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살려야 한다 (2)
- 보아하니 검은 무복을 입은 놈들도, 하얀 무복을 입은 녀석도 모두 다 무당의 말코 놈들인 것 같구나?
‘예. 사부님. 저한테 싸가지 없이 굴었던 조철성이 놈 말고 두 명은 무당의 이대 제자, 저기 꿇어앉아 있는 허연 녀석은 삼대 제자입니다.’
- 근데 어찌 저리 제 놈들의 사질을 쥐 잡듯이 잡는 게냐? 무당의 말코 놈들 하면 본디 피와 오물이 낭자하는 강호에서 허연 옷을 쳐 입고 젠체하고 돌아다니는 별종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 식구에게 뭔 일이 터지면 그 느려터진 검술로 부득부득 덤벼오는 녀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무슨 사정이 있나 보구나?
‘있죠.’
- 어떤 사정이냐? 어중간한 사정은 아닐 것 같아 퍽 궁금하구나.
‘이걸 풀어서 설명을 드리려면 좀 긴데,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저기 저 하얀 무복을 입은 녀석이 정현이라는 녀석인데, 녀석에게 태사숙조 배분이 되는 무당의 장로 중 하나를 저 녀석이 발고를 했습니다.’
태초에 맑았던 물이라도 고여 있다 보면 썩기 마련이고, 그 썩은 내가 진동을 하면 누군가는 코를 싸쥐고 나서기 마련이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지.’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면 시대를 막론하고 장소를 불문하여 일어나는 일이다.
무당파가 소림과 함께 백도 무림의 두 기둥 소리를 듣는 문파이자, 천하제일 도문 소리를 듣는 문파이긴 하지만, 무위자연을 찾아 떠난 도사가 아니라 검을 쥐고 강호에 남은 도사들이다.
직위가 존재하고 배분이 존재하니 필연적으로 권력이 있을 수밖에 없고.
수많은 제자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기에 속세에 뻗쳐 놓은 사업체와 속가 문파들이 문어발 저리 가라 존재하니, 그를 두고 알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어른들의 사정이 얽히고설켜, 한 사건이 발생한다.
‘무당파에 태허자(太虛子)라는 양반이 있습니다.’
- 스승이 빌 허(虛) 자를 도호에 쑤셔 박은 것을 보면 거 떡잎부터 욕심이 가득했던 놈이겠구나.
‘오. 맞습니다. 원래 무당의 살림을 맡고 있던 분으로 금력으로 자신의 제자를 대제자로 만들어 무당파의 다음 대권을 틀어쥐려는 분이었는데, 근래에 투자를 잘못해서 큰 손실을 보자, 그 태허자라는 양반은 그걸 메꾸기 위해 흑도 방파중 하나인 자귀방이 설치는 걸 의도적으로 방임했습니다.’
- 쯧. 백성들을 직접 털어먹을 수는 없으니, 그 자귀방이라는 곳이 고혈을 빨아 커지면 그곳을 털어먹을 요량이었나 보구나?! 에이이이잉!!
‘예. 그걸 알게 된 저 정현이라는 녀석이 관아랑 무림맹에 발고를 하여 한동안 강호가 시끄러웠다 알고 있습니다.’
- 하여간에 백 년쯤 지났으면 물갈이가 됐을 법도 한데, 여전히 음습한 종자들이로다! 뭐, 그래도 저 정현이라는 녀석은 제법 양심은 있는 녀석인 것 같긴 하구나, 주변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저 녀석의 일이 의로운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문에 공개적으로 먹칠을 하게 되는 일을 한다는 게, 삼대 제자 정도의 배분인 녀석이 하기가 쉬운 게 아닌데….
사부님의 말씀이 맞다.
‘전생의 대한민국에서도 내부 고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시대에 저런 짓을 하는 것은….’
속된 말로 또라이다.
‘음,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올곧은 또라이라고나 할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어떤 일이 그르다 생각되면 제 주제와 실력을 고려치 않고 막아서는 답답할 정도로 곧은 인물이 바로 정현인 것이다.
‘내 성격이랑 반대인 부분이 많은 성격을 가진 녀석이라 한 번씩 진짜 답답했었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상황도 그 한 번씩 답답했던 대목 중 하나였다.
‘나였으면 바로 따지든지 따귀를 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서 저런 꼴은 절대로 안 당했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원작에서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됐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원작에서는 특별 입학자들이 이른 아침 입관해서 기숙사를 안내받아 오다가 이 상황을 목격하고….’
개중에 한 명이 나서서 재학생들을 물러나게 한다.
근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렇게 나서는 인물이 다름 아닌 언용명이었다.
