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19화 (19/444)

제19화. 역사적으로도 그게 약이었죠? (1)

은하연은 근 한 달 만에 가장 활기찬 아침을 맞았다.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아.’

물론, 창휘당이 쳐내야 하는 일들은 그대로였고, 고작 하루 낮밤 사이 부족했던 인력이 공급되지도 못했다.

하여, 은하연의 수면 시간은 지난 한 달여와 다름없이 한 시진 미만이었다.

하지만 은하연 본인이 느끼기엔 두세 시진은 푹 잔 것처럼 개운했다.

무엇보다도 그 개운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간밤의 꿈자리였다.

‘내용이 좀 바뀌었어.’

내용이 바뀌었다고 중얼거릴 만큼 지난 한 달간 은하연은 꿈만 꿨다 하면 늘 같은 장소 같은 순간에 놓였다.

북록채.

그것도 방천덕을 마주했던 순간.

그 순간에 던져진 꿈속의 은하연은 무기력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그 상황을 초래한 자신의 안일을 자책하는 와중에 끔찍하게 주변인들을 잃었다. 그러다 마침내 서슬 퍼런 대도가 그녀의 목에 스치려는 찰나 ‘헉!’ 하고 잠자리를 땀으로 적시며 일어나는 게 그간의 양상이었다.

‘이번에도 배경은 같았지.’

간밤에 꾼 꿈의 배경도 지난 한 달여간의 양상과 다르지 않았다.

은하연은 간밤에도 ‘그날’, ‘그 순간’에 놓였다.

상황도 거의 같았다.

그녀는 오늘도 꿈속에서 밧줄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결정적인 게 달랐다.

‘…언 공자.’

세상 사람들이 칭하기를 언가의 망나니라 부르는 사람이 그 장소에 출현한 것이다.

그렇게 은하연의 꿈속에 출현한 언용운은 그간 은하연의 정신을 꾸준히 좀먹어온 순간을 너무도 손쉽게 베어 넘기고는 은하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거칠게 꾸짖으며 꿀밤을 먹였다.

‘…어찌나 생생하던지.’

그 바람에 은하연은 별이 번쩍하는 느낌에 머리를 싸쥐며 잠에서 일어난 터였다.

여전히 꿈속에서 본인은 꼼짝도 못 했다. 살겁도 나왔고, 얻어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어.’

뒤숭숭하기로 따지면 여간 뒤숭숭한 게 아니니, 지나는 사람에게 묻는다면 백이면 백 간밤의 꿈을 악몽의 한 갈래라 할 테지만, 은하연에겐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하. 진짜 언 공자는 내게 꿀밤을 먹이거나 하시지는 않았는데.”

아니, 되려 웃음이 나왔다.

속이 시원했기 때문이었다.

답답했던 상황을 단칼에 정리해 버리는 것부터, 답답했던 은하연 자신을 응징하는 것까지.

다른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은하연에게만큼은 기분 좋은 꿈자리였다.

하여, 은하연의 하루는 오랜만에 활기차게 시작됐다.

첫닭이 울면 부리나케 찾아와 세안수를 올리던 시비들을 퉁명스레 내쫓고 되는 대로 옷가지를 주워 입고 창휘당으로 걸음을 옮겨 서간에 파묻혔던 그동안과 달리, 시비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도 빗어 올렸고, 단아한 궁장도 골라 입었다.

별것 아닌 변화였지만 그런 행동들은 충분한 기분 전환이 되어주었고, 그런 기분 전환은 일에 잡아먹히기 직전까지 가며 바래가던 은하연의 총기를 돌려주었다.

하여 이날 창휘당의 당주전에 쌓인 서간들은 전에 없던 속도로 처리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렇게 당주의 지휘 아래 창휘당 전체가 오랜만에 정력을 회복하여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쳐내고 있느라 해가 중천을 넘어 서녘을 향해 달리고 있는 그때.

“당주님! 당주님!!”

한 사람의 인형이 부리나케 달려와 창휘당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죠?”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상전의 멀쩡한(?)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갔다가.

“?!”

“무슨 일이냐는 데도요?!”

되물어오는 은하연의 음성에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아! 그, 그게!”

하나 그의 보고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가 없겠네요. 그대는 은 표두 휘하의 사환으로 아는데, 그대가 여기 왔다는 건 비동에 무슨 일이 났군요?”

“어? 예. 예!”

