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어르신 저랑 일 하나 합시다 (4)
- 내가 검이라니!! 내가 검이라니이이이!!!
회한 속에서 눈을 뜬 사부님은 마치 백병원에서 눈을 뜬 심 선생님처럼 울부짖으셨다.
하지만, 당장은 제대로 된 위로나 설명을 드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곧 무너진다 여기.’
그도 그럴 것이.
석실에 깔려 있던 진법이 사라지는 여파만 해도 적지 않은데, 거기다 또 사부님이 내 검에 깃들며 발생한 기운들이 만든 여파가 연이어 발생했다.
그 바람에 앞의 함정과 기관들에서 용케도 성하게 여기까지 함께 도착한 몇 구의 송장들이 가장 먼저 풍압에 희생되어 혼과 백이 흩어졌고.
이제 설립 시기 측정 불가인 오래된 연식의 고분마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원작에서는 무덤이 무너지지는 않아서 이 안으로 마교의 마인들이 침입하면서 바로 다음 이야기가 진행됐었는데.’
음, 가만.
내가 이제 검마의 직계 제자가 되었으니, 마인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잡뼈들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뭐,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여기가 지금 무너질 것 같습니다. 일단 검 속에 들어가게 되셨다는 것만 아시고, 자세한 설명은 조금 있다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렇게 입을 연 나는 호통을 치시는 사부님을 허리춤의 검집에 얼른 집어넣었다.
- 이놈! 이노오오옴!!
사실 사부님의 호통이 이해는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본 소설 제목도 아니고 ‘천하제일검이었던 내가 진짜 검이 된 건에 대하여.’ 같은 상황이 되셨으니….
근데 뭐 어쩌시겠는가?
사부님은 말 그대로 검이 되셨고 칼자루를 내가 쥐고 있는데?
스릉-
내가 칼집에 넣어 버리면.
착-
이렇게 들어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끙! 오냐 내 잠시 기다려주마! 하지만 제대로 된 설명을 준비해 놓아야 할 것이다! 이 제자 놈아!
아무튼 그렇게 사부님을 갈무리한 나는 가장 안쪽의 석실에서부터 후두둑- 후두둑- 내려앉기 시작하는 고분에서 밖을 향해 길을 되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선 여기를 밟고.”
이곳에 들어올 때와 달리 이런저런 여파로 송장들을 잃는 바람에 나가는 길에는 앞세울 척후들이 없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여기는 단번에 뛰어넘는다.”
들어오면서 고분에 깔린 함정과 기관들의 발동 체계는 머리에 넣어 두었으니까.
하여, 나는 고분 안에 놓인 길을 번개처럼 달려 나갈 수 있었다.
쿠궁!
쿠구구궁!!!
“?!”
물론, 모든 것이 내 예상과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피슝! 피슝!
고분 전체가 붕괴되며 밀려드는 토사의 압력에, 기관과 함정이 뒤틀리며 기억했던 체계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발사되는 녀석들이 이따금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지간하면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움직이기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게다가 기관과 함정들 또한 온전한 상태에서 발사되는 것이 아니어서 위력이 반감되었기에.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지!”
체계를 벗어난 기관과 함정들도 나는 어렵지 않게 대처해낼 수 있었다.
하여, 어느새 나는 역한 바깥 공기가 스미는 고분의 끄트머리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그 끄트머리에 내가 뚫어 놓은 입구를 단거리 육상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하듯 지나치고 나자.
쾅! 꽝!!!
와르르르!!!!!!!
귀신같이 고분 전체가 폭싹 내려앉았고.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멀찍이서 동이 터오는 것이 보였다.
“!”
제법 길었고 나름 험난했던 밤을 끝내고 아침을 몰고 오는 강렬한 붉은 기운을 응시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한마디 말을 토해냈다.
“조금만 더 지체 했어도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근데 결과적으론 어찌어찌 다 잘된 거 아닌가?”
검마 어르신의 제자가 되었고,
고분 전체가 무너지는 와중에 몸 성히 나왔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적(?)이 무너진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고분이 무너진 것 자체도 나로서는 반길 일이었다.
‘혹시 모를 누군가가 이곳을 찾아와 들쑤셔 본다 하더라도 저 모양 저 꼴이 났으니 저기서 내가 다녀갔다는 흔적을 찾지는 못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밝히기 전엔 검마의 유산과 나를 연관 지을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향해 허리춤에서부터 반론이 날아들었다.
- 잘되긴 뭐가 잘되었느냐?! 이제 아까 하기로 한 제대로 된 설명이라는 것을 어디 한번 해 보거라! 대관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 그게 말입니다 사부님?”
