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살려야 한다 (1)
내가 대력궁의 활대를 부러뜨려 버리자.
팽재혁의 얼굴에는 당혹이 들어찼다.
“……?”
뭐, 전(前)용운이 녀석이 하북팽가와 무슨 일로 엮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덩치에 맞지 않게 흔들리는 동공과 떡 벌어진 턱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 자식이 이걸 어떻게?!’ 같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게 분명했다.
뭐, 원래의 언용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부터가 하필이면 이 자식이냐고 노래를 불렀던 녀석이니까.
뭐, 아무튼.
감독관이 그렇게 당황을 해버리니, 그 당황이 장내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어서, 이내 곧 시험장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하. 감히 내게 정급 무사 판정을 내리길래, 눈깔이 썩은 자들이 운영하는 별 볼 일 없는 곳이구나 했건만, 저런 사내도 정급 무사 판정을 받는 곳이라면 일단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
어떤 이는 나를 보며 자신이 정급 무사 판정을 받은 것을 합리화하는 듯했고.
“…내,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저 친구 저거 지금 다섯 점짜리 활을 당겨서 부러뜨린 거지?!”
“일 점… 이 점… 삼 점…. 다른 활은 모두 제자리에 있어. 몇 번을 다시 봐도 오 점짜리 대력궁이 맞는 것 같군.”
“사, 사실은 응시생들의 담력을 시험해 보려고 다섯 점짜리 활은 오히려 허접한 것을 둔 게 아닐까? 왜, 다른 녀석들 차례 때 감독관님도 용기가 없니 어쩌니 같은 말도 하셨지 않은가?!”
다른 어떤 이는 나를 보며 시험 속의 시험이라는 떠올렸는데.
곧이어 그런 생각을 깨뜨리는 자도 나왔다.
“…그럴 리가 없어. 이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다섯 점짜리 활을 쥐려는 생각이면 당장 접어. 초반에 대력궁에 도전했던 무사. 기억할 테지? 다른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산동(山東) 출신인 나는 알고 있는 친구였어. 제남표국의 소년 장사라고, 산동에선 다들 들어봤다 소리가 나올 정도의 명성을 쌓은 친구지. 그 친구가 저 활을 당기는 데 실패했으니 저 활은 제대로 된 대력궁이 맞을 거야.”
“…마, 말이 되나? 저게 진짜 대력궁이라면 최소한 삼십 년 내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아니지, 그저 당긴 게 아니라 아예 부쉈잖아. 그럼 훨씬 더 심후한 내력을 가졌다는 건데, 그런 자가 왜 고작 정급 무사 판정을 받고 이 시험장에 와 있겠어?!”
배편에는 정(丁)자 등편에는 번호가 새겨진 하얀 무복을 입고 있는 응시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색이 있는 무복을 걸친 조교들과 도우미 역할을 하고있는 재학생들도 그러했다.
“대력궁을 부수다니… 이제 이 학년이 되는 작년의 신입생 중에서도 저게 가능한 생도는 상위권에 해당하는 학생들뿐 아닌가…?”
“패, 팽 교수님이 도와주신 것은 아니겠죠? 아까, 칠십구 번 응시생이 숙부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나도 함께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죄, 죄송합니다. 정급 무사가 대력궁을 부수다니.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실언을.”
“조심하게. 그러다 진짜 큰일 나네. 그리고 팽재혁 교수님이 어디 그럴 분인가?”
“그, 그렇긴 하죠. 하북팽가는 팽재혁 교수님의 성화로 특별 입학 정원을 두 자리나 배정받았음에도 후기지수들을 모두 이 단계 시험부터 치르게 하겠다 한 가문이니까요.”
“그래. 거기다 칠십구 번 응시생이 숙부 소리를 했을 때 교수님이 지어 보인 표정을 나는 정면에서 봤네, 시종일관 호탕하시던 팽 교수님의 얼굴에 그런 노기가 들어찬 모습은 처음이었어.”
“…그, 그랬군요.”
“그나저나, 이번 기수는 진짜 대단하구만. 문과에서도 빼어난 성적으로 수위를 확정지은 친구가 나왔다던데. 정급 무사에서 대력궁을 부수는 친구가 나오고.”
“그러게요. 입학 전부터 소문이 무성한 제갈가의 소무후(小武侯)나 남궁가의 비룡검(飛龍劍)은 아직 참가도 안 했는데 말이죠.”
