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강남상왕 (3)
나에 대하여 약간의 오해를 한 듯한 강남상왕 은세평.
그는 그런 오해를 바탕으로 나를 향해 계속해 몇 가지를 질문을 던져왔다.
“하연이는 소협에게 은휘상단, 정확히는 본인이 지휘하는 창휘당에 들어와 달라는 청을 했겠지?”
음.
이번에 재회하고 나서 해온 부탁은 성질이 좀 달랐다.
하지만 처음의 제안은 확실히 그랬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은세평은 계속해 물음을 이었다.
“창휘당의 당시 자금 사정에 하연이 녀석이 벌려 놓은 일들을 역산하면 대략 소협에게 제시한 금액은 대략 금전 천 냥 언저리였을 것이고?”
귀신이네 귀신이야.
은세평의 예측이 정확했기에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고개를 주억이자, 은세평의 입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쯧. 미숙한 녀석 같으니라고. 경황이 없었다고는 하나 휘상을 이어받겠다는 녀석이 고작 그 정도 제안이라니.”
골똘한 표정의 은세평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내가 아닌 단주전 너머 창휘당이 있는 방향.
그로 말미암아 짐작해 보면, 은세평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향하는 대상은 내가 아닌 은하연이었다.
그런 은세평의 음성에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미숙하다고?’
뭐, 전후로 원작의 은하연에 비해 미숙한 부분이 있다고 나도 생각을 하긴 했지만, 당시의 제안 자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쁘지 않았다.
누구라도 은하연과 같은 상황에 부닥쳤었다면 해봄직한 제안이었고, 실제로 내 예상보다 많은 금원보에 ‘오!’ 하기도 했고.
‘가만 보면 강남상왕이 내게 대는 잣대에 비해 은하연에게 대는 잣대가 많이 박하신 것 같은데?’
뭐, 강하게 키운다. 그런 것 같긴 한데.
어쩐지 좀 전에 은세평이 창휘당에 나타났을 때 묘한 주눅이 잡혔던 은하연의 모습이 떠오르며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말해보게.”
“…그, 은 소저에게 대시는 잣대가 너무 박하신 것 아닐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거창하게 이유랄 게 있나.
“본디 거래란 게 상호간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계속해보게.”
“이렇게 차 한잔하는 자리에 금전 천 냥을 태우시는 상왕의 배포에 비하면 당연히 비할 바가 아니지만, 당시 은 소저가 제게 제시한 천 냥은 따지고 보면 표행비에다 위험 수당이 포함된 소정의 감사비 명목이었습니다. 부담 없이 받은 것치고는 확실히 혹할 만한 금액이었었고.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당사자인 내가 만족했다는데.
그런데, 여기서 은세평이 검지 손가락을 흔들며 나왔다.
“자네가 말한 건 보통의 장사치가 품어야 할 거래관일세. 휘상을 이끌고자 하는 자라면 있는 것뿐 아니라 없는 것까지 끌어와 팔아먹을 줄 알아야 하지. 하연이는 그런 부분에서 특히 부족함이 많네. 빚을 지는 것과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무튼 겸손 떨 것 없네.”
아니, 천금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혹할 금액인데 그게 왜 겸손이 되지?
“소협이 언가의 장남이면 그 외조부가 산서상인의 으뜸이신 태원금붕(太原金鵬)이시라는 결론이고, 뜻하는 바가 있어 오명을 뒤집어쓰고 가문까지 등진 위인이 고작 천금에 혹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 작중에서 언용명의 조부가 휘상을 이끄는 은씨와 더불어 중원 이대 상인으로 꼽히는 산서상인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노괴였다.
- …산서상인? 태원금붕? 네 외가 쪽이 태원이가더냐? 그 산서상인들을 이끄는?
…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근데, 사부님 시절에도 산서상인의 우두머리가 태원이가였습니까?’
- 그렇다마다. 내 시절이 무엇이냐?! 태원의 이가라 하면 천명까지 받아본 가문이거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놈아! 그런 것 같습니다는 뭐가 그런 것 같습니다냐?!
‘?’
- 인석아! 그런 건 빨리 이야기를 해줘야지! 내 네 녀석의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상인의 것인 줄도 모르고 노랑이 놈들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더냐?!
