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2화 (22/444)

제22화. 강남상왕 (2)

- 쯧! 돈 만지는 노랑이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꼭 저런 소리를 하는구나! 에이잉!!

참 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걸물이니 어쩌니 하셨으면서 왜 갑자기 심술이 나셨습니까?’

- 제 놈이 걸물이면 뭐! 제깟 놈이 감히 파천검문의 제자의 도량을 시험해보고 있지 않느냐?! 돈이면 뭐든지 다 되는 줄 아나?! 돈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 거늘! 백 년이 지나도 노랑이들은 여전히 저런 식이구나!

뭐, 사부님이 저러시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면 되냐?’는 은세평의 질문은 일견 가벼워 보였지만 그 진의는 자신의 값어치를 스스로 매겨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 말인즉 내 도량을 시험해 보겠다는 거였다.

사부님께서는 ‘감히 누가 내 제자를 저울질을 하려 드냐?!’는 생각에 사부님께서는 부아가 치미신 것이겠지.

‘매사에 툴툴거리시면서 참 묘한 방식으로 나를 아끼신다니까.’

뭐, 아무튼.

사부님이 역정을 내시는 이유 자체는 이해는 됐다.

‘남의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게 달가울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게 나쁜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야 맨입이 아니니까.’

강남상왕은 비용 지불 의사를 확고하게 밝혀왔다.

보아하니 은휘상단의 사람 중 대부분은 그저 나를 은하연이 백금의 보은패를 준 사람으로 인지하고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는 모양.

하지만, 은세평쯤 되면 내가 정확히 누군지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이건 꽤나 파격적인 대우였다.

‘저, 사부님?’

- 왜 그러느냐?

‘외람된 말씀인데. 사부님께서 고분 속의 진법에 들어 계시던 동안 저희 문파가 휴업을 한 역사가 어언 백 년이 넘었습니다.’

- …크흠.

‘거기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이 제자도 본가에서 쫓겨난 몸이고요. 솔직히 말해서 상왕 정도면 양반입니다. 편견 없이 저울질을 해주겠다는 거니까요. 심지어 돈까지 내고요.’

- 크흐흠. 뭐, 듣고 보니 네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구나.

여기서 문제는 어떤 대답을 통해 시간값으로 얼마를 받아내느냐.

‘적게 말하면 그릇이 작다 할 것이고, 너무 크게 말하면 분수를 모르는 놈이 된다.’

괜히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철학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게 아니다.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은 아니었다.

거기다 내 경우엔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은세평이었다.

대저 은세평이 누구인가?

‘천하 이대 상인 중 하나인 휘상의 우두머리로 장강 이남 상인들의 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

그 말인즉 천하에서 저울질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 강남상왕의 머릿속에 달려 있을 저울 위에 매겨져 있을 내 값어치와 가장 근사한 값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거고.’

어지간한 사람이면 정신이 아득해지기에 충분한 상황.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뭐 자기만 왕 소리 들어봤나?!

나도 왕년에는 무슨 무슨 왕 소리 질리도록 들어봤다~ 이 말이야~!

그랬던 나였기에 은세평 같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들도 숱하게 겪어봤다.

‘이른바 재계의 큰손이라는 양반들.’

남녀노소에 국적이 다른 사람들까지 참 다양하게도 겪어봤다.

하여, 이 순간.

“큰 거 한 장.”

나는 은세평을 향해 씨익 웃으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제 시간을 빌려드릴 수도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 내 말에 좌중에서 다시 한번 조금 전과 같은 엷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허. 저건 상왕께서 정말로 돈을 내셔야 대화를 해주겠다는 태돈데?”

“그러게 말일세. 단주님과 말 한마디 섞어보려고 보화를 싸 들고 이 집 문턱을 드나드는 자가 바글바글한데 되려 돈을 내야 만나 주겠다고? 창휘당주의 귀인이라더니 그 배포 한번 대단하구먼.”

“…근데 말일세, 큰 거 한 장이면 얼마를 말하는 것 같나? 전표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은전으로 한 백 냥쯤 되려나?”

“예끼 이 사람아. 저래 봬도 창휘당주께서 백금테가 둘린 보은패를 드렸다는 분 아닌가? 그런 분께 자네가 가불할 때나 떠올리는 쥐꼬리만 한 잣대를 들이대면 되나? 쩐이 뭔가 쩐이?! 못해도 원보로 쳐야 할걸? 아, 금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허?”

“갑자기 그 허 하는 소리는 뭔가?”

“아니 생각을 해보게, 우리도 나름 상인의 밥을 먹은 사람들인데, 이리 의견이 분분하지 않은가? 이거 저 백금테의 귀인이 상왕께 당신의 도량을 보여보라고 되물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말일세.”

…어.

그렇게까지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흠.

