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강남상왕 (4)
시대를 막론하고 앞으로 조직을 떠받쳐 나가야 할 인재들을 교육하는 일은 중요하고도 시급한 화두에 속한다.
게다가 강남의 모든 산물과 금은이 통한다는 은휘상단쯤 되면 물자나 금력은 걱정할 것이 없다.
하여 내가 나서는 교육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고작 하룻밤 사이 창휘당의 뒤편의 대연무장에 호국, 아니 호단요람(護團搖籃)이라는 글자가 용사비등한 필체로 수 놓인 현판이 금세 내걸렸고.
“생각보다 잘 어울리시는군.”
주로 돛에 쓰는 질긴 천에 암녹색으로 물을 들인 훈련용 무복 또한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그, 그런가요…가 아니라. 그런데 언공자.”
“?”
“제가 공자께 여쭐 게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시오.”
“…그, 제가 이 교육을 꼭 받아야 할까요? 어제 말씀에도 땅을 기고 산을 탄다고 그러셨고, 이 무복이나 마련해 달라고 하신 모래주머니와 납덩이나 쇳덩이 같은 것들이 모두 신체 단련에 사용하는 것들 같아서요.”
“소저도 정무학관에 입관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 않았소?”
“그야 그렇지만 저는 문과에 응시해서 군사(軍師)학이나 재경(財經)학 쪽으로 공부를 할 예정이었는데요?”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정무학관에 입관하여 검후의 눈에 들게 되고 본인도 검에 눈을 뜨며 그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다.
나라는 존재로 인해 이런저런 나비 효과가 생기긴 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은하연이 지닌 체질과 잠재력이 사라질 리는 만무하고.
검후의 성정과 그녀의 무공이 바뀌었을 리도 없으니 당장엔 저런 의문을 갖더라도 결국 나중에는 내게 고마워할 것이다.
‘근데, 지금 원작이니 미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할 수는 없단 말이지.’
하지만 돌려줄 말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론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아니겠소?”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도검의 날이 상인이나 군사라고 피해 가는 건 아니지 않나? 소저도 북록의 일에서 겪어봐서 잘 알겠지만, 강호에서 살아가려면 위급 시에 제 한 몸 빼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갖추는 게 좋소.”
“…그것도 그렇네요.”
그리고 여기서 은하연의 성격을 고려해 약간의 자극을 더해주면 된다.
“정무학관에 입관하면 어련히 가르쳐 주기야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정무학관은 거의 모든 것에 등위를 매기고 그렇게 매긴 등위를 최종적으론 정무연감(正武年鑑)이라는 책으로 엮어 천하에 공개하지 않소?”
“……!”
“평생 붓대와 주판만 굴린 기초 체력도 갖추지 못한 몸으론 분명 몸을 쓰는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할 거요. 그렇게 몸을 쓰는 과목을 죽쑤고 나면 절대로 높은 등위를 차지하지는 못할 거고. 뭐, 선택은 소저의 몫이오. 내키지 않는다면 빠져도 나는 상관없소.”
“…공자의 말이 다 맞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잘 생각했소. 어제 하성이의 꼴을 보고 소저가 겁을 좀 먹은 것 같소만, 그건 당시 하성이 녀석의 사람됨이 너무 부족했기에, 내 예절 주입이 좀 과해졌던 감이 있소,”
“그, 그런 건가요?”
“그렇소. 게다가 소저와 나는 친구비로 맺어진 벗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소.”
뭐, 피가 좀 날 수도 있고.
알이 밸 수도 있고.
때때로 이가 갈리긴 하겠지만?
“…고, 고맙네요. 아무튼 무슨 말씀이신지는 이해했어요.”
뭐, 아무튼.
그것으로 설득은 끝이었다.
은하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손에 들고 들어왔던 목함을 나를 향해 내밀었다.
“따로 주문하신 것은 여기 있어요.”
“오. 이게 벌써 완성이 됐소?”
“예. 무두장이들에게 그려주신 시안과 똑같이 만들라 하긴 한 건데, 애초에 모양과 색감이 독특해서 공자께서 생각하신 것과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시안과 똑같이 만들었다면 맞게 만든 것일 거요. 소싯적에 그림 좀 그린다는 소리까지 들어봤으니.”
“예. 그럼 제 용무는 끝났어요. 저는 그럼 이제 연무장으로 가서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랑 함께 서 있으면 될까요?”
“그리하시오. 나는 교육관으로서의 채비를 마친 뒤 금방 나갈 것이니. 아!”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이 호단요람에선 나이도 본래의 계급도 직급도 없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좀 전해주시오. 아마 강남상왕의 따님이자 창휘당주인 소저가 그 무복을 입고 그 말을 한다면 전달력이 좋을 것 같소. 소저 본인도 그 말을 명심해 주시고.”
