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1)
그거 어디서 났냐는 사부님의 말에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파천검문의 정식 제자가 됐지만, 이걸 챙길 때만 해도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 따지고 보면 사부님의 허락 없이 영단에 손을 댄 게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 스스로는 떳떳했다.
기본적으로 내 성격 자체가 챙길 수 있는 건 미리미리 챙겨놓는 성격이었고, 거기다 사부님도 영단을 고분에 떨구신 지 어언 백 년이 지났다.
‘그 정도면 과거의 포청천부터 먼 미래의 판사님네까지 모조리 모아놓고 판결 좀 해보라고 해도 백이면 백 사부님의 소유권은 소멸했다고 말할걸?’
하지만 이 경우엔 당사자이신 분이 내 사부님이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검마에서 마검이 되셨다고 역정을 내시다 이제야 간신히 진정을 하신 판인데, 또 바가지를 긁힐 건수가 될 각을 만들 순 없지.’
하여, 나는 이걸 어떻게 말해야 사부님 귀에 좋게 들릴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금세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 잘했다! 잘했어! 그 정신없는 판국에 어떻게 그걸 챙겨 나왔구나?! 하하하! 그걸 챙겨 나왔어! 이 일을 어찌 풀어가야 하나 속이 갑갑하기 그지없었는데 갑갑했던 속이 일거에 시원해지는구나! 아무래도 내 스승님이시자 네게는 태사부되시는 분이 하늘에서 우리 파천검문을 보살피시는 모양이다! 으하하하!!
사부님께서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뭐.
그렇게 부질없는 고민을 끝낸 나는 허리춤에서 웅웅대며 기뻐하시는 사부님을 따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 만박보심단이라는 녀석이 여기 있으니, 이제 문제 될 건 없는 겁니까?”
- 그렇다마다, 그거 한 알이면 엉망이 된 네 녀석의 속을 바로잡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정리된 속과 그러면서 얻은 내력을 밑천 삼아 파천신공과 검법을 차차 익혀 나가면 될 테지, 그러다 네 녀석의 말대로 내가 형상을 내보여 시범을 보일 수 있게 된다면 더 거들어 줄 수 있게 될 테고.
하긴, 사부님부터가 만박보심단을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단과 견주셨다.
사문의 영단이라고 덮어 놓고 올려 치시는 것은 아니실 것이다.
애초에 사부님이 그럴 성격이 아니시기도 하시지만, 나는 이 영단이 원작에서 어떤 일들을 끼쳤는지 다 보았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대마환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마인들의 무위를 크게 진일보시키지.’
아무튼 쇠뿔은 단김에 빼야지.
“좋네요.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할까요?”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 흐음… 한데 장소가 좀 그렇지 않느냐?
한데 이 대목에서 사부님 쪽에서 난색을 표해 오셨다.
‘장소라….’
태호의 빈민가 중에서도 쓰레기장이니 그러고 보니 좀 그렇긴 한가…?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하기는 나중에 강호에서 누가 어디서 그런 무공을 배웠느냐는 질문을 듣게 될 수도 있을 텐데, 태호의 쓰레기장에서 익혔다고 하면 좀 멋이 없긴 하겠네요?”
- 그런 문제가 아니니라!
“아닙니까?”
- 엉망인 네 녀석의 속을 바로잡다 보면 필시 명현(瞑眩)의 현상이 동반될 것이다.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꾸는 고통이 이어질 것이며, 뼈마디가 다시 조립되는 격통이 따르겠지. 하니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 하느니라!
“아하. 그 말씀을 하는 것이셨군요?! 근데 사부님 제가 아픈 거나 뭐 그런 쪽으로는 엄청나게 잘 참거든요? 한데도 굳이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 내 진법도 침투하지 못한 네 정신력이야 나도 인정하는 바이긴 하느니라. 하지만, 애초에 정신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신이 멀쩡하다 하더라도 육신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녹초가 될 것이니.
사부님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내 속이 그렇게 개판이라면 그걸 바로잡는 데 정신력과 별개로 육신의 진력이 소모가 될 테니 안전한 장소를 찾긴 찾아야 할 성싶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진짜 문제는 내가 그렇게 뻗어 있게 되는 기간이 얼마나 가느냐였다.
“제자. 사부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했습니다. 하여 질문을 드리려 합니다. 하면 얼마나 ‘안전’하면 되겠습니까?”
- 호오. 좋은 질문이로구나, 얼마나 안전해야 하는지에 따라 선택의 폭이 좁혀지고 늘어날 테지,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 편차가 있을 테니 내 경험의 잣대가 절대적이라 할 순 없겠지만, 네놈의 상태로 미루어 짐작건대 대략 사흘 밤낮은 정양해야 할 성싶구나.