그러고 보니 ‘큰 거 한 장’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던 전생과 달리, 이 시대엔 그런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시대였다.

‘뭐 상관없나?’

하지만 의도한 것보다 더 큰 심상을 던진 상황이 되었을 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 됐다고 봐도 되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순 은세평의 표정이 요놈 봐라 하는 식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그 입이 열렸다.

“줌세. 큰 거 한 장.”

여기까지 왔으면 강남상왕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금액을 주겠다는 이야기.

더 이상 뜸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은세평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자 은세평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어느 순간 몸을 돌려 스스로 ‘가관’이라 평했던 상황을 순식간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시각부로 성휘당의 기능을 정지한다. 휘하의 무사, 표사, 사환들은 즉시 병장기를 내려놓고 내법당의 지시를 따르라, 성휘당에서 보고 있던 일은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상단주전에서 도맡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은세평의 음성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나왔다.

“사, 상공!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대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성휘당은 그저 감히 상왕의 용혈을 건드린 괴한의 신변을 확보하려 했을 뿐이옵니다! 한데 괴한에겐 백지 전표를 끊어주고 성휘당은 그 기능을 정지하신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름 아닌 하성 올빼미의 어머님과 숙부 되시는 분이셨는데.

은세평이 즈려밟으니 본능적으로 꿈틀한 그들이었으나.

그들의 꿈틀거림은 딱 거기까지였다.

“당치도 않은지 어떤지는 전적으로 내가 판단하는 것이오.”

“하, 하오나!”

“조용. 지금 나는 성휘당의 행동에도 최소한의 명분은 있다 생각하여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라오. 그 이상 이의를 제기할 시, 내 장원에서 병장기를 뽑은 죄와 보은패를 가지고 장원을 찾은 은인을 겁박하여 휘상의 명예를 더럽힌 죄를 즉시 물어 반역으로 해석할 것이오. 설마 그걸 바라는 것이오?”

강경한 은세평에 태도에 은하성의 어미와 숙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그러자마자 성휘당 소속 인원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놓았다.

그렇게 삽시간에 상황을 정리해버린 은세평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타는군. 조금 전에 약속한 차 한잔 해야겠으니 소협은 나를 좀 따라와 주시게.”

* * *

앞서 걷는 은세평의 뒤를 따라 단주전에 이르자, 이내 곧 시비가 청자로 된 고급진 모양새의 다기를 들고 들어왔다.

은세평은 그 시비를 물리고 직접 내게 차를 대접해 주었다.

“일곱 번을 우려도 그 향이 남는다는 해남도의 명차일세, 황실에 진상하는 녀석이지.”

쪼르르륵-

- 확실히 향의 은은한 여운이 길게 남으면서도 맛을 해치지 않으니 가히 일품이구나. 천자가 찾을 만하구나.

그 차에서 전해지는 향을 허리춤의 사부님께서는 연신 칭찬하셨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얼어 죽어도 찬 음료를 찾는 이른바 ‘얼죽아파’였던 나로서는 사실 썩 취향에 맞는 음료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아까 약속했던 자네의 시간을 빌리는 삯일세.”

그러나 이렇게 봉투 봉투가 열려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후릅. 차 맛이 참 좋습니다.”

나는 호로록 눈앞의 차를 해치워 버린 뒤.

은세평이 내민 봉투 안에 든 전표를 꺼내 그 안에 적힌 금액을 확인해 보았다.

- 얼마냐?

‘천 냥이네요.’

- 천 냥?! 은전으로?

‘에이, 금전이죠.’

- …금전으로?! 후계자라는 여식은 친구빈가 뭔가 하는 걸 내고 벗으로 삼아 달라더니… 애비는 말 좀 섞자고 천 냥을 태워…?! 저런 호구들이 운영을 하고 있는데 대체 천하 이대 상인 자리는 어떻게 지키고 있는 게냐?!

아니 이 친구들이 제자의 가치를 높이 사고 있구나 하실 대목에서 생각이 왜 그리로 튀십니까?

- …아니. 금액이 너무 크지 않느냐?!

사부님의 말마따나 사실 금액이 좀 크긴 했다.

은하연에게 같은 천금을 받았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건 북록의 난국을 도와준 대가성인 데다, 은하연이 나를 자신의 사람으로 삼아 보겠다는 의지로 지른 금액이었던 데 반해, 이건 그야말로 차 한잔을 함께하는 대가로 받는 금액이었으니까.

뭐, 아무튼.

돈을 받았으면 값을 해야지.

나는 은세평이 내민 전표를 품 안에 고이 갈무리한 뒤.

곧바로 입을 열었다.

“차 한잔을 함께할 동무가 없으셔서 이만한 금액을 주실 것 같지는 않은데, 하문하실 게 있으시면 하시죠?”

