으로 모자라 파천칠검 전부를 원한다?”
그런 내 음성에, 위철진은 대소를 터트렸다.
한데 그 모습이 딱히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즉시 가지런히 무릎을 꿇어앉으며 말을 이었다.
“예. 어르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위철진은 그런 내 주장을 콧방귀로 맞았다.
“하. 네놈이 스스로 한 말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왜 이야기가 그리로 튀느냐? 네놈이 어찌 나를 안다 자부하느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았더냐?”
“우선적으로 검마 어르신의 후인을 자처하는 이들보다도 제가 어르신을 먼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것만 해도 천하에서 제가 어르신께 가장 진심이라는 방증이죠.”
“흥. 소가 뒷걸음을 치다 쥐를 잡는 경우도 있으니 방증이 되기엔 충분치 않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당황치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뭐, 차근차근 읊어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태어나, 기억나고 처음 맞은 기근에 입을 줄이려던 부모에 의해 버려지셨고, 이후 천하를 배회하시다 사부 되시는 만박두타 어른을 만나 검을 쥐셨죠. 계속할까요?”
“흥, 어디서 그럴싸한 내 이야기를 겉핥기로 주워듣기라도 한 모양이로구나, 하기야 이곳을 찾아낸 것부터가 내가 련금이 녀석에게 한 번씩 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기인했겠지. 태호의 진짜 섬에서 살았노라 말했으니까.”
“외람되지만 겉핥기니 하는 말씀은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뒤에 하시는 게 어떨까요? 따지고 보면 어르신께 저는 오랜만에 만나시는 말벗이나 다름없는데, 너무 대접이 박하신 것 아닙니까?”
“그놈 말하는 거 하고는. 그래. 어디 계속해 보거라. 네놈의 이야기가 어찌 끝나는지 들어나 보자.”
흐름이 좋다 싶었는데, 어떻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말벗으로 인정받는 데까지 왔다.
다 왔다. 다 왔어.
“그렇게 만박두타 어른께 파천칠검의 원류가 되는 파산검결을 전수받은 검마 어르신께서는 스승의 병수발을 들며 스스로 무리를 깨치셨고 파산검결을 파천칠검으로 발전시키셨습니다.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좋은 거 다 챙겨먹고 좋은 스승 아래서 평생을 무학에만 매진한 검수들도 쉬이 닿지 못한 경지에 이르신 것이지요.”
“흥. 쉬이 닿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나 때만 하더라도 무위로 덤빌만한 놈은 정파 놈들 중에서는 사대천이니 어쩌니 하던 놈들 중에서도 제갈씨를 쓰던 놈 빼고 딱 세 놈. 사파 놈들 중에는 딱 한 놈밖에 없었느니라.”
이거 봐라, 이거 봐.
짐짓 역정이 난 듯 툴툴거리시는 듯하지만,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내 눈엔 보였다.
‘이거 이거. 입으로는 싫다고 하시면서 입꼬리는 솔직하시구만?’
하기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을 칭송하는데 인상을 구길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물며 검마 어르신은 근 백 년 만에 검마-비어천가를 읊는 놈을 보는 것일 테니 입꼬리가 근질거리기는 하시기야 하겠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원작에서 접한 바 있는 위철진의 과거 이야기를 계속해 되짚어 나갔다.
“이후 강호에 나오셔선 정사를 막론하고 고수들과 검을 나눈 끝에 종국에는 홀로 정도 무림의 사대천(四大天)이라 불리던 이들과 겨뤄 사실상 승리를 거두셨지요.”
여기까지는 원작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토대로 위철진의 일대기를 함축한 것.
“세상 사람들은 정사를 막론하고 검을 섞는 어르신의 행보를 이해치 못하고, 강호인들은 마(魔) 자를 떠올리고야 말았지만, 사실 어르신께서는 그저 그어 놓은 선을 넘는 자들을 응징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건 내 해석.
내 해석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내 쪽이 좀 교묘하고 저 어르신 쪽이 좀 투박해서 그렇지, 저 어르신과 내 성격은 닮은 구석이 제법 있었다.
그게 바로 원작 소설 전체 분량으로 따지면 아주 잠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저 어르신이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이유였다.
‘나라면 걸어오는 승부를 무조건 다 받아주기보다는 가려 받아 가면서 팰 놈은 패고 엿을 먹일 놈들은 교묘하게 엿을 먹여 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지.’
뭐, 아무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위철진이 특유의 콧방귀와 함께 입을 열었다.
“흥.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 맞는 말이로구나.”
하지만 그 콧방귀는 조금 전의 것과 달리 완연한 화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 * *
“수적 놈들은 수로채니 어쩌니 하며 관군이라도 된냥 통행세를 받으려 들길래 뒤집어 주었지, 소림은 내 사부와 악연이 있는데 이것까진 네 녀석이 알 것 없겠지. 아무튼 제법 알차게는 주워들었더구나. 하나, 한 가지 정정할 것이 있다.”
“음. 틀린 이야기가 있었습니까?”
“사대천이라 불리던 녀석들의 이야기 중에, 신기군사 녀석과의 내기는 내가 확실히 이기긴 했느니라, 하지만 무극검제, 단천도제, 매화검제 그 셋과 검을 섞었던 일에는 승리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느니라.”
“저쪽이 셋이고 어르신은 혼잔데 양패구상의 결과가 나오면 어르신이 이긴 거 아닌가요?”
“내가 그러라고 하였으니까. 내가 접어주기로 한 이상 그 싸움은 공정한 것이지, 그러니 내 승리라 할 수는 없겠지.”
전생 현생 통틀어 꽤나 많은 강자를 접해온 나인데, 위철진의 음성에선 그 강자 중에서도 격이 남달랐던 존재들과 비스무리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점점 더 맘에 드네 이 영감님.’
