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강남신협 (1)
그렇게 완삼석을 해치운 나는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또 덤빌 사람?”
그런 내 음성에.
챙그랑!
챙그랑!!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산적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마다 쥐고 있던 병장기를 내던지더니 부복을 했다.
은씨 남매가 있는 저쪽 편을 봤는데, 그쪽도 이쪽의 상황을 인지했는지, 똑같이 병장기를 손에서 놓고 부복을 하기 시작했다.
‘더 덤벼도 괜찮았는데.’
조금 아쉽기는 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생사가 걸리는 도산검림을 한 자루 검에 의지해 산책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나쁜 게 아니라 그 순간을 솔직히 좀 즐겼던 것 같다.
하여, 이 순간이 조금 더 이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체질인가?’
하지만 저쪽에서 저렇게 납작 업드려 싸울 뜻이 없음을 온몸으로 밝히니,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들었던 살기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김이 확 샜다.
‘여기서 검을 더 휘두른다면 거기서부터는 학살 혹은 살육이지.’
나는 회한의 날을 옷소매에 슥슥 닦은 뒤 허리춤의 검집에 딸깍- 넣었다.
‘뭐, 그래도 편하기는 하네.’
북록채 때는 목이 터져라 ‘적장 물리쳤다.’를 외치고, 표사들이 돌아다니면서 항복을 권유하거나 도망을 종용해야 했었는데, 이번에는 알아서 무장 해제를 하고 전원이 부복을 했다.
‘역시 무림에서는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주는 게 최고구나.’
나는 그렇게 강호의 순리를 새삼 되새기며 수련에 매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득 부복하고 있는 산적들 중 허리춤에 둘둘 말린 밧줄을 달고 있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와서 입을 열었다.
“야. 너랑, 너랑, 너.”
“저, 저희들 말씀이십니까요?”
“그래. 허리춤에 찬 그거 사람들 묶으려고 가지고 있던 거지? 매듭 좀 묶을 줄 알겠네?”
“그, 그렇습죠?”
“니들이 책임지고 돌아다니면서 너네 식구들 손목 묶어.”
“옙!”
“이따 내가 확인해 볼 건데 풀리면 채주님이랑 장군님들 따라가는 거다?”
“옙!!!”
그러고 있는데, 은하연과 은하성이 내게로 총총 뛰어왔다.
“무사하셨네요!”
“걱정했소?”
“그럼요! 거진 일백 가까이 되는 무리 속으로 뛰어드셨는걸요?”
“다음부터는 그런 걱정 하지 마시오. 소저도 몇 번 봤겠지만, 나는 대체로 지는 싸움은 하지 않소. 질 것 같으면 애초에 피하거든.”
“…거짓말.”
“……?”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공자의 무위와 진법 덕분에 또 은혜를 입었네요. 이미 공자님께 지고 있는 빚이 많은데 매번 이렇게 은혜를 입어서야, 그 빚들을 어떻게 상환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뭐, 열심히 고민해 보시오.”
“그럴게요.”
그렇게 은하연과 말을 나누고 있는 와중에 허리춤의 사부님께서 엷은 한숨을 내쉬셨다.
- …어휴.
‘?’
- 그 대목에선 보통 은혜랄 것까지는 없다 그런 식으로 답을 해야 하는 것 아니더냐?
‘에이, 스스로 마음의 빚을 지겠다는데 굳이 그걸 왜 거절합니까.’
-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어떤 생각이요?’
- 장차 세인들이 파천검문 하면 무엇을 떠올릴지 하는 그런 생각? 네 녀석의 성정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날도둑놈 소굴로 기억될까 두렵구나. 두려워.
참 내.
나는 그런 사부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눈앞의 산적들을 어떻게 할지를 논하기 위해 계속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요놈들은 어떡하면 좋겠소?”
“공자께서는 어찌하고 싶으신데요?”
“흠. 북록채 때야 이래저래 준비도 덜되고, 다른 안배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 거의 다 풀어 줬지만, 일단 죄값은 치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근데 또 산적이란 게 죄질이 천차만별 아니겠소?”
“그렇죠?”
“속이 시커멓게 곯아서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온 놈들도 있을 것이고, 먹고살기 힘들어서 농기구 대신 병장기를 쥔 자들도 있을 것이고. 근데 그걸 분간하고 있을 시간이 없구려. 알다시피 우리 일정이 상당히 빠듯하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운을 뗀 은하연은 소매에서 지도를 꺼내더니 계속해 말을 이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조금 가면 은휘상단의 청양현 지부가 있어요. 지도상으론 정무학관이 있는 단강구와 조금 멀어지긴 하지만 거기서부터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스르면 충분히 상쇄될 것이라 봐요. 그러니 오늘 밤은 여기서 비를 피하고 날이 밝으면 그리로 가서 인계를 하면 어떨까요?”