그게 그러니까….
- 그래. 그게 말입니다, 가 무슨 말인지 이야기 좀 해 보거라.
“음, 그게 말입니다 사부님.”
- …또 검마를 뒤집으면 마검이라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면 네 녀석의 혀를 도려낼 것이다.
참 내.
제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사부님이 제 혀를 어떻게 도려내실 건데요?
하지만 옛말에 사부님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리고 지금 한창 대노 중이신데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심은 어떨까요? 본디 검의 끝을 의미하는 경지를 한번 떠올려보면 검수와 검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 내가 칼이 되고 칼이 내가 되는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지 않습니ㄲ…?”
- 염병한다.
“아니 사부님. 조금 전엔 혀를 뽑는다시더니 이번에는 염병이라뇨.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런 제자를 너무 막 대하시는 거 아닙니까?!”
- 이놈아! 지금 내가 막 대하지 않고 배기게 생겼느냐?!
“배기는 건 모르겠고. 확실히 잘 베이시기는 할 것 같습니다.”
- ?
“?”
- 방금 뭐라 그랬더냐?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아! 근데 사부님. 그 설명을 드리기 전에 앞서서 제가 급히 해야 할 일이 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게 지금 딱 생각이 났네요?!”
- 지금 이 이야기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어딨느냐?! 이놈아! 이놈아!!!
* * *
‘옛말에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는 피하라고 했어.’
스승님께 드릴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다른 수가 없었는 걸 뭐.’
자칫 잘못하면 파천검문 망하는 날이 될 뻔했는데, 기지로 그걸 막았으니 사실 이건 사부님께서 대노를 하실 일이 아니라 칭찬을 해 주셔야 할 일이었다.
‘혼만 남은 스승이랑 제자인 나, 이렇게 단둘인 문파에서 제자인 내가 사부님을 억지로 내 몸에 담으려다 주화입마에 걸려버리면 그게 망하는 거지 뭐 달리 망하는 건가?’
아, 물론 무생물 그것도 생전 즐겨 휘두르시던 도구가 되어 제자에게 휘둘린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은 당연히 있으실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내 영혼 속에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이나 검 속에 들어가시는 것이나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검에 들어가신 게 때에 따라선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도 당장은 화가 나셨지만 차차 그 점을 이해를 하시겠지.
아무튼 한 이 할에서 삼 할 정도는 사부님의 대노를 피할 심산으로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 거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급하진 않지만 하기는 해야 하는 일이지.”
뭐, 별다른 건 아니고.
사부님을 찾는 데 동원한 혼령들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줘야 했다.
“그래 주기로 약속하고 부려 먹은 거니까.”
하여, 잠시 사부님과의 실랑이를 멈춘 나는 잠깐의 휴식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제를 지낼 준비에 들어갔다.
위령제라 거창하게 말했지만, 내 경우엔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그저 아까 송장들과 나눈 약조를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내려앉은 고분에서 벽돌을 빼내와 네모잡이 모양으로 쌓은 뒤 그 위에 면포를 덮어 제단(祭壇)을 만들고.
주변에 있는 목재들을 대충 다듬어 투박하나마 그릇 비스름한 모양으로 다듬었는데, 그러고 나니 어느새 날이 완연히 밝아왔다.
“제단이랑 그릇은 됐고, 그럼 이제 저 위에 올릴 걸 좀 사와 볼까?”
그렇게 태호의 호변으로 나가보니 부지런한 상인들이 벌써 아침 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들어선 장에서 혼령들이 언급했던 생전에 못 먹어봤다던 잉어니 소고기니 하는 먹을거리와 당과 같은 씹을 거리들과 마지막 협상에서 얹기로 한 비단까지 구해와 목기들 위에 푸짐하게 얹었다.
“이제 제일 중요한 신위(神位)만 남았네.”
중요하긴 했으나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함께 구해온 빳빳한 종이에 도움을 받았던 혼령들의 이름을 적어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장씨네 몇째, 왕씨네 몇째, 오씨네 몇째, 특이할 것 없는 흔한 이름들을 적어 넣었다.
그러고 나자, 내게 도움을 주었던 혼령들이 감사해하는 것이 종이를 통해 내게 전해졌다.
하나, 본디 감사 인사란 수지타산을 잘 맞추어야 하는 것.
나 또한 그들에게 고마움이 있었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사부님과의 인연을 만들 수 있었네요.”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이름들이 쓰인 종이와 비단 그리고 짜투리 종이로 만든 지전(紙錢)들을 불에 살랐다.