“단도직입적이라 좋군. 그럼 내 우선 한 가지를 묻겠네. 얼마 전에 상주부 북록에서 하연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게 소협이지?”

음.

이걸 대답을 해도 되나?

그럴게 당시에 나는 공을 은정길 표두에게 양보했었다.

이곳에 와 오랜만에 그 은정길 표두와 대화를 나눠보니 그때 이야기를 나눴던 대로 후속 처리가 된 듯했다.

은세평은 이미 사실 관계를 대충은 파악하고 묻는 것 같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공식’이 되면 사정이 달라지는 법.

이걸 내 입으로 인정하면 은하연이나 은정길이 곤란해질 수가 있었다.

하여, 잠시 잠깐 고민에 빠졌는데 그런 내 고민을 알아챘는지 은세평이 내 우려를 해소해 주었다.

“그때의 공을 은 표두 이름으로 올린 것 때문에 그러는 거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 일로 책잡을 생각은 없어. 오히려 남에게 공을 양보받을 만큼의 인격과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하고 있으니.”

…어.

그건 또 그거대로 은 표두를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은데?

뭐, 아무튼.

그러시다면야 굳이 시치미를 뗄 필요는 없다.

“예. 맞습니다.”

“역시, 그랬군. 하면 소협이 하북 일대에서 위명이 자자한 그 언가의 장남이라는 이야긴데? 그 또한 맞는가?”

위명이 아니라 망나니 소리겠죠.

은세평의 표정이나 어투로 보아 모르고 묻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둘러댈 이유가 없다.

“그리 포장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예. 제가 그 언가의 망나니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은세평의 미간이 묘하게 좁아졌다.

“흠.”

물어온 신원을 확인해 줬건만 이 양반이 왜 저러나 싶었던 나는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있지. 하북에서 귀 열고 다니는 이들은 소협의 이름이 나오면 혀를 차며 망나니라 손가락질을 하는데, 내가 본 소협은 전혀 그렇지가 않으니까.”

“상왕께선 저를 어찌 보셨길래요?”

“나는 자네를 천하에서 가장 저평가 된 잠룡으로 보고 있네.”

뭐, 따지고 보면 전(前)용운이 놈과 나는 그 속 알맹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사부님처럼 나와 진득하게 붙어 있다 보면 전(前)용운과 나는 그 인물 됨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야 있을 것이다.

‘근데 저 은세평 입장에선 그냥 망나니로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이 댁에 와서 내가 한 거라곤 밥 얻어먹고, 술 얻어먹고, 목욕탕이랑 침실이랑 비동 얻어 쓰고, 그러다 ‘은가의 망나니’와 시비가 붙어 묵사발을 만든 것뿐인데?

아무리 예쁘게 봐도 보은패만 믿고 식객 신분으로 주인댁 도련님을 두들겨 팬 망나니 아닌가?

대체 이 양반은 내 뭐를 보고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 나도 모르게 턱을 쓰는데, 계속해서 은세평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소협같이 문(聞)과 견(見), 그러니까 들리는 풍문과 눈으로 본 모습의 차이가 심한 사람을 딱 세 명을 겪어본 적이 있네. 그 셋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아나?”

“글쎄요?”

“한 사람은 관으로 나가 대인(大人) 소리를, 남은 두 명은 각각 강호로 나가 용(龍)과 귀(鬼) 소리를 들었네. 오늘 보니 소협 또한 그런 부류야.”

“과찬은 감사한데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상왕의 울타리에 들어와서 한 일이라곤 하성 올빼미, 아니 성휘당주와 주먹다툼을 벌인 탓으로 은가의 사람들끼리 칼부림 나게 할 뻔한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되묻자.

은세평이 엷게 웃으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벌인 일만 따지자면 그렇겠지, 한데 자넨 일부러 그랬잖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는 그쯤 하게. 자네의 행보에는 일관성이 있었네. 본인을 철저히 숨겼고, 그러는데 필요하다면 오명을 쓰는 길도 마다하지 않았지. 북록에서의 일도 그랬고, 오늘 일도 망나니라는 평판을 역이용해서 하연이의 역성을 들어준 것일 테고.”

과연 강남상왕.

그 별호를 노름으로 따신 것은 아닌 모양인지 예리하기가….

“아마 진주언가에서 내쫓긴 것도 일부러 오명을 뒤집어서 썼을 테지, 무엇을 위해 그러는 건가?”

…예?

아니 왜 잘 나가시다가 결론이 영 이상한 곳으로 빠지시죠?

그 별호 설마 노름으로 따셨습니까…?

“뭐, 이건 물어본다고 답을 해주지는 않을 테지, 나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자네에게 투자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네.”

어.

근데 나쁠 것 없어 보이네?

그럼 그냥 그런 것으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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