“알겠어요.”
그렇게 은하연을 호단요람의 교육관실에서 내보낸 나는 얼른 목함을 열어 안에 든 물건을 얼른 꺼내 보았다.
“오. 잘빠졌는데?”
- 그 목에 거는 것은 구조가 목관 악기의 그것과 같아 보이는데, 시뻘건 그건 형태가 참 묘하구나. 머리에 쓰는 것이냐?
“예. 바로 맞추셨습니다.”
은하연도 그렇고, 사부님도 그렇고 처음 보는 빨간 모자의 형태와 색감에 저런 반응들이긴 했지만, 뭐, 따로 주문했다고 하여 그리 대단한 것을 주문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주문한 것은 K-교관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빨간 모자와 호각이었으니까.
- 이마 가리개는 길쭉하여 꼭 차양이나 처마 같은 것이, 색은 또 시뻘겋고. 거기에 마귀의 형상까지 새겨 붙여 놓으니 강렬하기 그지없구나. 꼭 귀신을 잡을 때 쓰는 제구(祭具) 같은데?
음.
귀신을 잡는 병사들도 이런 모자를 쓴 사람 밑에서 굴러졌을 테니 사부님의 말씀도 영 틀린 말은 아닌가?
아무튼 누굴 본격적으로 굴릴 때는 이걸 써줘야지.
나는 교육관실의 한편에 마련된 면경에 모자를 쓴 모습을 비춰보며 씨익 웃었다.
“제법 태가 나네. 옛날 생각 나는데?”
- …나이도 몇 살 안 먹은 녀석이 무슨 생각을 떠올리길래 옛날을 들먹이며 그리 사악한 미소를…? 네놈은 대체 나를 만나기 전에 뭘 하고 다닌 것이냐?
* * *
은하연이 가져다준 훈련용 무복에 빨간 모자까지 착용을 마친 나는 호각을 챙겨 교육관실을 나와 연무장에 마련된 단상 위에 올랐다.
‘둘넷여섯여덟열. 열 명씩 다섯 줄에 하성이도 얼굴이 퉁퉁 부은 와중에 왔고, 은 소저도 있으니, 음 다 왔군.’
그렇게 단상 위에 오르니 모여 있는 인원들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그 인원들의 수가 어제 오늘 확인한 명단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나는 그대들을 은휘상단의 정예 사환 혹은 정예 표사로 거듭나게 도울 교육관이다.”
그런 내 목소리에 찾아든 잠시간의 정적.
나는 그 정적을 헤집으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앞서 창휘당주 은하연 소저께서 이야기를 했겠지만, 이 호단요람에선 나이도 계급도 직급도 없다. 오로지 나와 그대들 간의 상하만 존재할 것이니 피차 통성명은 없는 것으로 할 것이다. 지금 입고 있는 무복의 왼편에 적힌 숫자가 그대들의 성이고 올빼미란 말이 이름이 될 것이다. 혹 질문이 있는 사람 있나? 없다면 모두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가죽 가방들을 짊어진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곳에 모인 이들에겐 아마 강남상왕 은세평의 인장이 찍힌 명이 내려갔을 거고, 또 그 용혈 중 하나인 은하연이 내 말에 따라 미리 언급을 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은하연 본인과 남은 용혈인 은하성이 같은 훈련용 무복을 입고 오와 열을 이루고 있으니, 이 대목에선 보통 묵묵부답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여기 비정상적인 인물이 있었다.
“여기 있소이다~.”
처음부터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던 무리가 있었는데 개중에 한 녀석이 건들건들거리며 손을 들었다.
- 저놈 저거 말하는 본새 좀 보거라?!
그런 녀석의 모습에, 허리춤의 사부님에게서 곧바로 혀 차는 소리가 울려왔지만, 나는 어디 들어나 보자 싶어 입을 열었다.
“삼십일 번 올빼미는 질문을 해보도록.”
“우선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소! 내 이름은 섭룡호요! 삼십일 번 올빼미가 아니라!”
“계속해 보도록.”
“솔직히 내가 왜 그쪽의 말에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소. 특별 교육을 진행한다 하여 오기는 왔소만, 교육관이라고 나선 당신은 딱 봐도 나보다 연배가 아래로 보이니 명표사나 명상인으로 이름난 상계의 선배님은 아닐 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무림맹 쪽에서 나온 간사도 아니지 않소? 애초에 서로 간의 통성명은 생략하자는 것 자체가 내놓을 만한 별호 하나가 없어 본인에게 자신이 없다는 것일 테지. 그런데 내가 왜 그쪽의 말을 들어야 하오?”
