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3화 (13/444)

제13화. 어르신 저랑 일 하나 합시다 (3)

내 제안은 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진법의 붕괴가 내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작의 주인공이 들어왔을 때는 붕괴가 좀 더 느긋했던 것 같은데….’

뭐, 이건 정공법으로 진법의 문을 연 정현과 달리 내 경우는 강제로 문을 연 것과 다름없기 때문일 것이겠지.

아무튼.

절대적인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었고 여기에 검마 어르신은 태도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역정에 호기심을 한 숟갈 정도 얹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내게 확실한 호감을 보여주고 계셨다.

‘그렇다면 검마 어르신의 답을 조금은 재촉을 해도 되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고민을 할 문젭니까? 어지간하면 저랑 같이 가시죠? 솔직히 어르신 입장에서는 밑져야 본전 아니십니까? 밑지지 않는다면 오랜만에 세상 구경도 하시고 나아가 원념이셨던 파천십검이 천하제일임을 증명도 할 수 있고요.”

“…원념이라니? 네놈은 나를 무슨 원귀 취급을 하는구나?”

“원귀가 달리 원귀겠습니까? 못다 이룬 꿈이나 한이 남아 있는 고립자면 원귀죠. 아쉬움의 크기만 따지면 천하에 산재해 있는 숱한 원귀들도 어르신께 비비지 못할걸요?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만드는 원귀도 이만한 진법을 만들지는 못할 테니까요.”

“흥. 좋을 대로 하거라. 나는 분명 한 자락쯤은 알려줄 수 있다 하였는데, 네놈이 욕심을 부린 것이니 그렇게 시간만 까먹다 허탕이 되면 네놈의 손해가 될 뿐이다. 뭐, 욕심을 부리다 허망함을 겪어보는 것도 젊어서는 해봄 직할 터이니.”

“오. 허락하신 겁니다 어르신? 아니, 사부님?”

“…사부. 평생을 들이지 않았던 제자를 이런 식으로 들일 줄이야. 뭐 네놈의 방술이라는 게 통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오.

그럼 내가 검마 어르신의 첫 번째 제자가 되는 건가?

‘허.’

그러고 보니 그러네?!

마교의 창시자인 초대 천마 혁련금도 어르신은 련금이라 부르면서 제자 취급을 안 하시니까?!

‘아니 근데 그렇게 되면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성골 1대 제자가 되고 마교 애들은 진골 잡뼈가 되는 건가?

원작을 되짚어보면 마교 내에선 지들끼리 천마니 혈마니 호교법왕계니 나뉘어서 누가 검마의 무리를 적통으로 계승했는지를 두고 대권 싸움을 했던 것 같은데….

‘상황 한번 웃기게 됐네.’

그때였다.

갑자기 든 생각에 내가 홀로 웃음을 삼키고 있는 이때.

내가 전생에 사령왕 소리를 들었음을 알 리 없는 검마 어르신의 호통이 이어졌다.

“아무튼 사부 소리 하기 전에 그 방술인지 뭔지부터 행해 보거라! 네놈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면 사승이고 나발이고 말짱 꽝 아니더냐?!”

그 소리 덕에 딴생각을 멈춘 나는 손을 뻗어 정신을 집중했다.

“예예. 합니다. 해요.”

이런 류의 진법은 구성 방식은 쉽게 말해 자각몽의 그것과 비슷했다.

꿈을 꾸다 그곳이 꿈속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의지를 뻗어 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듯.

이런 류의 진법도 핵에 닿기만 하면 의지를 뻗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는데,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나왔다.”

“무엇이냐, 그 거겸(巨鎌)은?”

이 거대한 낫은 악몽의 군주와 계약한 자에게 주어지는 소울 웨폰이자, 사령왕이라 불리던 시절에 사용하던 애병(愛兵)인 지옥의 종소리였다.

“아아, 이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

얼마 만이지?

아무튼 시간이 없다.

나는 호기심을 표해오는 검마 어르신을 뒤로하고, 한 줌의 내력을 지옥의 종소리에 담아 허공에 술식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웅-

그렇게 써 내려간 술식들은 이내 진을 이루어 하나의 마법진이 되었다.

우웅-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진들이 늘어가며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차곡차곡 끼워져 나가기 시작했다.

“…흠. 태극은 아닌데?”

그에 따라 검마 어르신의 중얼거림도 함께 늘어갔다.

하나.

“…오행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둘.

그리고 셋.

“…그렇다고 저 녀석이 도에 끝에 다다른 선인도 아닐진대.”

그 중얼거림은 네 번째 마법진이 완성되었을 때엔 질문으로 바뀌었고.