거리상으론 문제가 없긴 한데, 가장 중요한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하여, 나는 은하연을 향해 되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정리가 깔끔하게 되겠소?”
“네. 그곳의 현령께서 제법 공명정대하다 이름나 계시니, 죄질에 따라 태장도유사를 알맞게 내리실 것이라 봐요.”
“흠, 관무불가침이라 알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랑 엮인 은원을 떠넘기는 꼴인데 그건 괜찮소?”
“관무불가침이라 하나 산적은 민생을 괴롭히는 좀 같은 자들이니, 애초에 관의 영역이기도 해요, 게다가 구화채의 위치가 청양현의 경혈을 누르고 있는 형국이라 애초에 골칫거리였을 거예요.”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합시다.”
“네. 그럼 이곳 명산객잔에 대한 피해 보상은 제 선에서 하기로 할게요, 음. 구화채에 모여 있을 재화는 청양현에서 상단의 사람을 보내 회수하게끔 하여 본래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려보내면 되겠죠?”
음.
뭐, 이게 맞긴 하지?
“아, 물론, 관아에서 주는 상금과 주인을 가리기가 힘들어진 재화들은 잘 추린 다음 언 공자께 돌아가도록 조치할 거고요.”
“뭐, 그러면 되겠구려.”
- …제 몫이 없을 것 같으니까 입을 꾹 다물고 뭐 씹은 표정을 짓더니. 있다니까 빵긋 웃는 것 좀 보게.
…아니.
이번에는 좀 억울한데요 사부님?!
이건 은 소저의 말대로 하면 깔끔하게 마무리가 될지 어떨지를 고려해 보다가 괜찮겠다는 생각에 나온 미소거든요?
그때였다.
산적들의 처분과 단강구로 향하는 진로를 어떻게 할지에 관한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는 그때.
“험험.”
가만히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고 서 있던 하성이 녀석이 대뜸 헛기침을 했다.
“뭐? 왜?”
하여, 왜 그러냐 물었더니.
“흠흠.”
이 녀석이 하라는 답은 안 하고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며 턱짓으로 객잔 주변을 가리켰다.
그로 말미암아 이 자식이 왜 이러나 생각을 해보니.
짭호대장군 중 두 명은 자신이 잡았으니 칭찬을 해달라는 것으로 보였다.
“…뭐? 칭찬해 달라고?”
“옙.”
어휴.
이 자식이 상행이나 표행에 나온 것이 처음이니 그러면 첫 살인을 한 건데, 그러면 좀 벌벌 떨고 뭐 그런 맛이 있어야지, 칭찬을 해달라고?
솔직히 말해 어이가 좀 없긴 했다.
하지만 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 나이 때 무림인이 다 그렇지 뭐.’
전생을 살았던 현대 사회에서는 사이코패스로 분류될 성정이지만, 이곳은 악을 처단하는 협객을 선망하고 존경하는 세상이었다.
하여, 나는 옜다 관심이다 하는 생각으로 하성이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쓰다듬어….
빡!!!!
“앜!!”
…주려다가 날아간 세월의 저주가 든 부적값과 이 녀석이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역정의 형태로 뭉쳐지길래.
뒤통수를 후리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 자식아! 언제 사람 될래?! 이 자식아!!”
“아니 이유나 알고 좀 맞읍시다!!”
“맞읍시다?! 맞읍시다아아아?!”
“…마, 맞읍시다요!”
“오냐. 그럼 알고 맞아라. 그게 온전한 니 실력이냐? 내 진법 아니었으면 바로 뒈졌을 녀석이, 그리고 방금 전까지 산적 중엔 좀 불쌍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형님 누님 이야기하시는데 귀 안 열지?! 안 열어!!”
“앜!! 아아앜!!!!”
“언제 사람 될래! 언제 사람 될래?!”
“언 공자!”
“왜 부르시오? 소저도 치고 싶소?”
“그게 아니라 어디서 이상한 냄새 안 나요?”
킁.
“…음. 탄내 같소만?”
“아! 맞다! 죽! 죽 타요!”
봄이었다.
* * *
“저 자식은 진짜 언제 사람이 될까.”
당연히 은하성을 말하는 거다.
지금 객잔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아주 구연동화를 하고 있는 저 자식을 진짜 어떡하지?
“수백 명에 달하는 녹림의 무리가 객잔을 둘러싸고 젓갈을 담그겠다 어쩌겠다. 겁박을 시작했소.”
“그냥 녹림이 아니잖습니까요! 강남 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구화채의 완삼석 아니었습니까요?!”
애초에 수백 명이 아니야….
백 명 남짓에 하성이 녀석이 맡은 건 끽해야 스물?
