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28화 (28/444)

제28화. 학관 가는 길 (4)

싸움이 시작됐다.

전면으로 달려 나가는 언용운을 바라보며, 은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안 그래도 사지로 뛰어들고 계시면서, 굳이 산적들을 자극하여 한 명이라도 더 본인이 감당하려 하시는구나.’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도 언용운과 미리 이야기를 나눠 두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고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진법이 담긴 부적.’

이것만 해도 그랬다.

진법이 담긴 부적이라니?!

은하연이 상계에서 살며 주워들은 정보로는 이런 것을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천 년 넘게 진법 연구에 공을 들인 제갈세가(諸葛世家)나 사마세가(司馬世家) 혹은 비슷한 세월 동안 부적과 방술을 연구해온 모산파(茅山派)에서도 극소수였다.

‘기본적으로 밖으로 나도는 물건이 아니야.’

그러니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쉬이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는데, 언용운이 말한 대로 정말로 상대를 느리게 만드는 진법이 이 안에 들어 있다면?

그건 언용운이 여벌의 목숨을 은하연에게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만 제 몫을 할 수 있었어도.’

사실 언용운이 제 몫을 하기를 원한 대상은 은하성이었고.

오히려 은하연은 언용운이 막아 세운 쪽이었다.

그녀는 은휘상단의 표사들이 익히는 독문 무공이나, 안휘성에 제법 이름이 난 협객 혹은 남궁가의 속가에서 스승을 구하려 했는데, 검후에게 배워야 하니 이상한 버릇이 생길까 봐 못하게 막은 사람이 언용운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런 것은 은하연의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벗으로서 언용운에게 미안했고.

그 이전에 상인으로서 부적이 아까웠다.

‘언 공자에게 갚아야 할. 빚이 또 느는구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누님! 옵니다! 박도 든 놈 하나는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동시에 저만큼은 무리예요! 용운 형님이 주신 그거 빨리 찢으세요!”

찌직-

그렇게 은하연은 자신의 나약함을 또 한번 뼈저리게 느끼며, 언용운에게 넘겨받은 부적을 찢었다.

* * *

짝퉁 관우의 머리를 베어 던지며 도발을 시전한 효과(은)는 강력했다.

얼마나 강력했는지, 나름 젠체하며 명군사인 척을 하고 있던 낙방서생의 목에 핏대를 세우게 만들었다.

“금호장군! 흑호장군은 빨리 은하연을 확보하라! 금호대와 흑호대의 병력 중 중군에 남아 있던 병력은 직속 장군을 쫓아 은가의 계집을 확보하라!!”

그런 낙방서생의 일갈에, 마주하고 있던 산적 중 일부가 좌우의 날개를 향해 급히 이동했다.

하지만 나는 한 톨의 신경도 그쪽에 낭비하지 않았다.

그저 내 무위가 심상치 않아 보이니, 빨리 은하연을 확보해서 내가 스스로 칼을 버리게 만든다는 생각의 연장이었을 뿐이고.

때마침 우웅- 하고 상단전에 세월의 저주 특유의 사이한 기운이 전해지는 게, 은하연이 부적을 찢은 모양이었으니까.

- 네 녀석의 방술은 봐도 봐도 신기하구나.

검에 들어가신 덕분에 칼집에 들어 계신 게 아니면 사각(死角)이 존재하지 않게 되신 사부님께서 친히 확인도 해주셨고.

“저, 저놈들이 뭘 하는 것인가?! 왜 그리들 석상처럼 굳어 서?!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가?!”

낙방서생의 얼빠진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그러니 내 신경은 오롯이 전방을 향했다.

낙방서생을 제외하더라도 짝퉁 관공의 머리를 베어 내던진 효과는 강력했다.

“죽일 놈!!”

가장 먼저 사자 수염에 사모를 꼬나쥔 짝퉁 장비(張飛)가 화를 참지 못하고 가장 먼저 덤벼들었고.

“이 창이 미간에 박히고도 네놈이 그리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이어서 내가 아는 조운 자룡(趙子龍)과는 생김새가 판이하게 다른 벌름코의 창잡이가 덤벼들었으며.

“뭣들 하느냐?! 저 주둥이를 나불대는 표사 놈의 목을 베어오는 녀석은 두둑한 은자를 내리고 새로운 오호장군으로 삼을 것이고! 등을 보이는 놈은 이 싸움이 끝나고 남들이 먹고 마실 때, 그놈은 내가 직접 채찍질을 해줄 것이다!!”

관우의 환생이라 믿던 녹호장군이 한 칼에 반분되고, 두 칼에 목만 남은 것을 보고 몸이 굳었던 평산적(?)들도 완삼석의 일갈에 다시금 창칼을 세워 뛰어들기 시작했다.

쌔액!

챙!!!

사방에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찔러 들어오는 병장기.

쌔액!!!

