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학관 가는 길 (2)
호단요람의 수료식이 끝났다.
나는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곧바로 짐을 싼 뒤, 정무학관이 위치한 호북성 단강구를 향해 길을 잡아 걸음을 옮겼다.
호북성 단강구는 무당파의 근거지인 무당산과 제갈세가의 근거지인 융중산의 가운데에 위치한 정도 무림의 요충지이자, 섬서와 하남으로도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이 즈음하여 그곳을 통하는 은휘상단의 상행단이 있긴 했다.
‘아마 그 상행단과 함께 움직였다면 이래저래 통행 허가를 받아놓은 수로와 관도들을 통할 테니 빠르게 도착하겠지.’
하지만 굳이 그렇게 빠르게 단강구에 도착할 필요성이 없었다.
‘일찍 가봐야 바가지만 쓰지.’
원작에서 묘사되기를 입관 시험이 있을 때의 단강구 일대에는 깃발 하나 꽂을 자리도 없다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쯤 정무학관의 일대는 응시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고, 그렇게 수요가 많다면 입고 먹고 자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에 바가지가 붙을 터.
그렇다면 굳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쉬엄쉬엄 수련해가며.’
이따금씩 산천초목도 구경해가며, 시험 일자에 딱 맞추어 도착하는 게 제일이지!
“공자! 구름을 보니 곧 비가 올 것 같아요! 지도에는 여기서 조금만 남쪽으로 가면 강변 마을이 나온다 되어 있는데 오늘은 그쯤 해서 숙소를 잡는 게 좋겠어요!!”
“입관 시험 치러 가는 길은 그래도 좀 수월할 줄 알았는데, 왜 멀쩡한 마차를 두고 내 다리로 걸어야 하는 건데에에에?! 그리고 팔다리에 찬 이 쇳덩이는 도대체 언제쯤 벗어날 수 있는 거고오오?! 어우 무거워 죽겠네! 아오! 용운형님! 이 적모광견(赤帽狂犬)같으니! 내가 언젠가는 진짜!!”
물론, 쉬엄쉬엄 가겠다는 최초의 계획을 세울 때는 혹이 두 개나 붙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 * *
내게 붙은 두 개의 혹 중에 은하연 쪽은 쓸모가 약간은 있긴 했다.
두 발로 걸으며 강호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은하연이었지만, 상행을 이끌어 본 경험은 있어서 천기의 흐름을 살피는 능력과 지도를 읽는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었고.
“숙박에, 요리, 저녁에 목간물 덥혀드리는 것까지 해서 은자 반 냥이오.”
“너무 비싸요. 요리는 우리가 할 테니 그 절반으로 하죠.”
“쳇. 물정 모르는 아가씨는 아니시구만. 뭐, 그럽시다.”
이런저런 자잘한 돈거래를 할 일이 있으면 은하연의 상재가 제법 빛을 발하긴 했다.
‘무엇보다도 내 돈도 안 나가서 좋고.’
하지만 무공을 배우지 않은 몸인지라 체력이 좀 약했다.
강남상왕.
그 풍채 좋은 양반의 핏줄을 이은 데다, 애초에 검후의 눈에 든 오성을 가진 은하연인지라 호단요람에서의 받은 두 달여의 훈련만으로도 눈에 띄게 체력이 늘긴 했다.
‘은하연 정도면 이제 평범한 사람의 체력은 충분히 웃돌지.’
하지만 수련의 일환으로 일부러 깊은 산과 가파른 계곡을 찾아 넘고 있는 내 행보에는 솔직히 말해 썩 도움이 되는 인재는 아니었다.
‘지도 보는 거랑 날씨 파악하는 거, 그리고 가격 후려치는 거는 애초에 나도 전공이니까.’
그러니 굳이 이 여정길에 은하연의 힘이 필요한가 하고 누군가가 진지하게 묻는다면 사실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은하성의 경우는 뭐 말하면 입만 아프고.’
그래서 입이 안 아프기 위해 주먹을 사용했다.
“제헝함미다 헝임.”
그랬더니 퉁퉁 부은 얼굴로 솥에 담긴 고기 죽을 저으며 저렇게 징징거리고 있었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아까 지껄였던 말이나 마저 해봐.”
“…제가. 무흔 말흘 했었나효?”
이 새끼 이거.
최초의 참교육과 호단요람의 수료 과정을 통해 사람 좀 됐나 싶었는데, 그렇게 지지고 볶이며 부대낀 시간 동안 제 딴에는 내게 내적 친밀감이 쌓인 것인지, 요즘 들어 은근슬쩍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빈도가 늘었다.