‘…뭔, 미안하다는 말씀을 그렇게 역정을 내면서 하십니까?’
- …그야. 미안하니까!
‘사부님과 저 사이에 그런 걸로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나도 진심으로 까먹고 있기도 했고.
‘이걸 잊고 있었네.’
무의식적으로 언용명을 아우가 아닌 작중 인물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던 데다, 집을 나오며 사부님께 집중한다고 황하 이북의 사정에는 완전히 신경을 끄고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쁠 건 없었다.
그걸 잊고 있었던 덕분에, 내 태도가 은세평에게는 겸손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으니까.
‘참, 그러고 보니 식구들은 잘들 있나 모르겠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머니나 용명이 감 총관 같은 사람들은 제법 따듯한 구석들이 있었는데.
그때였다.
그렇게 내가 갑자기 불거져 나온 외가 설정에, 잠시 떠나온 진주언가를 떠올리고 있는 이때.
은세평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때 하연이가 했었어야 할 제안을 내가 지금 하겠네.”
오.
큰 거 오나?
“소협의 나이와 근래 강호의 젊은 후기지수들의 추세로 미루어 짐작건대, 소협도 정무학관이나 소림의 부속 학관에 입관할 준비 중이겠지?”
“맞습니다.”
“내 집을 찾은 이유도 그 준비를 좀 더 윤택한 환경에서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고?”
“그것도 맞습니다.”
“가문을 등지고 망나니란 오명을 뒤집어 쓴 상태로 그런 곳에 입관하면 가시밭길이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 품은 뜻이 있을 테니 가려고 하는 것이겠지.”
…어.
이건 사실과 다르지만 그냥 넘어가는 걸로 하고.
“그러니 나는 은휘상단에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다만 훗날 소협이 상인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오거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의탁할 곳이 없어진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우리 은휘상단과 이 은세평이를 떠올려주면 되네.”
확실히 은세평의 제안이 은하연의 그것보다 세련됐다.
은세평은 내가 지금 어디 메일 생각이 없다는 걸 꿰뚫고 좋은 인상을 남겨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것이었으니까.
나로서는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제안이었으니 당연히 나쁠 게 없었다.
다만, 세상만사 거래를 트면 일단 한번은 밀어 봐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기에, 혹시나 찔러보자는 심산으로 나는 한마디 말을 더 뱉었다.
“근데 거래치고는 오가는 게 없는데요? 아, 이 차 한잔하자는 데 들이신 금전 천 냥에 포함돼 있었던 것일까요?”
“그럴 리가 있나, 그건 말 그대로 자네의 시간을 내가 빌린 삯이고.”
“예? 그럼 뭐가 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찔러보기에 너무 큰 월척이 딸려 나왔다.
“그 대가로 나는 담천약수(曇天藥水)를 구해주지.”
예?
뭐요?
담천약수요?
* * *
미래 인류의 꿈이 생명 연장이라면, 무림인들의 꿈은 내력 증진이다.
내력 증진의 정도는 심법을 익혀 자연에 녹아 있는 기를 정제하여 단전에 쌓는 것이다.
하지만 먹어서 응원…이 아니고, 영약이나 영단을 먹어서 쌓는 법도 있다.
물론, 먹으면 먹는 대로 무한정 내력이 쌓이는 것은 아니라 그 한계가 분명하다.
거기다 여러 주의 사항도 붙는다. 이미 섭취한 영약이 있다면 상극인지 어떤지를 살펴야 하고,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므로 휴약 기간 같은 것도 신경 써야 한다.
담천약수는 무림학관의 검술천재의 설정상 내력을 품고 있는 영약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약을 먹을 때 신경 써야 하는 것 중 휴약 기간을 줄이는 데 특효였다.
‘원작의 약선이 이르기를 막힌 혈을 풀고 나이를 먹어가며 자연히 체내에 쌓이는 독소를 삭히며 몸 안에 잔존 내력이 있다면 그것의 흡수를 돕는 성질을 가진 약수라고 했었지?’
주인공인 정현이 천 년 묵은 구렁이의 독혈을 빨아서 사경을 해맬 때 등장해서 독혈은 싹 날려버리고 보혈만 흡수할 수 있게 도왔었다.