“…내가 만들어 놓은 진법이 정말로 네가 만든 그 해괴한 진법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구나?!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냐?!”

마침내 마지막 다섯 번째 마법진이 앞의 네 마법진과 끼워 맞춰지며 온전한 진이 완성되었고.

내가 만든 마법진이 깔때기가 되어 위철진의 마법을 빨아 내리기 시작했을 땐.

“…네 녀석. 내 제자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뭐? 방술에 조금 일가견이 있어?! 그런 수준이 아니지 않느냐?!”

질문의 방향 자체가 바뀌었다.

참 내.

조금 전만 하더라도 욕심을 부리다 허망함을 겪어보라느니 어쩌니, 하셨으면서.

“그리 대단한 건 아닌데요?”

“대단한 게 아닌데요오? 천 년 넘게 주술만 후벼판 모산파의 말코 놈들도 네놈의 발끝도 못 쫓아가겠는데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방술만으로도 천하에 따를 자가 없겠는데 대체 스승을 왜 찾는 것이야?!”

나야 사실 인생 1회차 땐 이쪽을 정말 끝까지 후벼팠고, 또 이 진법 안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내 특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이라 가능한 것이니, 진심으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그러니까. 천하에서 사부님께 가장 진심인 사람이 저인 거죠.”

“어찌 이야기가 또 그리로 튀느냐?!”

“보시다시피 제가 그래도 한 몸 건사할 재주가 분명히 있습니다. 언급하신 대로 모산파 같은 곳에 가면 ‘입관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하고 대문짝만한 걸개를 내걸어 주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도 사부님을 모시러 왔지 않습니까. 하하.”

이렇게 말하는 게 사부님 귀에는 더 달게 들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반쯤은 넉살을 섞은 말이었다.

“…흥! 배사지례(拜師之禮)도 올리지 않은 녀석이 그놈의 사부 소리는 잘도 나오는구나.”

한데, 검마 어르신의 반응이 조금 진했다.

대저 배사지례라 하면 무학(武學)을 계승하는 연을 맺는 무림의 예법을 말한다.

‘다 됐네.’

조금 전만 해도 떨떠름한 느낌으로 휩쓸리듯 사승 관계를 맺기로 된 모양새였는데, 어느새 검마 어르신 본인 입에서 배사지례가 나오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에 정말로 무학을 계승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언용운의 몸은 확실히 무재가 있었다.

거기에 검마 어르신도 검마라는 별호를 노름으로 딴 위인이 아니시고 자신이 통제하는 진법 안이기까지 했으니, 육신의 자질은 충분히 가늠하고 저런 소리를 하셨겠지.

‘그렇다면 무골 자체는 자타공인 인정을 받은 것이고.’

남은 것은 이해력과 노력인데.

나는 둘 모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던데, 결이 다르긴 해도 나는 흑마법의 끝에 닿아 봤으니까.

뭐, 아무튼.

생각은 여기까지.

나는 배사지례를 행하기 위해 격식에 맞추어 공수를 하고 입을 열었다.

“하북 진주언가의 용운이 파천검문의 제자가 되고자 정식으로 인사 올립니다.”

* * *

구파니 일방이니 하는 대문파였다면 떠들썩하게 잔치가 열리고 N대 제자들이 속속들이 모인 앞에서 흥청거리는 배사지례가 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부로 내 사문이 된 파천검문은 사념체가 된 사부 한 명에 오늘부로 제자 한 명의 구색을 간신히 갖춘 조촐한 문파인데다, 사부님도 나도 허례허식은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며, 거기에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나와 사부님의 배사지례는 그렇게 약식으로 끝을 맺었고.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이냐 제자야?”

줄곧 이놈 저놈 하시다 배사지례를 올리고 나서야 나를 지칭하는 호칭을 바꾸신 사부님이 눈에 띄게 배경이 허물어져 가는 진법의 중앙에서 입을 여셨다.

“음. 슬슬 다 되어가네요. 제가 구축한 술식은 일종의 깔때기입니다.”

“깔때기?”

“예. 사부님께서 만드신 진법을 흘리지 않고 제 영혼 속에 부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허. 그래서 내 진법이 네 술식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던 게로구나.”

“옙.”

“그렇게 되면 내가 이 진법 안에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렷다?”

“예, 생전이라고 표현해도 기분이 안 나쁘실지 모르겠는데, 편의상 생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상관없다.”

“예. 그럼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전히 생전처럼 사지육신을 가지고 그러실 수는 없으시겠지만, 저를 통해 보고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흠. 내가 네게 일종의 빙의가 되는 것이로구나?”