“적모광견이니 언젠가는 육시를 내겠다니 어쩌니 그랬잖아.”
“…유, 육시를 낸다뇨?! 그런 말은커녕 생각도 한 적 없습니다. 그냥 언제가는 까지만 했고, 그것도 끽해야 생일을 맞으시면 축하를 겸해서 한 대 정도는 먹여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 그마저도 당장에는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요?!”
이거 봐라.
몇 대 두들겨 맞고는 아이고 나죽네 거리면서 퉁퉁 부어서 발음이 힘든 척을 하더니.
계속 그러고 있다가는 오히려 불리해질 것 같으니까 총명탕 흡입한 것처럼 청산유수로 말이 나온다.
“말 제대로 할 수 있네?”
“…헤헤.”
“헤헤?”
“…헤헤가 싫으시면…. 하하?”
“하성아.”
“…예?”
“죽을래?”
“자, 잘못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형님.”
“내가 왜 니 형님이냐? 내 동생은 따로 있다. 용명이라는 이름을 쓰고.”
“그, 밖에서는 교관님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요. 그러고 나니, 다른 마땅한 높임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예.”
“하기는.”
“…헤헤.”
“뭐,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니들 나를 미친개라고 부르고 다녔냐?”
“…어…. 잘 못 들었슴다?!”
“잘 못 듣기는 개뿔이 잘 못 들어?! 적모광견이면 빨간 모자를 쓴 미친개라는 소리잖아? 아니야?!”
“…어. 그게 말입니다.”
뭐,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 막 헌터질을 시작해서 급이 안 되던 무렵, 성질 개차반인 팀장을 만나게 되면 나도 미친개니 또라이니 하고 부르곤 했으니까.
“하성아.”
“…예?”
“난 미친개라는 말이 좋아.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해가 간다고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날 미친개라고 부르는 건 참을 수 없다!”
“예?! 그,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 배은망덕한 올빼미 놈들이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줬으면, 아아 고마워라 교관님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교관님의 은혜를 곡조로 만들어서 부르고 다녀도 모자름이 있다 할 텐데, 이놈들은 뒷구녕으로 미친개라고 부르고 다녀?!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에이이이잉!! 이놈아! 이놈아!!!”
하여 나는 가슴속에 치민 화를 국자에 실어 하성이 놈을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골고루 후려치기 시작했는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울상이 된 은하성이 빽하고 억울함을 토해냈다.
“왜 저만 갖고 그러십니까?! 형님 밑에서 구른 오십이 명의 올빼미 중에 그런 생각을 안 한 놈이 없을 텐데! 심지어 누님도 했을걸요?!”
그 바람에 내 시선이 자연스레 은하연 쪽으로 향했다.
그에 은하연이 딸꾹하고 입을 열었다.
“…모,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에요.”
“일단 알고는 있었다는 것으로 들리오만?”
“예. 처음 그런 소리가 들려왔을 때. 바로잡을까 했었는데 혹여라도 공자께서 내심에 품은 복안을 망칠까 저어되어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심에 품은 복안?
내가 호단 요람에서 교육관을 자처할 때 그런 게 있었나?
- 단언컨대 없었느니라.
그쵸?
그냥 빡세게 굴려주기로 강남상왕과 약속을 했고.
또 파천십이보를 익힌답시고 사부님께 굴려지다 보니 나만 이렇게 구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래서 이 좋은 것은 내리 갈궈 길이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건데?
당사자인 나도 모르는 내 복안이 뭐지?
“늘 그래 오셨듯. 악역을 자처하신 것이 아닙니까?”
“음?”
“공자께서는 저희를 정말로 처참히도 굴리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뒤에서 이를 갈았지요. 그런데 그러면서 신입 표사들 사이에 분명하게 존재했던 계파 갈등과 반목이 사라졌습니다.”
“…….”
“편견을 가지고 저를 대하던 이들도 제가 자신들과 함께 공자 밑에서 구른 것만으로 저를 다시 봐주기 시작했고요. 그제야 이 아둔한 소녀는 공자의 큰 뜻을 깨달았습니다. 공자께선 내부의 어지러움은 외부의 적 앞에 정리되고 단결된다는 용인술의 방법을 몸으로 깨닫게 해주려 하셨음을요.”
“……?”
“…아닌가요?”
어쩐지 은하연이 호단요람의 교육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내 말이라면 열 일을 제치고 팥으로 메주를 쒀도 믿을 것처럼 군다 싶더니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쯤 되면 평범하게 투덜거리고 징징거리는 은하성 쪽이 오히려 정상이 아닐까?’