한데, 그 자신감 속에는 묘한 아쉬움 같은 것이 묻어났다.
그 아쉬움을 느끼고 나자 주변의 풍광이 새롭게 보였다.
‘여기 설마 곤륜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 순간.
내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왜 위철진이 이런 진법을 만들고 고립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은데?’
시간을 머금을 정도의 마법은 전생의 세계선에서도 최고 등급의 마법이자 시전자가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종류의 것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위철진도 이 진법을 구축할 내력과 정신력이 있었다면 등선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데도 위철진은 이 순간에 남는 것을 택했다.
‘곤륜논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으신 거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곤륜산 아닙니까?”
“그걸 이제 알았느냐?”
“제가 하북에서만 쭉 살아서요. 그래서 그 양반들과 다시 붙는다 치시면 이번에는 접어주고도 확실히 이기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더냐.”
“에이,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진법이 머금은 장소가 하필이면 이곳인 걸 보아하니 지금까지 그날의 싸움을 복기해 오신 것 같은데요?”
“흥. 눈치가 빠른 게 네놈도 꼭 련금이 놈 같긴 하구나.”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초대 천마 혁련금이면 그래도 마교를 일으킨 사람이니까 칭찬이라고 봐야 하겠지?
“이기기야 하겠지, 네놈이 갖고 싶다 하였던 파천칠검이 그사이 파천십검이 되었으니. 하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 녀석들도 진즉에 썩어 흙이 되었을 것이고, 나는 한순간의 아쉬움에 사로잡혀 고립자가 되는 길을 택해 넋만 남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을.”
최초의 곤륜논검을 떠올릴 때보다도 더욱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이거 잘하면 어렵지 않게 사승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데?’
그려지는 아름다운 밝은 미래 내일에 그만 웃음이 새어 나오고야 만다.
“의미가 없긴 왜 없습니까. 무극검제, 단천도제, 매화검제, 신기군사 이런 사람들은 뭐 썩어서 흙이 되었겠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모두 건재하니 그 무학의 통을 이은 녀석들이 있잖습니까?”
그렇게 내가 피식 웃으며 운을 띄우자, 위철진이 눈썹을 찌푸리며 바로 입을 열었다.
“욘석아 내 말을 뭘로 들었느냐?! 그런 놈들이 있으면 뭐 하느냐. 내가 이 진법 밖에선 검을 쥘 수가 없는데.”
“그건 제가 대신 겨루어 드리면 되잖습니까?”
“끌끌끌.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이야기가 돌고 돌아 제자로 삼아달라던 그 말로 다시 이어졌구나?”
“사람은 자고로 초지일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흥.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녀석 같으니. 오냐. 짧은 만남이었으나 즐겁긴 하였으니, 내 무공 한 자락 알려주마. 보아하니 내력이 일천한 게 심법 수련을 등한시한 것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매일 수련하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정말로 다 됐다.
원작의 주인공인 정현은 나와 비슷한 제안을 받았을 때 절을 올려 예를 표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한 걸음을 나아갈 거다.’
뭐든지 처음 마음을 먹기가 어려운 것이다.
일단 무학을 알려주시겠다는 마음을 먹으셨으니, 정말로 딱 한 고지만 더 넘으면 한 자락의 무공이 아니라 검마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난 그 고지를 넘기 위해 위철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
“?”
“잠깐만요. 어르신.”
“또 왜?”
또 왜라니 사람을 무슨 거머리 취급을 하시네.
아무튼 할 이야기는 해야지.
“저는 정식으로 어르신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르신도 무공 한 자락 허락해 주신다는 게 결국 제자로 삼으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으시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한데.”
“그러면 기왕 먹으신 마음 좀 더 크게 먹으셔서 쌓아오신 무학 전반을 다 전수해 주시죠. 파천칠검, 아니 이제 십검이라 명명하신 파천검법 전체를요.”
“허. 이놈이 사승 관계를 무슨 저자에서 흥정하듯 하자고 하는구나.”
“그만큼 어르신의 진전을 잇고 싶어 한다, 그렇게 예쁘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흥이다, 예쁘게 봐주기는 개코를 예쁘게 봐줘?! 그리고 그걸 떠나서 이놈아, 네 녀석이 원흉이니 스스로도 느끼고 있겠지만 네가 들어온 직후 시간을 머금고 있게 만들어둔 내 진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너와 나 사이엔 그럴 만한 시간이 없느니라.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는 걸 모르느냐?! 객기 부리지 말고 심법이라도 줄 때 챙겨서 나가거라.”
“그렇죠, 욕심은 지나치면 보통 화를 부르죠. 근데 그건 욕심만 지나칠 때의 이야기고요. 저는 욕심만 많은 놈이 아닙니다. 제겐 어르신과의 시간을 늘릴 방법이 있습니다.”
“??”
제가 흑마법에 일가견이 좀 있거든요.
빙의 강신 이런 거는 특히나 전문이라 이 말입니다.
하.
원래 세계에서는 이렇게만 말해도 직빵이었는데, 여기선 이렇게 말을 하면 통하는 건 둘째고 못 알아들으시지?
흠.
그럼 여기 식으로다가….
“제가 진법을 헤집어 놓은 것을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좌도방문이나 방술이라 불리는 잡기 쪽으로 일가견이 조금 있거든요? 비유를 하자면 대충 강신 같은 방법으로 어르신을 배후령? 수호령? 그런 걸로 만들어서 제 몸에 넣어 드릴 수 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어르신, 저랑 사승 관계 맺고 일 하나 합시다.”
나는 강해지고.
어르신은 본인의 무공이 사대천의 후인들을 꺾는 걸 보고 성불하시고.
딱이네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