사흘.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면 그리 짧지만은 않은 기간이었다.
지금까지야 큰일 없이 강호를 잘 누비고 다녔지만, 사부님의 말씀 그대로 사흘이나 꼼짝하지 못한다면 나는 말 그대로 잠자는 숲속의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다.
‘일단 태호 인근은 절대로 안 돼.’
약재다 제를 치를 용품이다 이것저것 뿌리고 사며 돈이 있는 티를 내기도 했다.
게다가 백여 년간 헛물을 켜고 있다 하더라도 마교에 내려오는 초대 천마의 유지가 ‘진짜 태호의 섬을 찾아라.’라는 말이니, 이곳엔 마교인 중 누군가가 상주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원작에서 마교의 꼬임에 완전히 넘어가는 언용운의 행보를 생각하면 파천검결을 어느 정도 익히기 전까지는 어지간하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지.’
흠.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 * *
그렇게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칼집에 든 채 그 모습을 보고 있기엔 조금 답답하셨는지 허리춤의 사부님이 입을 여셨다.
- 그게 그렇게 고민을 할 일이더냐? 아까 정식으로 스스로를 소개할 때. 하북 진주 태생으로 언씨 성을 쓴다 하지 않았더냐?
“그러기야 했죠?”
- 하북의 언가라 하면 내가 천하를 활보하던 때에도 권법과 강시술로 이름나 있었던 가문이었다. 개중에 권왕이라 불리던 녀석은 제법 합을 섞어줄 만했느니라.
“호오 그랬습니까?”
- 그랬느니라, 타고난 무골도 그렇고, 주술 쪽의 재능도 그렇고, 나 정도 되는 위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태도도 그렇고, 권왕의 피를 진하게도 이었구나 싶었는데 아니었더냐?
“음. 제가 언가의 직계이긴 하니 사부님이 생각하시는 분의 피를 이은 건 맞기는 할 겁니다.”
- 하면 그사이 언가가 망하기라도 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가세가 좀 기울긴 했지만 아직 천하의 무가를 꼽아보라면 능히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갑니다.”
- 하면, 무엇을 고민하는 것이냐? 네 녀석의 본가로 가면 될 것 아니냐?
갑자기 내가 정식으로 인사 올렸던 순간은 왜 끄집어내시나 했더니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지네.
‘음. 이걸 어떻게 설명 드리지?’
뭐 빙의니 어쩌니 하는 긴 이야기를 사부님께 드려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지금 상황만 담백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지.
생각을 갈무리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복잡한 사정이 좀 있는데, 설명을 드리려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몇 마디로 줄이자면 가문에서 쫓겨났습니다. 더 직관적으로 말씀드리면 호적에서 파였다고 하면 되겠네요.”
- 알 만하구나.
“?”
- 뭐?
“…분명 설명드리기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바로 알 만하구나 소리가 나오시는지요?”
- 알 만도 하니까. 나를 이렇게 만든 것처럼 제 가족들에게 사기라도 쳤겠지!
참 내, 제자를 무슨 사기꾼 취급을 하십니까?
다 풀리신 줄 알았는데 검에 들어가신 걸로 아직도 꽁해 계시네….
뭐, 사부님이 꽁해 계신 건 내 잘못이긴 하고 전(前)용운이가 쌓아놓은 업보도 내가 어차피 가져가야 하는 거니, 굳이 따지고 들 필요는 없다.
다 떠나서 지금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니까.
“아무튼 본가는 불가합니다.”
- 하면 별수 있느냐? 심산(深山)이나 유곡(幽谷)이라도 가야지.
“산에 들어가자고요?”
사부님의 음성에 머릿속에서 폭포수를 맞으며 명상을 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산을 오르는 재래식 수련법들이 머리를 스쳤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야 상관이야 없지만.’
근데, 산에는 산적이 있지 않나?
용명이가 그려준 지도를 보면 어지간한 산이란 산에는 거의 다 산채가 하나씩 들어차 있었던 거 같은데…?
‘어?! 잠깐만 산적?!’
그리고 이때.
어떤 기억이 번뜩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북록채의 방천덕을 처리했으니까 거기는 비었겠네. 그리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아니지.
아니지.
그럴 게 아니라 이거 그냥 은하연이 있는 휘주의 은휘상단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은하연은 지금 천하에서 가장 나를 고평가하고 있을 사람이자, 가장 고맙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장 몰려 있을 사람이기도 하고.’
내 덕분에 원작의 그것보다 훨씬 적은 손실로 북록채 사건을 돌파해낸 은하연이었다.
하지만, 천하 이대상인중 하나인 휘상의 필두인 은휘상단의 후계자 다툼이 한창일 지금으로서는 그런 일에 휘말린 것 자체가 옥에 티가 생기게 되는 사건이었다.
