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버르장머리의 상태가?! (1)
- …양심에 찔리지 않느냐?
은하연에게 친구비를 받아 챙기기로 한 나를 보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하셨다.
그에 나도 사부님을 향해 생각을 하나 던졌다.
‘…어째 어조가 제자를 말종 취급을 하시는 듯하십니다 사부님?’
- 내 살다 살다 요금을 받고 벗을 해주기로 하는 광경은 처음 봐서 그러느니라.
‘그럼 준다는 걸 안 받습니까?’
- 아니 좀 그렇지 않느냐? 오륜이 이르기를 친구 사이의 도리는 믿음에 있다 하였거늘, 백 년 사이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는 말이 붕우유전(朋友有錢)으로 바뀌기라도 한 것이냐?
‘엥? 그러는 사부님께서도 조금 전만 하시더라도 고작 식객을 청하는 일에 휘상의 후계자에게 받은 보은패를 써버려도 되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의 속뜻은 결국 ‘이렇게 하찮은 데 쓰지 말고 좀 더 벗겨 먹을 때 쓰는 게 어떠냐?’라는 말이었을 텐데요?
- …아니 그야 그랬긴 하지만! 결이 좀 다르지 않느냐! 사정을 들어보니 좀 딱하던데, 결국 그 보은패라는 것도 돌려받았고?!
‘참 내, 걱정할 사람이 없어서 머지않아 휘상의 후계자가 될 사람을 걱정하십니까? 이런 분이 마(魔) 소리는 어떻게 들으셨대? 은하연이 딱하면 천하에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황족들 말고는 없을걸요?’
- …흐음.
아니지, 그쪽이 오히려 더 불쌍할지도 모른다. 그쪽 업계(?)의 암투는 그 심도와 잔혹함이 무림이나 상인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닐 테니까.
‘여튼 사부님이 너무 옛날 사람이셔서 그런 기분이 드시는 겁니다.’
후세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합니다.
무슨 상담, 뭔 상담, 온갖 전문가들이 이야기 들어주는 걸로 얼마나 많은 비용을 받는데요.
- …말 그대로 천지가 개벽을 했구나.
뭐, 내가 말한 건 지금보다 훨씬 더 후세의 이야기긴 하지만.
‘좀 전에 제게 너는 다 계획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일들은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되고. 사부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면 하나뿐인 제자를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거듭나게 만들지만 고민해 주시면 됩니다.’
- 오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연무장과 비동까지 딸린 번듯한 숙소를 얻었겠다. 내 네 녀석의 입에서 단내가 나다 나다 모조리 증발해버릴 때까지 굴려 내가 어찌 마귀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를 꼭 일깨워주마.
…어.
…잘 못 들었슴다?
* * *
아무튼 그렇게 창휘당의 식객 겸 은하연의 말벗(기간제 유료 상품)이 된 나는 첫날을 아주 알차게 보냈다.
뭐, 알차게 보냈다 하여, 당장에 대단한 일을 벌인 것은 아니고.
소소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여독을 풀었다.
“쩝쩝쩝!”
- …태호에서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느냐? 딱히 오는 길에 굶거나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확실히 휘상이 괜히 휘상이 아니네. 숙수의 솜씨가 장난이 아니네요.
요리는 강남 요리라더니, 하북의 언가에 붙어 있었으면 인생 절반 손해 볼 뻔했네.
“챱챱챱! 촵촵촵!!”
- …그렇게 맛있냐?
“혜! 사부힘도 잡훠 보힐해요?”
미미(美味)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 …뭐? 잡숴 보실래요? 이놈아! 누굴 놀리느냐?! 입이 있어야 먹을 것 아니냐!
“꿀꺽. 에이, 제자가 어찌 하늘 같은 사부님을 놀리겠습니까. 식사를 잡수실 수는 없겠지만, 술 정도는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쭌 거죠.”
- …뭔소리냐? 내가 입만 없더냐? 목구멍도 없다!
“뿌려드리면 되죠.”
- …어?!
“그럼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제 검의 검신이 사부님이라 생각하면 제자가 사부님께 술을 끼얹는 아주 망덕한 형국이 되겠지만, 파천검문이 처한 상황이 좀 특수하니 제자가 실례를 무릅쓰고 한잔 올리겠습니다.”
꼴꼴꼴꼴꼴-
- ……!!!
“뭐라더라? 아까 은 표두가 뭐라고 했는데, 맛이 천 리에 퍼진다 그랬나?”
- …이, 이 맛은?! 향과 맛이 강남 제일이라 이름의 북으로 천 리까지 퍼졌다는…! 뚜껑만 따도 향이 십 리를 가 온 동네가 취하고야 만다는 안휘의 명주 구자(口子)로구나!!