“내겐 그저 산적 놈일 뿐이니까. 또 나는 악인들은 그런 식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소.”
“크으으으! 역시 강남신협!”
“강남신협! 강남신협!!”
지랄하고 자빠졌고.
“양민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이쪽 편에 있는 사람 중 허리에 검을 찬 사람은 딱 셋뿐이었소. 개중에 내 누님은 무공을 배우지 않으신 몸이라 사실상 두 명이었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겠습니다요?!”
“그랬지. 모두가 벌벌 떨었고 끝이구나 절망했을 거요. 하지만 그때 내가 앞으로 나섰소, 그런 내게 사람들은 걱정의 말을 던졌지. 나는 그들에게 말했소.”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요?”
“나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소.”
“키야아아아!!”
“강남신협! 강남신협!!”
염병하고 자빠졌네.
하.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떠올리려면 잠시 기억을 거슬러야 한다.
우리는 은하연의 제안대로 구화채의 뒷 마무리를 청양 현령과 은휘상단의 청양현 지부에 맡겼다.
이 과정에서 상금을 타가는 사람의 이름을 관에 올려야 했는데, 나는 호적에서 파인 신분이다 보니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아 은하성의 이름으로 올렸다.
‘그리고 배를 탔지.’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무창에 도달했고, 거기서부터는 관도를 따라 북상했다.
굵직한 뱃길과 관도를 이용했기에 그 다음부턴 큰 사건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무과보다 나흘 먼저 실시되는 문과의 시험 일자에 맞추어 정무학관이 위치한 단강구에 도착했고.
“공자께서는 당연히 합격하실 테니 저만 잘하면 동기생이 되겠네요. 그럼 학관에서 뵙겠습니다.”
“그러는 걸로 합시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네!”
은하연의 배웅도 잘 끝냈다.
근데 무과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사흘이 문제였다.
내 예상대로 단강구 일대가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인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기에 숙소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형님, 방이 있다는 객잔이 없습니다.”
“웃돈을 준대도?”
“예. 형님.”
워낙에 정무학관과 무당파 그리고 제갈세가가 꽉 잡고 있는 동네라 은휘상단도 지부를 내지 못한 곳이라 직접적인 도움도 구할 수 없었고.
돈으로도 안 됐다.
“협상 제대로 해본 거 맞아?”
“제가 형님께 처맞는 게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강남상왕의 용혈인데 협상을 안 해봤을까 봐요. 없답니다. 다른 지방에서 집을 살 수 있는 금액을 부르면 되기야 하겠지만 그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흠. 그럼 얄짤 없이 노숙을 해야 하나.”
물론 거절하기엔 너무 큰 금액을 부르면 안 되는 일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사흘에 그런 금액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그, 말씀 중에 죄송한데 강남상왕의 용혈이시라면 혹시 은하성 대협 되십니까요?”
“대협은 모르겠고. 제가 은하성은 맞는데요?!”
“으, 은공을 뵙습니다!! 구화산 인근의 명산객잔을 기억하십니까요?!”
“당연히 기억하죠. 산적들이랑 거기서 싸웠는데.”
“그날 거기에 친정을 가던 며느리와 제 자식 놈이 있었더랬습니다!!”
구화채의 산적들과 맞붙었던 그 자리에, 단강구에 객잔을 가진 노부부의 자식 내외가 있었던 것이다.
“?!”
“!”
그 순간, 은하성은 내게 묵언의 신호를 보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과 제법 안락한 숙소와 식사를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풍문을 접해보니, 구화채가 무너진 소식이 청양 현령발 상금 수령인이 은하성이라 카더라 하는 소식과 합쳐져 은하성의 이름 앞에 강남신협(江南新俠)이라는 별호가 붙어 있었다.
“저기 앉은 저 형장도 그때 힘을 보탰지만, 뭐 사실상 내가 다 했다고 볼 수 있지! 핫핫핫!”
“강남신협! 강남신협!”
하여 나는 저 꼴을 근 삼 일째 지켜 보고 있게 되었는데.
신이 나서 점점 더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하성이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자동으로 혀가 차졌다.
“쯧쯧.”
내 공을 저놈이 가져갔다는 생각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방천덕의 목도 은정길 표두에게 줬었던 나다.
단지 내가 훈련시킨 올빼미가 아직도 천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쓰러웠을 뿐.
그렇지 않은가?
무림에서 이름 알려지는 게 꼭 좋은 게 아니다.
특히나 하성이처럼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 별호를 갖고 있는 경우….
쾅!!
“강남신협이 이 객잔에 있다고 들었는데 맞소이까?!!”
꼭~ 저렇게 날파리가 꼬인다니까?
어?
근데 왜 나한테 오지 저 날파리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