하여, 나는 ‘오랜만에 용명이 녀석 얼굴 한번 보려나?’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살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현과 검은 무복의 선배들 간의 실랑이를 구경하고 있는 응시생 중 때깔이 좀 달라 보이는 녀석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 용명이 녀석도 있었다.
‘저기 있네.’
그에, 숨은그림찾기에서 원하던 숨은 그림을 찾았을 때의 반가움이 잠시 내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 순간 뇌리에는 전혀 다른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근데 용명이 저 자식은 왜 안 나서고 구경만 하고 있지? 정현이 제 손으로 무복을 벗기 직전인데…?’
그러고 보니 용명이 녀석의 시선이 정현이나 검은 무복을 입은 선배가 아니라 내게 고정이 돼 있었다.
아울러 녀석이 지어 보이고 있는 표정으로 짐작건대, 저 녀석은 지금 ‘형이 왜 거기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용명이 녀석의 안중에는 정현이 아예 들어 있지도 않은 듯 보였다.
‘엿 됐다.’
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으며, 빠르게 앞뒤를 재보았다.
애초에 어지간하면 남의 집안일에는 오지랖을 떨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미덕이다.
심지어 상대는 조교 혹은 도우미를 맡고 있는 학관의 선배들.
입관 시험이 한창 진행 중인 지금 저걸 막아서고 나설 놈이 있을까?
‘…없겠지?’
이 경우엔 귀책 사유가 선배들에게 있다 하나, 입관 절차를 거치며 본 장면들이 뇌리에 남아 있을 테니 감점이나 탈락 처리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응시생들의 행동을 지배할 것이다.
그걸 떠나더라도 합격 이후의 학관 생활도 있으니, 선배들에게 대들고 싶은 녀석은 없을 것이다.
‘나설 놈이 없다.’
그럼 아무도 안 나서면 어떻게 되지…?
“태사부님과 몇몇 장로님들이 너의 자질을 높이 사 네가 사문에 먹칠을 한 일이 그냥 넘어가게 되었지만, 무당의 모든 이가 너를 용서한 것은 아니다, 네가 지금 여기 있을 때냐? 너는 모든 무당의 궁과 각을 돌며 매일매일 사죄를 해야 한다. 네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은 너를 거둬 주신 태영 사숙조를 욕 먹이는 일이야!”
시시각각 심해지던 선배들의 비난 끝에 마침내 정현의 역린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태영자.
그는 천애 고아였던 정현을 거두고 먹이고 기른 사람이다.
저 이름이 나오면 정현은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대로 뒀다, 정말로 자신이 정무학관에 있는 게 태영자를 욕 먹이는 일이라는 판단을 내리면 농담이 아니라 정현이 정말로 응시생용 무복을 벗고 무당산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무학관이 무림학관의 검술천재가 없는 무림학관이 되잖아.’
뭔, 홍철 없는 홍철 팀도 아니고!
쟤가 정무학관을 나가면 그 많은 업보와 숙적과 닥쳐올 과제들을 누가다 감당하라고?!
안 되지, 안 돼!!!
‘살려야 한다….’
나는 까득 이를 깨물며, 원작의 대목 한복판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보며 은하성이 어쩌시려고 그러냐는 듯이 입을 열었고.
“혀, 형님?!”
시끄럽다.
지금 세상이 망할 위기거든?
사부님께서도 한 말씀을 하셨다.
- 흠. 네 녀석이라면 나설 줄 알았느니라. 이상한 대목에서 곧은 녀석 같으니.
전혀 아니거든요?!
* * *
그렇게 걸음을 옮기며 나는 마지막으로 나비 효과의 가능성을 되짚어 보았다.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한데.’
원작의 언용명이 했던 대사의 요지는 대충 기억하고 있으니, 적절히 선배들도 물러나게 하고 정현도 눌러 앉힐 수 있을 것 같긴 했고.
마인들이 튀어나오는 굵직한 사건들과 얽히거나 하는 사건은 아니니 괜찮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생각대로 풀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지.’
뭐, 그 부분은 은하연 때처럼 어떻게 부딪혀서 해결해 봐야겠지.
아무튼,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거리가 좁혀졌고.
구경꾼들을 헤집고 불쑥 튀어나온 나를 발견한 검은 무복의 선배 중 서로 안면이 있는 한 명이 입을 열었으니.
“…너는 그 입관식 때? 그 특이 사항?”
다름 아닌 입관 절차에서 내게 정급 무복을 던지듯 내줬던 조철성이었다.
그런 조철성의 음성에, 무당의 이대 제자로 보이는 자 중에 급이 높아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특이 사항?”
얘가 아마 도호가 운혁인가 그럴 거다.
나는 ‘원작대로. 원작대로.’를 속으로 되뇌며 운혁을 향해 우선 포권을 취했다.
