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1화 (21/444)

제21화. 강남상왕 (1)

사랑의 매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은하성은 단시간 만에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물론,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니, 사실 은하성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일단 겉보기 등급만큼은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차렷!”

샥-

“열중쉬엇.”

샤샥-

나이가 띠동갑이 넘게 차이 나는 은 표두더러 ‘이봐 은정길이’ 같은 소리를 하거나 보기에 어떻든 제 누님이 가문의 명예가 걸린 보은패까지 준 나를 더러 ‘이거 뭐 하는 물건이니’ 했던 느그 아이.

“차렷!”

샥-

그랬던 느그 아이가 지금 얼굴이 퉁퉁 부은 얼굴로 K-사관 학교식 제식을 기민하게 행하고 있었다.

“열중쉬엇! 쉬엇!”

“하아.”

허?

하아? 하아아아?

아니 이놈이 조금 칭찬을 해주자마자 바로 개판을 치네?

지금 누가 숨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분명히 차렷, 열중쉬엇, 차렷이라 했거늘 누가 부동자세에서 숨소리를 내었어?!

금부장은 들으라! 가 아니고.

“…교육대장은 실망했다. 차렷과 열중쉬엇 모두 부동자세라고 분명히 알려줬을 텐데? 아닌가?”

“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근데 은하성 올빼미는 어째서 그렇게 들썩거리는 숨으로, 힘들다는 티를 굳이 내가며 요란하게 움직인 거지?”

“…예?!”

“처음에야 이런 제식 교육 자체가 처음일 거고, 차렷이니 열중쉬어니 하는 구령도 처음 들어 봤을 터라 그러려니 해줬지만, 아직도 구분을 못 한다는 건, 일종의 반항이라 해석해도 좋겠나?! 사랑의 매가 조금 부족했어?!”

뚜둑-

뚜두둑-

“아, 아닙니다!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아닌데 왜 그랬지?”

“그, 그게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요. 교육관님께서 부, 분명 쉬엇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그래서 그랬던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하겠습니까?!”

하, 이 자식 보게 지금 여기 눈이 몇 갠데 어디서 그런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을.

“은 표두. 진짜로 내가 쉬엇이라 그랬습니까?”

“어…. 음…. 방금은 쉬엇이라고 하긴 하셨습니다…. 예.”

어.

진짜 그랬다고?

아니다.

은 표두 저 양반은 항상 생각이 많은 양반이다.

은휘상단의 후계자 경쟁에서 은하연의 편에 줄을 서긴 했고, 은하성에게 직접적으로 멸시도 당해왔을 테지만, 혹시 나를 생각해 ‘이쯤 하면 되시지 않았나요?’ 하는 생각으로 은하성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내겐 아직 한 명의 판관이 더 남아 있었다.

‘사부님?

그것도 이 구역에서 가장 연륜과 식견이 높으시며, 혼령의 상태이시어 오감도 가장 예민하신 분이.

‘제가 정말로 쉬어라고 했습니까 방금?’

- 솔직히 그러긴 했느니라.

‘엥? 진짜로요? 이거 하마터면 생사람 잡을 뻔했네요.’

- 진짜로 그랬느니라. 하지만 나는 저놈이 생사람의 범주에 드는 놈은 아니라고 본다.

뭐, 그건 그렇죠?

따지고 보면 은가의 망나니 같은 녀석으로 제 놈이 지금껏 패악질을 부린 걸 생각하면 제가 예절을 주입하기 시작한 지 이제 반 각 정도밖에 안 됐으….

- 태도가 글러 먹었느니라! 웃어른이 야단을 치면 우선 적으로 시정하겠습니다아 하는 소리가 가장 먼저 입에서 튀어나와야지! 나 때만 해도 시정하겠습니다가 뭐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소리로 시작했느니라! 에이이잉!

…아, 심사가 틀리신 쪽이 그쪽이셨습니까?