대체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길래 저런 해석이 나오는 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하여, 나는 대충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음. 뭐, 맞소.”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때였다.
그렇게 한번 보는 데 금자 천 냥이라는 은하연의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지켜보며 객잔의 앞마당에서 끓는 고기 죽을 지켜보고 있던 그때.
“형님. 웬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는데요?”
비가 오려는 날씨에는 쉬이 일지 않는 먼지가 멀찍이 인다 싶더니.
딱 봐도 흑도에서 잔뼈 꽤나 굵은 듯한 잡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전, 좌, 우 세 방향을 막았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마빡에 ‘나 흑도 놈이요’라고 써놓은 것 같은 놈들이 바로 내가 이 여정에 은하연과 은하성이라는 혹을 달고도, 굳이 떼지 않은 이유였으니까.
* * *
처음 정무학관을 어떻게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엔 분명 홑몸으로 움직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지금의 나는 부족한 게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부족한 것은 다름 아닌 실전 경험이었다.
아, 물론 보편적인 의미의 실전이야 전생에 물리도록 경험해 보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어디까지나 흑마법사였고.’
검수(劍手) 언용운으로서는 절대적으로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그야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실전 혹은 실전 형식의 대련이다.
근데 문파의 사정상 사숙도 형제도 뭣도 없고, 사부님은 아직 영체를 실체화하시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은휘상단도 무가가 아닌지라 그런 고급 인력을 내게 붙여 줄 수는 없는 상황이라 방법이 없었으니까.
근데 지금의 은하연과 함께 여정을 나선다면?
분명히 굵직한 날파리들이 들러붙을 거고 입관 시험을 치르기 전에 그 실전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네.’
그러니 내 입가엔 미소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뭐, 은하연을 미끼로 삼아 걸려든 작자들로 실전 경험을 쌓겠다는 생각이었기에 툭 까놓고 말해서 도의적이다는 말은 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떳떳했다.
“생각보다 늦었네요.”
“그러게 말이오.”
우선 은하연 본인이 내 생각을 이해하고 스스로 원하여 따라온 터였고.
“두 연놈이 뭘 그렇게 쑥덕이느냐?! 거기 있는 계집!”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네년이 휘상의 은하연이렷다?”
“그런데요?
“이 몸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북록채의 채주였던 방천덕이의 의형이자 구화채(九華寨)의 두령인 완삼석이다. 내 오늘 북록산에서 흐른 의제의 핏값을 받으러 왔다. 순순히 따라나서면 네년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라고 하네요? 언 공자 어떻게 할까요?”
“소저가 따라가면 객잔에 묵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살려줄 것인지를 한번 물어보시오.”
“네놈은 뭔데 옆에서 계속 쫑알거리느냐?! 은씨를 쓰는 계집의 입을 빌릴 필요 없이 인자하신 이 몸께서 바로 답을 주마. 겨울을 나느라 우리 구화채에 찬거리가 다 떨어졌느니라! 사이 좋게 젓갈을 담가 데려가 주는 것으로 하마, 어찌 답이 되었느냐?!”
“킬킬킬킬!! 채주 그러려면 단지가 부족하겠는데요?!”
“그러니 약탈을 할 때 객잔 안의 단지들을 깨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묵고 있는 계집들이 있다면 그것도 상처 안 나게 조심하고.”
그렇게 미끼에 걸려든 놈들이 어쭙잖은 날파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똥파리였으니까.
덕분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허리춤의 회한을 빼 들 수 있었다.
“거, 형제간의 우애 한번 돈독하구려. 의제의 시체가 식은 지 대략 두 달 반 만에 찾아와 주다니. 석삼 형의 사랑에 죽은 방천덕이도 지옥에서 이런 새끼를 형으로 모셨구나 하며 눈물을 흘릴 것이오.”
“…뭐, 뭐라?! 이런 개잡놈을 봤나! 내 이름은 석삼이 아니라 삼석이다!”
“장강에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공들을 붙들고 물어보시오. 그쪽이랑 나중에 누가 개잡놈에 가까워 보이는지. 그리고 석삼이나 삼석이나.”
“…이! 이! 가만 네놈이 바로 그 내 의제를 흥분케 해서 대사를 망치게 한 그놈이렷다?!”
“그놈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소? 아무튼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셨나 본데, 그걸 생이별을 시키는 데 한 팔을 보탠 것 같아 내 마음이 미어지오. 심심한 사과와 함께 늦게나마 동생 곁으로 보내 드리고자 하니, 거 잔말은 그쯤하고 들어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