“뭐, 연구실에 들어가기로 한 나나 자네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지, 후배들은 똥줄 좀 타겠구만. 아무튼 슬슬 정리를 해야겠네, 나는 팽 교수님께 빨리 저 친구 보내고 다른 응시생들 시험 진행을 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러 갈 테니, 자네는 도우미로 나온 후배들을 지휘해서 한 명은 입관처장님께 보내서 예비로 준비해둔 대력궁 받아오게끔 하고, 응시생들도 조용히 좀 시키게.”
“옙!!”
저들끼리 뭐라 뭐라 웅성웅성들 데는데, 거의 뭐 시장통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아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끙.”
팽재혁이 한참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다물고 내게 다가서더니, 이 관문에 입장하며 걷어갔던 수험표의 무위란(武威欄)에 오 점을 적어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과다.”
“예?”
뭐라고요?
목소리가 덩치에 비해 너무 작으셔서 잘 안 들리는데요?!
“…통과다. 칠십구 번 응시생은 도우미 선배의 안내를 받아 기숙사로 가도록.”
* * *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 기간은 재학생들의 방학 기간 사이에 존재한다.
하여 관문 통과자들의 숙소는 기존의 기숙사를 사용한다.
- 진짜 규모가 대단하긴 하구나.
‘그렇긴 하네요.’
학관생 광장이라 부르는 원형의 정원을 중심으로 십(十)자 모양으로 배치된 네 개의 기숙사.
운매관(韻梅館)
향란관(香蘭館)
윤국관(潤菊館)
청죽관(淸竹館)
용사비등한 필체의 현판이 내걸린 건물은 관이라 되어 있지만, 형태는 패루(牌樓), 그러니까 홍살문 형태의 문이 달리지 않은 문(門)이고, 그 너머엔 작은 마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번듯한 기숙사 건물들이 자리해 있다.
‘확실히 번듯하긴 하다.’
부지부터 넓기도 넓거니와, 재학생 중 대부분이 방학 기간을 맞아 본가나 본파 혹은 연구 과제나 명성을 높이기 위해 협행을 나가기에 방실(房室)이 부족할 일은 없으니.
관문 통과자들의 숙소로 기존의 기숙사를 활용하는 게 정무학관의 행정처 입장에선 효율적인 것이다.
‘거기다 응시생들에게 자연스럽게 동기 부여도 할 수 있고.’
각 기숙사마다 사정의 차이는 있기는 하지만, 각종 연무장과 비동, 온천에 학관생 식당.
거기다 당장은 꾹 닫혀 있지만, 입관을 하게 되어 신입생의 자격을 얻는다면 드나들 수 있게 되는 비급과 각종 서적들이 잠자고 있는 장서각까지.
솔직히 말해 중원 어디를 가도 이만한 시설을 갖춘 곳은 없으리라.
하여, 지금 당장만 해도 고작 일 단계를 통과했을 뿐인 응시생들이 벌써부터 합격자가 된 듯 친목을 다지며 이관저관 몰려다니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올해는 꼭 합격을 해서, 사대 기숙사 중 한 곳의 일원이 되리라!!”
“사대 기숙사라 해도 선호하는 곳이 있을 텐데, 자네는 어떤 관에 들어가고 싶나?”
“일단 붙기만 해도 좋을 것 같긴 한데 고를 수 있다면 역시 운매관 아니겠나?!”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사대 기숙사의 패루마다 하나씩 놓인 흑판 중 하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짜 합격을 하고 싶으면 구경을 다닐 게 아니라 이 흑판을 잘 봐야지.’
이 흑판은 학기 중엔 각종 고사의 석차 같은 것이 기록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입관 시험이 진행 중인 만큼 통과자가 도착하면 석판을 담당하고 있는 도우미들이 통과자의 점수를 확인하고 기입 대상자면 기입하는 식으로 응시생들의 석차가 기록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응시생의 석차를 적어 놓은 것은 아니고.
통과자가 도착하면 점수를 확인하고 입학 정원인 백육십 명까지만.
- 네 이름은 없구나.
‘예. 아직 석판에는 못 올라갔네요.’
내 점수는 일 단계인 입관에서 정급을 받으며 감점 일 점, 이 단계인 무위에서 득점 오 점으로 총합 사 점.
지금까지 합격자들의 평균 점수가 십 점 정도고 아직 세 개의 관문이 더 남아 있음을 고려해 보면 고득점을 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일 단계와 이 단계를 면제받고 무조건 오 점을 받고 시작하는 명문대파의 특별 입학자들, 그리고 입관에서 이 점과 일 점의 가점을 가지고 시작하는 을급 무사와 병급 무사들과 달리 감점을 먹고 시작한 나였기에 당장에 석차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제갈설지. 남궁윤. 천장호, 당옥기, 팽소천 최상위권은 진짜….”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
하지만 해볼 만했다.