뭐, 아무튼.

잠시 잠깐 은하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뻔했다.

그런데 사부님과 대화를 하고 나니, 과거에 헌터 사관 학교에서 구르던 시절이 절로 떠오르며 다시금 머리가 차가워졌다.

‘사부님 시절은 너무 갔고. 진짜 내가 후보생이던 시절만 해도 아무 이유도 없이 징하게 굴렀지.’

그에 비하면 은하성 올빼미는 제 발로 이곳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고, 선빵까지 날렸다.

그러다 참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자업자득 아닌가?

잠시간의 고민 끝에 고개를 주억일 만한 답을 도출한 나는 냉철하게 낯을 바꾸고 은하성을 향해 다시금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이때.

“…크흑.”

갑자기 은하성이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더니,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흑. 크흑…. 지, 진짜로 쉬어라고…. 하셨딴 말힙미닷.”

어.

야.

우냐?

“…크흑…. 흐흐흑.”

사부님 쟤 우는데요?

- 쯧쯧쯧. 그러게 살살 좀 하지. 비위 상하게 다 큰 사내놈을 울리고 그러느냐?! 내 쥐 잡듯이 잡을 때 알아봤느니라! 어찌나 두드려 볶던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도가 글러 먹었느니 어쩌니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근데 쟤는 다 커서 신체발부가 수북수북할 자식이 뭘 이만한 일로 울고 그래…?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시 당황한 이때.

멀찍이서 쩔그럭-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은하연을 필두로 병장기를 갖춘 무사들과 표사들이 몰려왔다….

“??”

“?”

“???”

…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입들을 떡하니 벌렸는데, 그중에서 가장 예쁘게 입을 벌렸던 사람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말을 건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죠?”

그런 은하연의 질문에 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해?’

난 너를 믿었던 만큼 은 표두도 믿었기에 아무런 의심없이 비동에 들어갔고.

그 어느날-

그때였다.

그렇게 내가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 이때.

무릎을 꿇은 채로 훌쩍거리고 있던 은하성이 엄청난 속도로 땅을 기어가 은하연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눈물과 콧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누, 누님! 저 좀, 저 좀 구해 주십시오!!”

“…성휘당주? 보, 본인 맞나요?”

“예! 누님 동생 하성이 맞습니다! 닷씨는 닷씨는 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 좀 구해 주십시오!”

“…뭘 안 한다는 거죠? 그리고 저는 당신을 구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반대로 은인께 무례를 범한 성휘당주를 벌하기 위해 왔죠. 여기 내법당의 무사들이 보이지 않나요?!”

“뭐가 됐든 안 하겠습니다! 아! 내법당의 무사분들도 오셨군요?! 어서 제게 포승을 걸어주세요 뇌옥에 들어가겠습니다!”

“…어, 언 공자? 얘 왜 이래요?”

저 질문에 답을 해주려면 우선 눈물과 콧물을 흘리고 있는 저 지방 방송부터 꺼야 한다.

‘아니 하성아 너는 근데 느그 누님 슥삭 하려고 사람 썼던 녀석이 그 치맛자락이 그렇게 붙잡아지냐?’

제놈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누나 밀어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면서?

아무튼 나는 지난 반 각 동안 은하성의 몸에 깊이 새겨놓은 명령어를 내뱉었다,

“하성 올빼미 차렷!”

“힉!”

그러자, 은하성이 자기도 모르게 샥!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망부석이 된 듯 부동자세를 취했고.

그에 은하연의 입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어, 어떻게?”

“이 댁 공자님이 비동을 찾아오셨는데 예의가 조금 부족하시기에, 내 소저의 얼굴을 봐서 잠시 예절교육을 시켜 드렸는데 효과가 너무 좋았나 봅니다.”

“???”

그렇게 둘러대는 말로 운을 뗀 내 모습에 은하연은 눈을 크게 뜨며, 뭔 소린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곧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당면한 상황을 빠르게 봉합하기 시작했다.