원작의 사건들과 내가 살아오며 봐온 인간 군상들을 떠올려보면 모르긴 몰라도 은하연 세력이 순풍에 돛 단 듯이 나아가고 있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쉬이 짐작이 가능했다.
‘주변에 사람이 부족할 텐데 그런 상황에서 내가 찾아간다면 쌍수를 들고 반기겠지.’
그렇게 되면 명목상으론 은휘상단의 식객 신분이 될지라도 애초에 나는 그녀에게 있어 은인인 몸이니 사실상 상전이 된다.
‘그럼 풍족한 환경에서 파천신공과 검법을 익히고 나아가 내년에 있을 학관 시험 준비도 할 수 있겠지.’
그러다 은하연을 밀어줄 수 있는 요소가 보이면 도와줄 수도 있을 거고?
은휘상단의 후계자 경쟁의 최종 승리자는 은하연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은하연 본인은 그걸 알지 못하니 생색을 내기에는 최적의 환경.
‘안전하게 기혈도 고르고, 풍족하게 수련도 하고 은휘상단의 후계자 경쟁의 판세를 관망하며 미래 투자도 할 수 있겠네?’
꿩 먹고 알 먹던 놈은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최적의 환경.
‘어차피 엮일 만큼 엮이기도 했고.’
당초에는 학관에서 재회할 생각이었는데, 아다리가 이렇게까지 딱 맞아 버리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하연 코인 추가 매수 들어가야지!
견적 계산을 끝낸 나는 사부님이 들어 계신 회한의 자루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 갈 곳. 생각났습니다.”
* * *
북록채에서의 사건이 있은 후, 아비인 강남상왕에게 보고를 마치고 은하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의 사람들을 솎아내는 작업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북록채 사건은 은하연이 방심을 했다곤 하나 그녀의 상행 계획을 세세하게 알아야 계획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말인즉 그녀의 최측근 중에 내심으론 동생의 편에 붙은 자가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은하연으로서는 주변을 단속하지 않고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비위(非違)의 정도가 선을 넘은 이들을 비롯해 행태가 의심스러운 이들을 쳐내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쓰는 그녀의 기준은 빡빡해졌는데, 북록채에서의 실책으로 은휘상단 내에서 그녀의 신뢰도가 내려가며 은하연에게 붙을지 그녀의 남동생에게 붙을지 저울질을 하는 자들이 크게 늘었으니, 자연히 쓸 사람 자체가 부족해진 것이다.
물론, 사람이 부족하면 맡은 일을 줄이면 해결이야 간단했다.
하지만 그건 또 후계자 경쟁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문제였다.
강남상왕인 아비가 그녀에게 맡긴 일을 끝내지 못하고 되돌려 드린다는 것은 역량이 부족하다고 선언하는 꼴이었으니까.
‘…오늘은 한 각도 못 잤어.’
하니 결론은 빈자리까지 은하연이 책임지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몸이 축나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정도야 방년의 젊음으로 견딜 수야 있었다.
문제는 정신마저 축나고 있다는 데 있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과 후계자 자리에 그녀의 동생을 앉히고 싶어하는 자들의 권모술수와 실질적인 위협에 시달리는데 어디다 터놓고 말할 데도 없었으니까.
‘언 공자 같이 혼을 내주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은정길 같은 믿을 만한 사람이 더러 남아 있긴 했지만, 그네들은 은하연을 보호하려 들고 또 그녀의 의견에 동의할 줄 만하지, 날카로운 소리를 할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시각각 내년이 다가오고 있으니 정무학관의 입학 시험 일자도 다가오고 있는 거네.’
북록채 사건 직후만 해도 나도 그 시험에 참가해 언 공자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관계를 새로 정립하겠다 다짐했는데….
이래서야 시험 준비를 할 수나 있을까?
‘서천의 비단에 투자한 게 이문이 크게 남아서 맡기신 돈은 불려놓긴 했는데….’
그때였다.
은하연 본인도 몽롱한 정신이 어쩌다 언용운을 떠올려 냈는지 알 수 없는 이때.
그녀가 기거하고 있는 창휘당 밖에서 은정길이 은하연을 급히 찾았다.
“당주님! 밖에 좀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 저도 모르게 은하연의 입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나갔다.
“아직 낯도 못 씻었어요! 신새벽부터 무슨 일이시길래 그러시죠?”
“…아. 죄송합니다. 언 소협께서 찾아오셔서 저도 모르게 달려왔는데, 제가 다시 가서 잠시 기다리시라는 말씀을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휘당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신새벽부터 무슨 일이냐던 은하연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당주님! 신발! 신발을 안 신으셨습니다!! 신발은 신고 나가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