“백금테의 귀인이 사용할 것이라 단주님께 허락을 받았고, 그 일이 각 당과 하부 조직에 연통이 갔을 것인데도 그곳에서 소란을 피울 사람은 필경 성휘당주뿐이겠죠?”

“어? 예. 그것도 맞습니다!”

첫째론 은하연이 순식간에 일의 맥락을 파악했기 때문이었고.

“이 시각부로 창휘당의 통상 업무를 정지합니다. 그리고 감히 강남상왕의 장원에서 그 법도를 어기고 귀인께 무례를 범해 은휘상단의 신의와 명예를 더럽힌 자를 단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니, 각 각은 필수 서기들만 남고 호위, 표두, 표사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휴대하고 장 표두의 지휘 아래 나를 따르도록 하고, 채 표사는 내법당에 장 행수는 단주전에 제 뜻을 전하세요.”

“다, 당주님?”

“뭐죠? 장 행수?”

“그, 단죄라 하시면 정확히 어떤…?”

“몰라서 묻는 건가요? 휘상의 법도에 해당 선례가 명백하게 적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저, 적혀 있는 대로라시면?”

“손가락을 잘라야죠.”

둘째론 지금껏 이복동생과의 관계에서 줄곧 온건한 태도를 이어오던 은하연이 서슬 퍼런 칼날을 빼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예전에.

그러니까 내가 딱 진주언가에서 쫓겨나던 때쯤?

대충 언가의 가풍이 낳은 후기지수 희망 편이 언용명이면, 절망 편은 전(前)용운이다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건 마지막 권유야 은정길이.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비켜. 그리고 주제를 몰랐다는 말과 함께 내 사람이 되겠다 하면, 내 지금의 무례는 잊고 훗날 문지기 정도로는 써주지.”

“제 답은 전과 같습니다. 당분간 이 비동은 창휘당주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강남상왕께서 허락하신 바입니다. 성휘당주께서는 들어가시지 못합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실랑이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오늘은 문득 은가의 가풍이 낳은 후기지수의 희망 편과 절망 편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은하연이 희망 편이고면 저 문 밖의 은가 놈이 절망 편이고.’

…아.

은정길 표두도 방계긴 하지만 은씨긴 하니 문밖의 은가 놈이라고 해버리면 좀 그런가?

‘저 자식의 이름이 뭐였더라? 쟤도 하 뭐시기였는데? 스 하는 발음이었던 것 같고?’

…ㅅ

아, 기억났다!

하성! 은하성!

원작의 은하연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면 이쪽 집안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 철저한 방임으로 훗날 휘상을 경영해나갈 옥석을 고르는 집안이었는데.

은하연은 그 방임을 책임감으로 전환했다면 은하성은 거기에 아주 날개를 달아 방종까지 가버린 녀석인 듯했다.

“나도 안에 있는 분께 해코지하거나 할 생각은 없어. 백금테의 귀인이라며? 아무리 누님에게서 그 패를 받아 간 사람이라도, 누가 은휘상단을 이어받을지 알 수 없는 판국이니, 귀인께서는 나랑도 연을 맺어두고 싶어 할 게 분명해.”

전혀 아닌데?

은하연이라는 황금 동아줄을 두고 내가 왜 쉰내가 풀풀나는 썩은 동아줄을 잡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은하성의 패악질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감히.”

“!”

“당신.”

“!”

“따위가.”

“!!”

“내 앞을 막아서서. 나중에 감당이 가능하시겠냐고?! 애초에 꼴랑 일류 말석의 실력으론 은정길 당신 나 감당 못 할 텐데?”

철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어찌나 그 패악질이 심한지….

- 뭔 저런 미친개 같은 놈이 다 있느냐? 어제 본 그 휘상의 후계자라던 아해를 더러 누님이니 어쩌니 하는 말본새를 보니, 저 은정길이라는 표두보다 훨씬 어린놈인 것 같은데, 저리 패악질을 부려? 휘상도 백 년 사이 개판이 다 됐구나!

“오죽하면 평생을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사시며 세상을 개판으로 만드신 사부님 입에서 미친개 소리가 나올 정도.”

- ?

“?”

- ??

“…아. 속으로 말한다는 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부님.”

- ???

뭐.

아무튼.

은 표두가 닦이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래저래 신경이 좀 쓰였다.