“집법당에서 나온 분들은 우선 성휘당주의 신변을 확보하세요.”

“예!”

“누, 누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면한 상황이 봉합되자.

“…다 끝난 건가요?”

“끝이나고 자시고가 없습니다. 성휘당주가 제 손으로 포승을 쓰던걸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북록에 같이 계셨었으니 대충 아시겠지만, 지금쯤 저 아이를 은휘상단의 후계자로 미는 사람들의 귀에도 이곳 소식이 들어갔을 거예요. 창휘당으로 가요. 그편이 제가 공자를 지키기가 편합니다. 자초지종은 거기서 들려주시는 걸로 해요.”

“뭐 그럽시다.”

그렇게 창휘당으로 옮겨온 나는 우선 뜨끈한 물에 목욕을 한 뒤, 마련된 깨끗한 의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오자마자 은하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별이 왔는데, 나는 그 기별에 즉시 응해 은하연 앞에 앉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은 표두도 올빼미가 어떻고 제식 교육을 우리도 도입해야 한다면서 침을 튀기던데…. 솔직히 말해서 너무 흥분 상태셔서 반절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간의 자초지종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이오.”

* * *

굳이 숨길 것은 없었다.

상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결국 이해관계.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은하성을 참교육한 일은 은하성을 밀고 있는 대부인과 숙부라는 양반의 세력 외에는 모두가 내심 반길 일이었으니까.

하나, 은하연에게만큼은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알려야 했다.

사실 나야 이 장원에서 잃을 게 없다.

‘정말 최악의 경우에도 식객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정도?’

그마저도 은하연의 신뢰는 남겠지.

그러니 이 일의 뒷수습은 오롯이 은하연의 몫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사실 관계는 정확하게 알려줘야지.

하여, 나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담백하게 시간 순서대로 일련의 일들에 대해 말했다.

아, 물론 아주 약간의 조미료는 쳤다.

북록에서의 사건 이후로 내력이 속에서 꼬여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동에서 그걸 풀려고 했는데 밖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하는 정도?

이 정도는 솔직히 조미료라고 할 수도 없지 뭐.

“…뭐. 그렇게 된 거요.”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은하연은 고개를 주억이며 싱긋 웃었다.

“잘하셨네요.”

“잘하기는. 따지고 보면 혈기를 못 참고 앞뒤 안 재고 싸움을 벌인 것에 불과한데.”

“으음. 글쎄요? 공자께서 앞뒤를 안 재시는 성격은 아니실 것 같은데요? 그러셨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대는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소. 장사꾼이 맞긴 한 거요?”

“그렇다면 공자께서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시는 걸 거예요. 미욱한 몸이지만 제 눈이 틀렸던 적은 없거든요.”

“…근데 왜 북록에서는?”

“…그때는 빼고요. 아무튼 송구하다는 말씀을 우선 드리고 싶어요. 안전한 곳이라 여기시어 제집을 찾아 주셨는데. 폐를 끼쳤어요.”

“사과는 됐고, 이 일이 소저의 전정에 누를 끼치지는 않겠소?”

“전혀요. 애초에 공자께서 나서지 않으셨으면 제가 단죄를 하려고 했거든요. 정당한 방위셨어요.”

그때였다.

그렇게 은하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때.

“!”

“왜요?”

“칼자루 달칵이는 소리들이 들리오.”

밖에서 쩔그럭 소리가 들려온다 싶어 창휘당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돈 밝히게 생긴 중년 사내와 전반적으로 미인상이시긴 한데 묘하게 표독스런 인상의 중년 부인이 또 다른 한 무리의 무사를 이끌고 등장해 각각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창휘당주는 당장 밖으로 나오시오!”

“감히 누가 강남상왕의 용혈의 몸에 손을 대고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가?!”

그리고 그 두 사람 중에서도 표독스런 인상의 중년 부인 쪽.