채쟁챙!!!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팔방에서 쏟아지는 살기.

나는 말 그대로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목숨이 위험한 도산검림에 발을 딛은 상황이 되었다.

‘워.’

살벌하네.

살벌해.

내가 왕년에 좀 많이 날리긴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장비빨도 없이, 한 명의 소환수 없이, 검 한 자루 달랑 들고 이런 살기의 틈바구니에 내던져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난 이 상황이 전혀 당황스럽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헐벗고 병장기를 든 다수의 적 속으로 뛰어든 적은 처음이었지만, 어쨌거나 전생에 숱하게 겪어본 생사의 경계를 넘는 경험이 이 와중에도 내가 침착하게 사고를 할 수 있게 했고.

그리고 이런 실전 자체는 처음이었어도, 이제 와서 보니 비슷한 훈련을 사부님과 함께 꽤 해왔다.

‘지금보니 사부님의 가르침은 버릴 게 하나도 없었네요.’

- 에헴. 내가 명색이 검마소리를 들었거늘 네게 도움이 안 되는 가르침을 내렸겠느냐?

‘그렇긴 한데, 그 왜 천재는 좋은 스승은 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 …아니, 묵묵히 하라는 대로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속으로 그런 깜찍한 생각을 했느냐?!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가끔씩은요?’

- …손이 없으니 이거 꿀밤을 먹일 수도 없고! 원통하다 원통해!

검수로서는 초짜였던 나였기에, 솔직히 눈을 가린 상태로 웃통 벗고 탱자나무 숲에서 보법을 밟으라고 하셨을 때나, 연화봉 꼭대기에서 보법을 밟게 하셨을 때는 회한 속에 들어가신 게 새삼 울화가 치미셔서 괴롭히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때 그 훈련은 이런 상황을 예상한 가르침이셨다.

뭐, 아무튼.

사부님의 가르침과 훈련들을 아주 가끔 내심으로 의심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묵묵히 견뎌낸 나였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 창칼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도 거침없이 파천십이보를 밟을 수 있었다.

* * *

파천십이보.

사부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방과 팔방 도합 열두 방향에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투로를 최소한 반보 차이로 앞질러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열두 갈래 투로를 만들어내, 산을 가르는 검이 하늘도 깨게 만든다는 천하제일의 보법.

그 보법을 감당하기에 구화채의 산적들은 솔직히 많이 미숙했다.

“쥐새끼 같은 놈!”

하여, 나를 노리는 병장기들은 번번이 허공을 가르거나.

푹!!!

“켁?!”

“자, 자룡!!!”

제 놈들끼리 찔러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나저나 저 얼굴로 자룡이라니 진짜 양심 없네.

아무튼.

앞선 두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 놈들은?

챙!!!

“보아하니 댁이 장비 역할이신 것 같은데, 맞소?”

“크으잇!!”

“빨리 형님 따라가셔야지 길 엇갈릴라!”

촤악!!!!!!!

파천십이보가 뚫어낸 투로에서 쏟아진 파천검법의 선삼초를 당해내지 못하고 회한에 서린 이슬이 되었다.

“!”

“!?!”

그에, 구화채의 산적 중 내게 덤벼들었던 자들은 염라대왕이라도 마주한 듯 질겁을 하며 샤샤샥- 걸음들을 물렸다.

이 틈을 타, 나는 사부님께 질문을 하나 던졌다.

‘방금은 파천선풍(破天漩風)보다는 파천낙뢰(破天落雷)가 어울렸겠죠?’

- 저 싸구려 장익덕의 사모를 보기 좋게 빗겨냈으니, 굳이 퉁겨내며 가로베기를 내질러 두 합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대로 내리긋는 게 좀 더 세련된 수긴 했겠지. 나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하, 왕년에 낫질하던 게 손에 익어놔서요.’

- 그런 습을 털어내고 적재적소에 파천검법의 선삼초(先三招)를 물 흐르듯 끄집어낼 수 있어야, 비로소 본사초(本四招)를 배울 자격이 되느니라. 정진하거라.

‘옙. 사부님.’

- 뭐, 나쁘지는 않았느니라.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검을 휘두를 수 있는지 끊임없이 궁구(窮究)하는 검을 대하는 네 녀석의 자세로 미루어 짐작건대 금세 본사초에 닿을 수 있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야.

‘…….’

- 뭐. 왜.

‘너무 과한 칭찬에 제자의 버릇이 나빠질까 두렵습니다.’

- 이미 충분히 버릇은 나쁘니, 쑥스러우면 대가리나 긁거라. 엄한 소리 씨부리지 말고.

‘넵.’

뭐, 아무튼 그러고 있는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완삼석과 낙방서생이 수군대는 것이 보였다.

“한의 고제도….”

“…흑도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유비도 서주에서.”