‘일단 내 호법을 서주다가 저 꼴을 당하고 있는 거고.’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은정길 표두는 사부님과 은하연 정도를 제외하면 이 세계에 와서 가장 친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같이 죽을 고비 한번은 넘은 사이이니까.’

문득 옛날 생각도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종국에는 사령왕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C급 판정받고 짐꾼부터 시작했기에, 이런저런 부조리나 불합리를 참 많이도 겪어 봤었거든.

‘대부분은 참교육을 해줬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근데 나 때는 초유의 사태라 그런 인성 개차반들의 능력이라도 국가적으로 필요해서 중용이 됐던 건데, 강남상왕이라는 양반은 저 자식을 왜 내버려 두는 거지?’

그냥 딱 봐도 은하연이라는 번듯한 정답이 있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강남상왕이 깔아 놓은 포석이 보였다.

‘…이거 잠복소네.’

왜 그거 있잖은가?

겨울 되면 나무에다 지푸라기 둘둘 말아 놨다가, 그 안에 벌레들이 겨우내 모이고 나면 봄에 불태워 버리는 거.

은하성의 편에 붙는 것 자체가 잘 생각해보면 중원 이대 상인 소리에서 벗어나 천하제일의 거상으로 가는 것보다는 방종에 빠진 애송이를 밀어서 은휘상단에서 크게 한 조각 떼어먹고 싶다는 반증이니, 훗날 일거에 불살라 버리려는 그런 심계가 담긴 포석 같았다.

‘거기에 지금 기준으론 원작의 성격 연성이 덜 되어서 독기가 좀 부족한 은하연에게 제 혈육을 찍어내는 시련을 자연스럽게 부여해서 독기를 주입할 목적도 있는 거겠지.’

은씨 가문 무섭네.

무서워.

‘당장에 은휘상단의 후계자 구도의 형세가 반반이니 어떠니 하는 것도 강남상왕이 다 의도한 거겠지.’

아무튼.

내 입장에선 이건 은하성에게 강제로 예절을 주입해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흐흐흐.’

어떡하냐 우리 하성이.

원래라면 좀 더 저렇게 개차반 짓을 하며 행복하게 살다가 훗날 제 이복 누이에게 참교육을 당하겠지만, 때와 장소를 잘못 골랐으니 오늘 이 형님께서 예절 주입을 좀 해주마.

그렇게 내심의 결론을 내린 나였다.

하지만, 이제 사문이 생겼으니 사부님의 의견도 들어는 봐야지.

“저. 사부님?”

- 왜 그러느냐?

“사부님의 시절엔 저런 놈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 자고로 미친놈은 몽둥이가 약이니라.

“그렇죠? 역사적으로도 그게 약이었죠?”

- 고럼. 고럼.

* * *

끼이익-

비동의 철문을 열자 밖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은 표두와 은하성의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는데, 먼저 반응이 온 쪽은 은 표두였다.

“벌써 나오십니까. 최소한 사흘은 안에서 나오지 않으실 거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밖이 너무 시끄럽지 않겠소?”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운을 뗀 은 표두였지만, 그 또한 일류를 넘어 고수 반열을 넘보는 무인이었다.

그는 곧 내 무복의 상태나 자세 같은 게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달라졌음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와중에?!”

나는 그런 은 표두를 향해 적당히 눈짓을 주었다.

쉿.

지금부터 느그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시작해야 하니.

‘거 눈치 좀 챙깁시다.’

은 표두는 내가 보낸 눈짓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두 짬을 허투루 먹은 건 아닌지라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걸음을 물렸다.

그러자마자 은하성이 코를 싸쥐며 입을 열었다.

“어우 냄새야. 뭐야?! 이 거렁뱅이 같은 자식은? 이봐 은정길이 뭔데 니들끼리 쑥덕거려…? 아. 잠깐만. 그럼 설마 이 자식이 누님이 백금테를 두른 보은패를 넘긴 사람인가?”

그런 은하성을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마도?”

“뭐야 이게? 무림명숙이나 은거기인이라도 와 계신 줄 알고 가르침이나 한 수 청해보려 했는데. 맥 빠지네.”

그런 분이 계시긴 해.

내 허리춤에.

근데 너 싫으시대.

뭐, 그런 의미에서.

“맥 빠질 것 없다. 이 몸 어르신은 다른 어르신들과 달리 정 없이 한두 수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삼사십 수 정도는 알려줄 생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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