“예, 뭐 비슷합니다. 조금 전에도 살짝 말씀드렸지만, 제 영혼이 좀 특수해서 사부님이 제 몸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실 테니, 사지육신을 움직이는 재미는 없으실 겁니다.”

“…흐음.”

“하지만 보고 느끼는 건 가능하죠. 제가 먹고 마시면 사부님께서도 느끼실 수 있으실 테니, 궁금하신 거나 보고 싶은 게 있으시면 제가 열심히 걷고, 잡수고 싶은 게 계시면 제가 열심히 먹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리 달린 건 책상 말고는 다 먹을 줄 알거든요?”

“원, 녀석 넉살은.”

“아, 회만 빼고요.”

“?”

무림에서 회라 하면 전부 다 민물고기 회다.

기생충 약도 없는 시대에 그런 거 먹으면 지집니다. 지지.

“그럼 그냥 이렇게 있으면 되는 것이더냐?”

“아뇨. 뭐니 뭐니 해도 이 진법의 가장 무거운 핵은 사부님 아니시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

“일단 사부님께서 만들어 놓은 진법의 테두리는 거의 다 흡수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제가 먼저 진법 밖으로 나간 뒤에 사부님의 혼을 끌어당길 건데, 묘리를 설명해 드리기엔 시간이 좀 부족하네요. 아무튼 사부님은 그저 저한테 혼을 오롯이 맡기시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오냐. 그리하마.”

“……?”

“왜???”

“근데 혼을 너무 쉽게 맡기시는 것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저희 오늘 처음 본 사인데요?

“제자가 드려도 되는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너무 쉽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사부님….”

“…언제는 밑져야 본전이라더니?!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깔때긴지 깔판인지 하는 네놈의 술식이나 어떻게 잘 운용해 보거라!”

참 내.

아까는 모산파 말코 놈들이 발끝도 못 쫓아온다고 하셔 놓곤 이제는 깔판이라고요?

아무튼 그것으로 사부님의 영혼은 내게 귀속되었고.

“그럼 잠시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사부님.”

나는 이제는 사부님이 되신 검마 어르신께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훠이훠이 손을 내젓는 사부님을 뒤로하고 진법을 빠져나왔다.

“검마의 제자가 됐다.”

애초에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슴속에서 크게 일었다.

하여, 당장에라도 쾌재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곧바로 선계와 인간계의 경계 어디쯤에 계신 사부님의 혼을 내 영혼 안으로 끌어내리고자, 구축해 놓은 술식을 완전하게 발동시키는 시동어를 외쳤다.

“악몽의 군주의 대리인이 계약한 원혼을 찾나니, 원혼은 나의 부름에 응해 내 안에 깃들라!”

그러자 곧 석실 안에 소용돌이가 일며 이곳에 깔려 있던 진법이 압축이 되더니 그 종심이 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딱 내가 예상한 바였다.

한데 이후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

뼈가 시렸다.

뼈마디 곳곳이 당장에라도 얼어 터질 것처럼 시렸고, 그로 인해 사지와 혈맥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젠장. 내가 한 가지를 간과했네.”

지금껏 흑마법도 비교적 자유로이 쓸 수 있고, 몸뚱이도 원주인이 마음대로 굴려서 그렇지 자질이 있다 생각하여 간과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 몸은 원래의 내 몸에 비하면 무재는 뛰어났지만, 사혼의 음기를 받아들일 토대는 보잘것없는 몸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 음기는 지금의 몸으론 못 버티겠는데?!”

이걸 어쩌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그런데 이 순간 내 뇌리에 번뜩하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회한!”

감 총관에게 받은 검 회한은 북의 극지에 있는 북해빙궁을 원산지로 하는 한철을 접어 때려 만든 명검이었다.

‘회한이라면 능히 이 한기를 감당하며 사부님의 혼을 담을 수 있을 거야.’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곧바로 회한을 뽑아 든 뒤 술식의 흐름을 틀었다.

‘사부님께 설명드린 것과는 좀 다르지만, 그 일은 나중에 가서 생각하는 걸로!’

그러자 온몸에 서릿발을 때려대는 듯하던 기운이 슈우욱- 소리와 함께 빗살처럼 회한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나중에 가서 생각하기로 정한 일이 들이닥쳤다.

-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

“…음. 사부님 그게 말이죠. 중화의 왕조도 보통 백 년쯤 지나면 뒤집히고 그러지 않습니까?”

- 그게 이 상황이랑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 검마(劍魔)도 뒤집으면 마검(魔劍)이 되니까요? 아하하. 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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