“예. 선배님 언용운이라 합니다.”
“언가? 하북의 진주언가의 자제이신가?”
진짜 여기까지는 원작이랑 거의 흡사했다.
그런데 여기서 조철성이 띠꺼운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고 나섰다.
“그 언가의 씨긴 한데, 쫓겨난 녀석입니다. 왜 작년에 하북에서 망나니 하나가 가문에서 내쫓겼다는 소문이 이곳 호북까지 파다했지 않습니까?! 그놈입니다. 사실상 군소 방파의 후기지수만도 못한 녀석입니다. 그래서 정급을 받은 거고요. 제가 특이 사항이라고 기억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하.”
그렇게 운혁에게서도 코웃음을 끌어낸 조철성은 나를 향해 혀를 차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쯧쯧. 이봐 특이 사항. 그리고 내가 왜 네 선배냐? 아직 합격도 하지 못한 정급 무사 주제에 감히 그 말을 입에 담지 마라.”
음.
나는 진짜 원작의 언용명이 했던 대사를 침착하게 치려고 했는데, 조철성의 태도가 너무 고까웠다.
하여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아저씨.”
“…뭐라?”
그런 내 음성에, 구경을 하고 있던 응시생 중 몇몇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졌네.
깊은 빡침이 몰려와서 나도 모르게 평소의 말 버릇대로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나는 과와 실을 따져놓기 위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 아저씨는 너무 갔나? 근데 선배는 하지 말라 하시고… 그런데 또 선생이라 부르기엔 덕이 너무 부족하신 것 같은데… 음. 그럼 형씨?”
“보자 보자 하니까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구나?”
그런데 붉으락푸르락해진 조철성은 그 말과 함께 곧바로 내게 일장을 내질러 왔다.
음.
아직 늦지 않은 줄 알았는데, 살짝 늦은 모양이었다.
쌔액-!
하지만 사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 가장 빠른 때다.
샥-
나는 어깨를 살짝 틀어 조철성이 내지른 일장을 유려하게 피했다.
그러자, 조철성의 눈이 짐짓 휘둥그레졌는데, 나는 그 틈을 타, 조철성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형씨. 그만합시다. 후배들도 많은데 쪽 그만 팔고.”
그러자, 조철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에서 시커먼 단계로 넘어가더니.
“이! 이잇!”
일장을 내질렀던 손바닥을 용의 손톱처럼 반쯤 쥠과 동시에 일장을 금나수법으로 전환해 나를 움켜쥐려 했다.
그러나 이런 허접한 금나수에 잡혀주면 파천십이보를 허투루 배웠다는 잔소리를 사부님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연화봉에서 또 뛰어내려야 한다.
아니다, 여기는 무당산이 가까우니 거기서 뛰어내려야 한다.
나는 잔발로 보법을 밟으며 조철성의 팔을 처냈다.
파팍!
그리고 파천신공을 아주아주 가볍게 운용하며 파천검결의 선삼초 중 내지르는 초식인 파천맹진을 내질렀다.
샥-!
물론 나는 검을 쥐지 않고 단순히 손바닥을 뻗었기에, 그 자체로 허초였다.
하지만, 조철성의 얼굴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를 쏘아줄 정도는 됐다.
화아아악!!!!
그에, 방금 내가 내력을 많이 실었거나 검을 들고 있었다면 제 머리통이 날아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선 채로 망부석이 된 조철성.
“…….”
“쯧. 그러게 내가 진즉 그만하자고 했잖소. 형씨.”
나는 그런 조철성을 스치듯 지나치며 나지막이 한마디를 전한 뒤.
운혁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보고 있자니 이래저래 조금 심하신 것 같아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선배님. 아, 선배님도 혹 선배 소리가 싫으실까요?”
“…선배라 불러도 좋네. 남의 사문의 일에 끼어드는 이유가 뭔가? 그 사문이 심지어 무당파라는 건 알고 있겠지?”
“어휴. 그럼요. 천하제일도문! 무당! 잘 알죠!”
“그런데도 끼어들겠다는 건가?”
“그게 제 일이기도 한 것 같아서요.”
“자네 일이기도 한 것 같다고?”
“예. 외람된 말씀이오나, 정무학관의 입관 시험에 부정행위를 시도한 자는 백도 무림에서 영원히 퇴출한다는 조항이 학관의 학칙과 무림맹의 맹칙에 명시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지?”
“보기에 따라선 여기 이 친구에게 시험 포기를 강요하는 선배님들의 모습도 성적 조작이나 부정 시험으로 비출 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요. 누군가는 반사 이익을 누릴 테니까요.”
“……!”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작의 대사. 어쨌든. 성공적.