“나야말로 삼십일 번 올빼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
“뭐가 말이오?!”
“분명히 강남상왕의 이름으로 명이 내려갔을 텐데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그대는 상왕의 명에 죽고 사는 은휘상단의 일원일 텐데?”
“그건 그렇소만, 상왕의 눈과 귀를 누군가가 가렸다면 이야가 달라지지 않겠소? 예컨대 거기 앞에 계신 창휘당주님 같은 분 말이오!”
그런 섭룡호의 음성에 사부님께선 계속해 역정을 내셨다.
- 아니 저놈은 뭔 신입 표사 훈련을 받으러 나온 주제에 제깟 놈이 뭐라고 강남상왕의 눈과 귀가 가려졌다 어쩐다 소리를 하는 것이냐? 천둥벌거숭이도 저런 천둥벌거숭이가 없구나!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저리 뻗대는 거죠.
‘딱 봐도 천자문만 간신히 뗀 관상에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자 같은데, 저런 소리가 본인의 생각일 리 없죠.’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한껏 의기양양해진 섭룡호는 주변의 호응을 유도함과 동시에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은하성을 향해 입을 여는 것으로 내 추론을 확인해 주었다.
“아니들 그렇소?! 이 훈련은 취소되거나 당초에 예정되었던 대로 성휘당주님의 지휘 아래 진행되어야 하오이다!”
“맞소!”
“옳소!”
그런 섭룡호의 음성에 나는 은하성을 향해 가늘고도 예리한 시선을 보내보았다.
‘니가 그랬니?’
교육대장은 또 한 번 실망했다.
그런 내 눈빛에.
은하성은 ‘흠칫!’ 하더니 급히 차렷 자세를 취해 보이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제 생각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아니야?
그럼 뭐 어머님 쪽이겠네,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그보다 은세평이 왜 내게 이런 부탁을 했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섭룡호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 녀석들이 대충 삼 할쯤 되나?’
젊은 표사들 중에 천지 분간 못 하고 창휘당과 성휘당 양당의 고래 싸움에 낑긴 친구들 정신 좀 차리게 해달라는 거였다.
‘삼 할이면 모조리 날려 버리기엔 너무 많고, 그렇다고 그대로 안고 가기엔 부담이 되는 숫자니까. 좀 고쳐 쓰게 도와달라 이런 말씀이지 뭐.’
뭐, 어려울 것은 없었다.
저 몸들이 구르고 굴러 일백 번 고쳐 굴러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상태가 되면 그런 생각들은 전혀 나지 않게 될 테니까.
아, 물론.
그 교육 과정에 태클을 걸고 있는 저 천둥벌거숭이에게는 특별 예절 수업을 실시해야지.
나는 쓰고 나온 붉은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삼십일 번 올빼미는 단상 앞으로 나온다. 실시.”
그런 내 말에.
섭룡호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더니 내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이죽거렸다.
“하! 나오라면 못 나갈 줄 아는 것이오? 합비 일대에서 소호철권(巢湖鐵拳) 섭룡호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이리 뻗대시다간 그 골통이 가루가 될 것이오. 좋은 말로 할 때 그쪽ㄷ….”
나는 가볍게 역천의 심법을 운용하여 그런 섭룡호의 면상에 주먹을 한 대 꽂아주었다.
빡!!!!!!!!!
“나오라면 빨리빨리 튀어나올 것이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철권이라더니 얼굴은 철이 아닌가 본데?!”
그것으로 상황 정리는 끝이었다.
“……?”
“???”
“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서, 섭 표사가 일격에 나가떨어진 건가? 합비 일대에서 권사로 이름나서 상단에 특별 채용된 섭 표사가…?”
“그, 그런가 본데? 손이 안 보였어서 잘 모르겠네, 자네 눈에는 보였나?”
“내 눈이라고 다를 게 있나, 나도 못 봤네.”
한 두 마디씩 떠들어대니 어수선한 와중이었지만, 좌중의 기세만큼은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정돈된 상황.
나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재차 입을 열었다.
“또. 질문 있는 올빼미가 있나?”
그에 가장 앞에 있던 은하성이 가장 먼저 답을 내놓았고.
“없습니다!”
“대답이 왜 한 사람뿐이지?”
내 채근에 다른 이들 또한 한목소리가 되어 우렁차게 외쳤다.
“없습니다앗!!!!!!!!!”
“없다면 모두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가죽 가방을 짊어진다. 그리고 황산(黃山)의 최고봉 연화봉(蓮花峰)을 찍고 온다. 실시!”
“시, 실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