“오. 되나 싶었는데 이게 되네. 맛과 향이 어떻게 잘 느껴지십니까?!”
- 아니, 잘 모르겠느니라,
“예?”
- 조금 더 음미를 해보아야 알겠다 이 말이다!
“?”
- ?
참 내.
“한잔 더 올리기 전에 확실히 하겠습니다. 제자는 수련에 전념코자 당분간 육고기와 밥은 먹어도 술은 먹지 않을거니, 사부님이나 저나 쌤쌤입니다. 이제 제가 먹는 거로 투정 부리시기 없기예요?!”
- 섬섬이 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알았느니라! 그 조동아리 나불댈 시간에 어서 붓기나 하거라! 귀한 향 다 날아간다 이놈아!
꼴꼴꼴꼴-
음.
근데 이래 봬도 명검에 사부님의 혼까지 깃들었는데 녹이 슬거나 하지는 않겠지?
뭐, 아무튼.
그렇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뱃속에 기름칠도 좀 했고.
“시워어언 하드아~.”
- 뜨겁기만 뜨겁구만 이게 어째서 시원하다는 것이냐?!
뜨끈한 목간통에서 묵은 때와 함께 산 넘고 물 건너며 얻은 피로도 씻어냈으며.
꼬 끼오-
오랜만에 푹신한 침상에 몸을 던져 새벽닭이 울기까지 잠도 푹 잤다.
그렇게 그간의 여독을 털어낸 나는 이튿날 아침 의복을 정제하고 곧바로 은하연이 마련해준 비동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예. 은 표두님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비동에는 나보다 먼저 은정길이 나와 있었다.
은정길이 비동에 나온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내가 비동 안에서 꼬인 속을 바로잡는 동안 혹여나 있을 수 있는 침입자들에게서 일종의 호법(護法)을 서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소협께서는 제게도 은인이신걸요. 이 일을 제가 맡을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거니와, 솔직한 심정으로 창휘당의 격무에서 배제되어 쉰다는 마음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영광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보다 뒤에 그 쉬어서 좋다는 소리에 믿음이 갑니다.”
“티가 좀 많이 났습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뭐, 은 표두 정도면 믿을 만한 인사였다.
그도 그럴 게 호법이란 게 이번 경우에는 그리 대단한 역할이 아니었다.
내가 쌓은 업보가 있다 하나 은휘상단의 장원서 정양하는 나를 노리고자 자객을 고용할 정도의 업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그러니 은 표두가 맡은 역할은 의도치 않게 비동이 있는 쪽으로 들어온 장원 사람들만 돌려보내기만 하는 정도였다.
‘사람 자체도 믿을 만하고.’
인생관이 좀 소시민적이긴 해도, 북록채의 일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망치지 않고 목숨을 걸었던 양반이니까.
“뭐, 아무튼 잘 좀 부탁드립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나는 그렇게 비동 앞에 망부석처럼 우뚝 선 은정길을 뒤로하고 비동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 세상이 정말로 좋아졌구나. 나 때는 상상도 못 할 비동이로다.
“그러게요. 생각보다 시설이 좋네요?”
- ……?
“?”
- 생각보다 좋다고? 네 생각 속의 훈련 장소는 대체 어떤 곳이길래…? 뭔 신선들이 몸을 단련하는 곳이라도 되느냐?
아.
저야 기준 자체가 한참 멀리 있으니까요.
뭐, 먼 미래의 훈련 시설과 비교한 거니까, 신선들의 몸 단련소라는 말도 영 틀린 것은 아닌가?
아무튼.
은하연이 내어준 이 인공 석굴의 시설은 시대상을 감안하면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이중, 아니다. 은정길이 서 있는 곳까지 치면 삼중으로 된 문이 외부의 방해를 철통처럼 차단해주고 있었고, 약숫물이 졸졸 나오는 약수터와 벽곡단과 육포가 재여 있는 식량고가 있었으며, 흐르는 물을 이용해 청결을 확보한 해우소도 있었다.
“이제 여기서 사부님이 하신 말씀처럼 입에서 단내가 나다 나다 증발이 될 정도로 구르기만 하면 되겠네요.”
- 호오. 어제는 잘못 들었다고 꼬리를 말더니?
“그거야 굴려주실 사부님 기분 좋으시라고 죽는소리 한번 한 거고요.”
- 흥. 나중에도 같은 소리가 나오는지 두고 보자꾸나.
“옙. 참고로 저한테 두고 보자는 말 한 사람치고 원하는 답 들어간 사람 없습니다.”
- 끌끌끌. 오냐 더더욱 두고 보자꾸나!
“그래서 어떻게, 만박보심단부터 꿀꺽 삼키면 되겠습니까?”
- 그러기에 앞서 내 물을 것이 있다.
“하문하십시오.”