그러니까 은하성의 친어미이자, 은하연의 새어미 되시는 분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내게 삿대질을 하며 공기를 찢어 갈기는 듯한 고성을 내질렀다.

“뭣들 하는가?! 저 무뢰배를 당장 내 앞에 데려와 꿇어 앉혀라! 감히 은휘상단의 용혈에 손을 대?!”

그 말에 그녀를 뒤따른 무사들이 지체없이 검을 뽑았다.

챙! 챙! 챙! 챙!

하나, 그들은 감히 먼저 움직이지는 못했다.

이쪽에서도 은하연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부인께서는 혈육을 향한 정 때문에 휘상 전체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을 범하시렵니까?”

원작에서 은하연은 문과로 정무학관에 입성했다가, 그녀의 독특한 체질을 알아본 검후의 수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다.

하여, 지금 시점에서는 내공이라고는 일 푼어치도 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은하연의 일갈에는 분명한 서슬 퍼럼이 있었다.

하여, 은하성의 모친이 이끌고 온 무사들이 짐짓 당황하며 발을 떼지 못하는 사이, 은하연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뭣들 하나요? 더 이상 은휘상단의 명예를 떨어뜨렸다가는 이후 공과 과를 논하는 자리에서 모두 칼을 물어야 할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창휘당의 문들이 달칵- 달칵- 열리더니 은하연 쪽의 무사들과 표사들이 채채채챙! 병장기를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그러게요. 튀긴 옥수수만 있으면 딱인데!’

- 옥수수?

‘포도아(葡萄牙)라는 색목인들의 나라가 있는데 거기 상인들이 들여온 작물이 있습니다. 이럴 때 튀겨 먹으면 딱 맞거든요. 언제 한번 해드리겠… 아 못 드시죠 참.’

- …….

아무튼.

그야말로 고무줄을 잡아당긴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양쪽에 흐르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어디로 튈지 나로서도 판단이 서지 않아, 손에 땀이 한 방울쯤 쥐어지려는 찰나.

일촉즉발의 좌중을 갈라지는 날의 홍해처럼 헤치며 상인이라기엔 대단한 풍채를 가진 중년인이등장했다.

“가관이구나.”

강남상왕 은세평.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저자가 휘상의 주인인가 보구나?

‘저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그런 것 같네요.’

- 걸물은 걸물이로다. 무공은 그야말로 맛만 본 것 같은 자가 저만한 위압감이라니.

걸물.

사부님의 말 그대로였다.

오죽하면, 괄괄하던 하성이의 숙부도 낯빛이 하얘지며 고개를 숙였고.

땍땍거리던 하성이의 모친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좌중을 압도하던 은하연도 얼굴에 주눅이 잡힐 정도.

그런데 그 천하의 걸물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가관을 설계한 장본인은 소협인 듯싶은데 아닌가?”

“음. 아마도요?”

“나와 차 한잔 어떤가?”

그리고 내게 차 한잔을 청했다.

강남상왕과의 차 한잔이라.

천하가 금과 은이 없이는 돌아가지 않으니, 이 사람과의 시간을 갖는 일은 세상 사람 모두가 바랄 자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모든 제안은 한 번은 튕겨줘야지.

“제 시간은 좀 비싼데요?”

그런 내 말에 여기저기서 히익 하고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친구 지금 다, 단주님 그러니까 상왕의 제안을 거절한 건가?!”

“아직 거절한 건 아닐지도 모르네, 비싸다고 했으니 여지가 있는 거 아닌가? 따지고 보면 상왕께 상담을 제안한 거라고 봐야지.”

“그건 그거대로 돌았군. 간이 돌았든 머리가 돌았든 둘중 하나는 확실히 돌은 게 분명해.”

하지만 딱 한 사람.

강남상왕 은세평은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마침 잘됐군. 내게 돈이라면 썩어나니. 얼마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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