그러자 고분 근처에서 느껴지던 탁한 사기들이 귀신같이 사라졌는데.
딱 하나 사라지지 않은 귀신이 허리춤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 뭘 하나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제법 대견한 짓도 할 줄 알기는 아는구나. 연고 없는 불쌍한 혼령들을 달래 준 것이렷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제가 좋은 일 한 것 같은데요? 달래 줬다기보다는 사부님을 찾아가는데 손이 좀 필요해서 부려 먹고 약속했던 대가를 지불했을 뿐입니다.”
- 흥. 내 네 녀석의 주술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겸양은 되었느니라. 내 생전에 숱한 말코 놈들과 주술쟁이들을 보았지만 혼령을 이리 대접해 주는 것 자체를 처음 보거늘.
흠.
사실과 조금 다른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냥 이 몸으로 행하는 흑마법의 연비가 너무 안 좋아서 이런 방식을 한 건데요…?
- 나 또한 내 스승님을 만나는 기연을 얻지 못했더라면 저런 혼령이 되었겠지.
뭐, 사부님께서 화가 누그러지신 모양이니 대충 넘어갈까…?
“사부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마음대로 생각하시라고 그랬으니까 거짓말은 안 한 겁니다?
그렇게 사부님께서 감상에 잠기시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사부님께서 잠시간 다물고 있던 입을 여셨다.
- 무공 한 자락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놈의 사부 소리만 계속해서 듣자니 면이 안 서는구나. 이제 어찌할 것이냐?
“음. 가르쳐 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 뭐 정식으로 배움을 청하거나 그런 예를 올려야 할까요?”
- 그런 허례허식은 사승 관계를 맺을 때 한 것으로 충분하느니라, 마음 같아선 그것도 안 하고 싶은데 스승님 생각이 나서 한 것이고.
“그럼요?”
- 이 모양 이 꼴을 해서야 검식이고 보법이고 한계가 있지 않느냐! 네 오성이 설령 하늘에 닿아 있다 하더라도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천지 차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느냐?
하기야, 그렇긴 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사부님의 혼이 제 검 안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나시면 유체이탈… 아. 이 경우엔 유검이탈이라고 해야 할까요?
- ?
“…아무튼 혼을 드러내시거나 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그러실 겁니다. 그전까지는 뭐 아쉬운 대로 노력해 봐야죠. 뭐 그래도 심법은 구결을 통해 배우는 거니까 그거부터 하면 되지 않을런지요?”
- 흠, 근데 심법을 알려주는 것에 조금 문제가 있느니라.
“예? 설마 구결을 까잡수셨다 거나…?”
- 까짭숴…? 내 문제가 아니라 네 문제다! 네 문제!!!
엥?
저한테요?
- 그래! 어린 시절에 벌모세수를 한 듯한데… 이후에 몸을 막 굴린 모양이구나? 혈맥에 탁한 기운이 제멋대로 쌓여 있구나. 몸을 그리 굴릴 것이었다면 애초에 벌모세수를 받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막힐 곳은 막혀 있고 열릴 곳은 열려 있어 이리 개판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 전(前)용운이 이 녀석이 또 또 발목 잡네.
- 그리고 이제 보니 혼과 백의 균형 상태도 묘하게 꼬여 있는 듯하고? 죽다 살아나기라도 했느냐?
흠.
이건 내가 빙의되며 생긴 현상인가?
아무튼 중요한 건 해결책이다.
“그러면 어쩝니까? 하나뿐인 제자 몸이 그리 개판이면 파천검문 오늘부로 문 닫습니까?”
- …말을 해도 문을 닫는다가 뭐냐 문을 닫는다가?! 끙… 골치가 좀 아프긴 하구나. 우리 사문의 영단인 만박보심단이 있었다면 해결할 수 있는데, 고분이 저 모양 저 꼴이 되었으니… 그에 준하는 영약이라도 구해봐야 할 것이다. 에이잉…. 내가 육신이 있다면 소림의 땡중들이나 무당의 말코 놈들을 매타작을 해서라도 대환단이나 태청단이라도 내놓게 만들었을 것….
잠깐만 만박보심단?
원작에서 사부님이 잠들어 계시던 고분에서 발견되어 후반부에 등장하는 대마환단의 원류가 되는 그 정체불명의 영단 말하는 건가?
그거야 당연히 들어가는 길에 챙겼는데?
“혹 만박보심단이라는 게 이거 말씀하십니까?”
- 그래! 그거만 있었어도…! 엥…? 그게 왜 거기서 나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