- 언가의 심법의 경로는 어찌 되느냐?
어, 그건 모르는데요?
그 분야는 전(前)용운의 관할인지라, 나로서는 정말로 몰랐다.
하여,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니 언가의 심법을 아는 게 중요할 리는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알지 못합니다.”
- 응? 알지 못한다고?
“예.”
- 내가 가문의 비전을 가로챌까 그러는 것이냐?
“아닙니다. 검에 끝을 보신 사부님께 어찌 제자가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저 모르기에 모른다고 할 뿐입니다.”
- …하. 이 이 맹랑한 놈 좀 보게?! 이제 보니 가문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언가의 무공은 모두 잊었다. 뭐 그런 이야기렷다?!
예?
전혀 아닌데요?
- 뭐, 검을 쥐는 자에게 그런 쇠고집은 꼭 단점이라 볼 수 없지, 특히나 우리 파천검문의 정신과는 더 닿아 있기도 하고.
뭐, 사실과는 좀 다르지만 분위기가 좋은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야지.
- 뭐, 언가의 심법이 파천심법을 익히는 데 꼭 필요하기에 물은 것은 아니니 중요치 않다.
“그렇습니까?”
- 그렇느니라. 네가 언가의 심법에 대해 말을 했다면 나는 지금부터 그것은 잊으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으니 중요치 않느니라, 그러니 언가의 심법이 기억나냐는 내 질문은 우문이 되는 것이고, 오히려 모르겠다던 네 답이 현답이 되는 거겠지.
그렇게 운을 뗀 사부님의 음성은 계속해 이어졌다.
- 파천(破天)은 곧 역천(逆天). 순리(順理)라 여기던 것들에 의문을 표하고 거슬렀기에 닿을 수 있었던 진리, 그렇기에 말코 놈들이나 땡초들의 심법에 깊이 발과 정신을 들여놓았다면 절로 의문과 의심이 들고 만다. 그런 생각이 심중에 맺히는 순간 심마(心魔)가 찾아올 수가 있느니라.
무협지를 많이 접했기에 얼추 강호의 도리들은 알고 있는 나였지만, 이런 무리(武理)에 있어서는 사실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였다.
하지만, 사부님의 말씀이 대충 어떤 말씀이신지 이해는 갔다.
‘마공은 기혈을 반대로 운용한다는 묘사가 원작에 나오니까.’
그 마공의 뿌리가 우리문파의 파천신공이라는 설정이니, 파천신공 또한 기존의 무공과는 이래저래 상충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니, 사부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기존에 알고 있던 진리와 당신이 말하는 진리가 다를 경우 의심치 말고 자신의 말을 따르라는 말씀이셨다.
‘뭐, 사부님은 내가 정종심법을 익혔다는 전제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시겠지만. 나야 기존의 심법을 모르니 그럴 일은 없지.’
근데 한 가지는 궁금했다.
“그, 사부님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 해 보거라.
“그, 저번에 말씀드렸던 사부님의 후인을 자처하는 자들 말입니다.”
- 뭐 마굔가 하는?
“예. 그쪽의 무공을 익힌 사람 중에 잘 나가다가 광인이 되거나 하는 사람들이 더러 나오던데, 그건 왜 그런 걸까요?”
- 순리를 거스르는 게 어디 쉽겠느냐?
음.
그야 그렇긴 하지.
- 의심을 해도 심마에 빠질 수 있지만,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오성에 따라 아 다르고 어 다르게 받아질 수 있는 게 구결인데 그 걸음을 잘못 디뎌도 심마에 빠질 수 있다.
“그렇군요.”
- 기본적으로 정신력이 동반되지 않는 자가 파천의 무공을 배우려 하면 역으로 잡아먹히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내, 그리하여 제자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그렇다면야 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애초에 정신에 면역이 있기도 하고, 또 내 경우엔 영혼으로 이어져 계신 사부님께서 길도 제대로 잡아주실 테니까.
“제자, 사부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 모두 이해했습니다. 슬슬 시작할까요?”
- 오냐, 그럼 이제 만박보심단을 삼키거라.
사부님의 말씀에 나는 단박에 만박보심단을 입 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
그러자 화-한 향과 함께 뜨겁고도 차가운 기운들이 입 안에 감돌았다가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단전에 이르러 고삐가 풀려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
그와 함께 찾아온 절로 어금니를 카득 깨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극통.
-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운을 최대한 갈무리해서 나를 따르거라.
그 와중에 또렷하게 들려오는 사부님의 음성.
격통이 사지로 퍼져나가는 순간이었지만 내 입가엔 미소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놈들 참 가열차게도 날 뛰는구만?!
오냐 마음껏 날뛰어봐라.
근데 니들 한 방울도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들어와서 날뛰는 것은 니들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