‘을급 이하로는 무위에서 오 점을 따낸 사람이 잘 없네.’
응시생 전원이 갈고닦는 무위에서 오 점에 도전한 자가 잘 없다면?
다음 단계들은 더욱더 방어적으로 치르겠지.
더욱이 다음 단계는 파훼.
진식과 기관을 시간 내에 주파하는 시험인 파훼는 숙련자 자체가 적으리라.
반면 나는?
시간을 머금고 있던 사부님의 진법도 찢은 나였다.
입시 진법(?) 정도는 말 그대로 누워서 떡 먹기였다.
‘다들 딱 내일까지만 내 위에 있는 것을 허락해주마.’
다들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을지.
어떤 성격들을 가지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기대가 돼.
‘음, 근데 하성이 녀석은 어떻게 잘 치렀으려나?’
* * *
이튿날 아침.
나는 언제나처럼 첫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아침 수련과 운기조식을 하고 식당을 찾을 요량으로 기숙사를 나섰다가, 하성이 녀석을 맞닥뜨렸다.
“역시. 형님께서는 여기서도 빼먹지 않고 아침 수련에 나서실 줄 알았습니다. 어제 형님을 찾아 나서려다가 너무 넓기도 하고, 형님도 피곤하실 것 같아서 아침 수련 나오실 때 기다리면 되겠다 하는 생각으로 이러고 있었습니다.”
시커먼 새벽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녀석을 보니 이런 종자 구하기 쉽지 않다는 사부님의 말씀이 문득 떠올라서 나는 피식 웃으며 답을 해줬다.
“피곤할 게 있나. 정급 무사는 활 당기는 게 무위 시험의 과제였는데.”
“오, 저희 방에 한 분이 정급 무사 출신이 계셔서 듣긴 들었습니다. 누가 대력궁을 부쉈다던데. 혹시 그거….”
“뭐, 나다.”
“여윽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가볍게 관절을 풀고 있는데.
“험! 험험험!”
하성이 녀석이 은근히 자기도 물어봐 달라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평소 같으면 쥐어박았겠지만.
그래, 오늘은 기분이다.
“…너도 어떻게 붙었다?”
“진짜 일생일대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도우미 선배님들이 강남신협 강남신협 해주시니까 뭔가 우쭐해서 한 삼 점짜리 신청하고 싶었는데, 그때 딱 형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르더라고요.”
“뭐? 너는 네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한 거?”
“예! 진짜 형님이 아니셨으면 저는 아마 짐 싸서 휘주로 돌아 갔을 겁니다. 이 점짜리 시험관으로 나선 선배도 진짜 겨우겨우 이겼습니다. 그쪽은 맨손이고 저는 목검을 들었는데도요. 그런 의미에서….”
하.
뭔가 쎄한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충성충성!”
아, 괜히 거뒀어.
뭐, 아무튼.
나는 합격의 기쁨에 신이 날 대로 난 하성이 녀석을 데리고 기숙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서로 번갈아 호법을 서주며 운기조식을 한 뒤.
학관생 식당으로 향했다.
“음? 무슨 일이 났나 본데요 형님?!”
그런데 식사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일렬로 똑바르게 되어 있지 않고, 구경거리라도 난 듯이 원의 형태를 그리고 있기에 가까이 가보니.
검은색 무복을 입은 재학생 도우미 몇몇이 백색 무복을 입고 있는 응시생 하나를 꿇어 앉혀 놓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네 녀석의 오만방자한 짓거리로 사숙조들께서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우셨거늘! 네 녀석은 뻔뻔하게 정무학관에 입관 시험을 치르러 왔단 말이냐?!”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형! 여기 있는 제 벗 철성이 어제 입관 시험의 창구 중 하나를 담당했었는데, 정현 저 녀석이 응시생들 앞에서 자신이 무당의 제자임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었답니다. 그로 인해 저희 향란관이 아주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허! 여기 네 사숙의 말이 사실이냐?!”
“…사실과 다릅니다.”
“아니라고는 못 하고 다르다고 하는구나?!”
“…그건!”
“듣기 싫다! 너는 무당의 수치다! 이 자리에서 네 몸에 걸치고 있는 정무학관 응시생의 무복과 송문검을 내게 내거라! 그리고 이곳에서 나가거라!”
하여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보니, ‘정무학관의 검술천재’의 대목을 장식하는 사건의 한복판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