대화 내용을 제대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얼핏 들려 온 한나라 고제가 어땠고 유비가 서주성에서 어쨌고 하는 것과 놈들의 눈알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것 같았다.

‘토낄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구만?’

나는 번개같이 회환의 손잡이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짝퉁 장비가 사용하던 싸구려 장팔사모를 주워 든 뒤, 내력을 실어 밟았다.

빠각-!

덕분에 동강이 나 각각 한 자루 단모와 한 자루 목창이 된 싸구려 장팔사모.

나는 그것들을 양손에 나눠 쥐었다.

입에는 검.

양손에는 창.

‘짝퉁들이랑 부대껴서 그런가? 나도 짝퉁 삼도류가 된 느낌이군.’

그렇다면 이 대목에선 도깨비 참ㅅ!

…ㅜ가 아니고, 나는 파천신공을 가볍게 운용하며 단모와 목창을 각각 완삼석과 낙방서생을 향해 던졌다.

쌔애액!!!

쌔애액!!!!

그에 화살처럼 날아가기 시작한 단모와, 목창.

캥!!!!!

꼴에 녹림칠십이채 중 한 곳을 차지할 만한 무력은 있는 완삼석은 어렵지 않게 도끼로 단창을 쳐냈다.

하지만 낙방서생은 목창을 쳐내지 못했다.

“끄악!!!”

놈은 오른 어깨가 제대로 꿰였고, 나는 입에 물고 있던 회한을 다시 오른손에 옮겨 잡은 뒤.

킬킬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 군사 양반. 내뺄 생각은 마시고, 행여나 그 목창을 함부로 뽑을 생각도 마시오, 대충 부러뜨린 거라 단면이 제멋대로였을 텐데 함부로 뽑으려다간 뒈질 위험이 확 올라갈 테니. 아! 그리고 읽은 서책 중에 의서도 있는가 모르겠는데 사람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도 죽소, 피가 안 새게 잘 틀어막고 있으시오.”

그런 내 말에,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허옇게 질린 얼굴로 꺽꺽거리며 꿰뚫린 자리를 손으로 막는 낙방서생을 무시하고, 그 옆의 완삼석도 무시하고, 나는 나머지 산적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평녹림도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적이 아니오. 보시오. 오호대장군의 공석을 무려 세 자리나 늘려 드리지 않았소?! 그리고 여러분을 버리고 내빼려던 간악한 서생과 졸렬한 석삼이 놈의 걸음을 이리 잡아 드리지 않았소?”

그렇게 운을 떼, 말단 산적들의 가슴속에 불신과 의심의 불을 당겨 놓은 나는 완삼석을 향해 회한을 겨누며 말했다.

“이놈 석삼아! 어딜 그렇게 내빼려 하느냐!”

“죽일 놈! 내 이름은 삼석이다! 삼석!!!!”

“내뺀다는 말에는 반박을 하지 않는구나! 내가 그래도 꼴에 산채의 두령이라고 존댓말을 해줬는데, 네놈은 존댓말이 아깝다! 그러고 보니 검을 섞는 것도 아깝네, 그냥 보내 줄 테니 어디 내뺄 수 있으면 내빼 보거라!”

“진짜냐?”

“오냐. 내 녹림왕에게 친히 투서를 넣을 것이다. 구화채의 잡놈들이 반역을 꿈꾸더라고. 네놈의 요청대로 완석삼이 아니라 완삼석이라고 정자로 써서.”

이 정도 속을 긁어줬으면 덤벼들 것이라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완삼석이 물리던 걸음을 되돌리더니.

거월이라 부르던 큼지막한 도끼를 휘두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끝까지 나를 놀리려 하는구나?! 죽어라 이놈!”

그러자 순식간에 거월을 감싼 녹색 아지랑이가 참격의 형태로 긁어져 나오며 나를 향해 뻗어 나왔다.

쌔액-!!!!!!!!!!!

완삼석 입장에서는 혼신과 분노를 실은 일격이었을 것이다.

하나, 나로서는 기다리던 바였다.

나는 찰나를 알차게 쪼개어 파천십이보를 밟았다. 그리고 회한에 묵빛 검기를 휘감으며 몸을 움츠렸다가.

부웅-!!!

완삼석의 거월에서 뻗어 나온 참격이 내 꽁지 머리 몇 올을 베고 지나갔을 때.

“!”

기지개를 켜듯 오른팔을 뻗어 파천검법의 선삼초 중 찌르기 동작에 해당하는 초식인 파천맹진(破天猛進)을 내질렀다.

푸욱!!!!!!

순식간에 꼬치가 되어버린 완삼석의 머리.

이대로 둬도 구화채의 잔당들이 전의를 상실하기에 딱 좋은 교보재가 될 듯했으나, 사부님께서 싫어하실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검을 뽑아 회한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사부님을 향해 물었다.

‘이번에는 적재적소에 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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