그때의 정현만큼 급박하진 않았지만, 상황 자체는 비슷했다.
만박보심단의 잔여 내력이 잔뜩 남아 있는 나로서는 구할 수만 있다면 꼭 구하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다만 당장 사기에는 너무 비쌌고, 직접 구하기엔 원산지가 너무 멀었을 뿐.
근데 은세평의 이야기는 사실상 그걸 그냥 준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확실히 군침이 싹 돌기는 한데.’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좋은 제안이라 내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그런 내 모습에, 은세평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싫은가?”
“그럴리가요. 다만….”
“다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데, 상왕께선 너무 멀리 보시면서 너무 과히 베푸시는 거 같아서요. 제 경험에 의하면 보통 이러면 뒤에 꼭 독소 조항이 따라붙더라고요?”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어지간한 자라면 벌써 덥썩 물고도 남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뭐, 맞네. 내 소협에게 작은 부탁을 하고자 하네. 아마, 독소 조항까지는 아닐 걸세. 그러니 일단 들어보겠나?”
* * *
은세평과의 담화를 마치고 단주전을 나서자, 근방에서 서성이고 있던 은하연이 나를 맞았다.
“언 공자!”
“…예서 지금까지 기다린 거요?”
“제 손님이시니까요. 아무리 공자께서 승낙하셨다 하더라도 제가 보기엔 아버님의 행동에는 강제성이 있으셨어요. 공자께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랬다간 제 신의에도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리고….”
“구구절절 그렇게까지 이유를 늘어놓지 않아도 되오. 뭐, 별일은 없었소. 그저 작은 부탁을 해 오시더이다.”
“부탁이요? 아무리 아버님이라도 제 손님이고, 보은패를 들고 오신 귀인인 이상 함부로 고역을 맡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혹여 내키지 않는 일을 하시기로 하셨다면 소녀가 아버님께 그 약조를 파기하시라 고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좋다고 하기로 한 것이니.”
“그, 그러신가요?”
은세평의 부탁을 수락한 사람은 나였지만, 은하연 또한 그 부탁의 당사자였다.
나는 더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은세평이 내어준 두루마리를 은하연에게 건넸다.
“…음음? 이건, 저희 상단 본단의 신입 사환들과 표사의 명단인데요? 신장과 치수들도 함께 적혀 있네요? 혹시 아버님께서 언 공자께 그들의 훈련을 부탁드린 걸까요?”
그 두루마리를 받아든 은하연은 단박에 은세평의 제안을 파악했다.
“그렇소, 성휘 당주?”
“하성이요?”
“맞소. 그 친구의 성질머리를 고쳐보려 은가의 힘으로 초빙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불러도 고치지를 못했는데, 오늘 같은 모습은 처음 보신다며 내게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젊은 사환들과 표사들의 교육을 좀 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하시더이다. 내겐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오.”
“아. 그랬군요. 확실히 그럴만 하기는 하네요. 보수나 대가도 확실히 보장을 받으신 것이겠지요?”
“물론이오. 대가는 확실하게 지급하시기로 하셨소, 그러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 어차피 정무학관의 무과를 준비할 것이라 체력 훈련은 따로 할 참이었는데 함께할 이들이 생기면 덜 외롭잖소?”
“한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요. 여기 이 치수들은 그 교육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은휘상단의 표사들이 입는 무복을 봤는데, 내 교육 방식과는 조금 맞지가 않소. 소매가 너무 펄럭거리고 너무 하얗달까? 땅도 기고 산도 타고 해야 하니 소매도 좀 줄이고 소재도 좀 더 질기고 칙칙한 개구리가 연상되는 색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땅도 기고 산도 타고. 확실히 질긴 옷감과 때가 덜 타는 색감을 고르는 게 좋겠네요.”
“상왕께서 이르시길 훈련용 의복은 소저에게 말하면 도와줄 것이라 하시던데, 내 창휘당에 가자마자 지필묵으로 시안을 그려줄 테니 그대로 준비를 좀 해주시오. 소저 본인 것과 성휘당주의 것까지 포함해서.”
“알겠… 예? 누, 누구 거를 포함하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